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4)화(34/171)
일곱 언덕 중 마지막 두 언덕 사이에 난 좁다란 길. 인적이 드문 걸 떠나 어디로도 닿지 않기에 드나들 일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서프레디 사람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여섯 번째 길이었다.
“분위기가 묘하네.”
세벨리아는 짐가방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언덕 사이를 빠져나와 여섯 번째 길 초입에 다다르자 풍경이 바뀌었다.
발목까지 올라왔던 들풀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허리춤까지 자란 초목이 사방을 에워쌌다. 마치 정체 모를 존재에 의해 포위된 듯, 공기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전 여관을 둘러싸던 기사들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환영이 없어져야 할 텐데.’
“아.”
떠올리기가 무섭게, 환영에 연결되어 있던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세벨리아는 텅 빈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디하트…….”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 가짜를 향한 그의 절박하고 애달픈 시선. 고통스럽게 부르던 자신의 이름….
“아니야.”
세벨리아는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미 우리는 끝난 사이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었고, 결국 그에 어울리는 결말을 맞이한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듯 두 손을 맞잡았다. 가짜 세벨리아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작전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뒷문을 지키던 기사들까지 모두 되돌아와 환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도망쳤고.’
디하트를 목전에 두고 도망치는 건 힐렌드 홀에서 도망쳤을 때와 달리 무척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그들이 거짓을 알아차리고 쫓아올까 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대로 끝나기만을 바라야지.”
세벨리아는 자신을 뒤쫓는 디하트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중앙 출신의 사생아 공작부인. 그것도 잘해 주려던 그를 배신한 은혜도 모르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나를 그리워한다고?
이성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서프레디에서 그녀가 보고 목격한 모든 것들. 디하트의 그 애절함과 절박한 모습들을 토대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년간 상처받아 굳게 닫혀 버린 마음의 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나서 시작된 후회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세벨리아는 그의 감정을 믿을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달라진 그의 태도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디하트라는 남자는 차갑고, 냉소적이며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비위가 약해서.]그 순간 자신이 느낀 절망과 모욕감. 온몸을 훑어 내리던 수치심과 자괴감은 겨우 디하트의 애절한 목소리 하나로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우…….”
과거를 떠올려서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세벨리아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팽팽하게 당겨 있던 공기가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아.”
마지막으로 긴 숨을 내쉬고 세벨리아는 눈을 떴다. 메슥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이제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야.’
이대로 워츠라는 의원의 연구실로 향하면 병이 낫기 전까지 다시 도시로 내려올 일도 없었다. 반면 디하트는 한 가문의 수장이며 북부를 이끄는 공작이니 머지않아 다시 돌아갈 게 틀림없었고.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이제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여섯 번째 길에 들어가기 전에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나 싶어서였다. 하다못해 표지판이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았으나 그런 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미심쩍었으나 얼시크의 의원이 알려 준 길은 이곳이 맞았다. 세벨리아는 가방을 움켜쥐고 용감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한순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밀도 높은 공기가 그녀를 빠듯이 에워쌌다. 그리고…….
‘빛이 없어.’
세벨리아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볕이 단 한 줌도 남지 않은 새카만 하늘이 그녀를 맞이했다.
“현실과 분리된 공간이구나.”
그제야 세벨리아는 잡화점 주인이 말했던 이야기가 사실임을 깨달았다. 팔다리가 뒤틀리거나 다친 사람은 없지만 모두 울며불며 나왔다는 말을.
이곳은 워츠라는 의원이 타인의 출입을 거부하기 위해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공간. 한마디로 거짓으로 꾸며진 미로나 다름없었다.
“음…….”
세벨리아는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민했다.
얼시크의 의원은 분명 그가 자신이 보낸 손님이라면 맞이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이들과 달리 순조롭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 세벨리아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움텄다.
* * *
디하트는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무튀튀한 늪이었고, 걸음을 뗄 때마다 검은 형체들이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오빠, 같이 있어 줘. 오빠.] [가지 마렴, 아가. 네가 없는 이곳은 너무 외롭구나…….]그들은 입을 벌리고 차가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붙잡았다. 그의 죄책감을 뒤흔들고, 동정심에 호소하며 굳게 닫힌 마음의 벽을 안에서부터 부숴 나갔다.
어차피 네게 가족이란 우리밖에 없잖니.
웃음기 어린 음성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진창 속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말로는 우리가 널 버렸다 하지만, 실은 그 반대라는 걸 알고 있잖아.] [디하트, 사랑스러운 내 아들. 왜 이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니?] [우리는 삼촌의 손에 모두 죽어 버렸는데. 왜 오빠 혼자서만 살아서 행복을 누리려고 해?]이건 그 대가야.
“아.”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디하트는 아래서부터 뻗어 나온 수십 개의 검은 손이 자신을 끌고 내려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래, 이게 맞아.”
처음부터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 애초부터 내게 온화하고 따스한 가족 같은 건 주어지지 않을 운명이었어.
내 손으로 그들을 버렸잖아.
검은 손은 천천히 그를 늪의 바닥으로 초대했다. 무겁고 끈끈한 물이 어느새 목덜미까지 차올랐다. 그는 조금씩 숨이 막혀 가는 걸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커헉……!”
“정신을 차리셨군요.”
낯설지만 화가 치밀도록 담담한 목소리였다. 디하트는 고통에 신음하다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의원인가.”
흰색 가운을 차려입은 의원은 청진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디하트는 걷어붙여진 손목을 내려다보고 고통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벌건 주사 자국이 제 존재를 자랑하려는 것마냥 부어오르고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약이 독해서 그렇지 효과는 좋죠.”
의원은 몸으로 확인하지 않았냐는 듯 흘끗 시선을 주더니 들고 있던 청진기를 내려놓았다. 디하트의 형형한 눈빛을 보고 그가 쉽사리 청진에 응해 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보호자 분을 불러오겠습니다.”
“…….”
보호자? 디하트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의원은 그 반응을 보고도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방을 나섰다. 곧 일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내가 정신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있었지?”
디하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세벨리아가 깃털로 화해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제 귓가에 심장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끔찍한 말을 전한 뒤, 물거품처럼 사라진 그 순간 말이다.
“공작님이 혼절하신 뒤에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정체가 마법사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출입문마다 마법사나 주술사를 한 명씩 배치해 두었습니다.”
“마법사, 마법사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디하트가 얼굴을 감싸 쥐며 읊조리듯 말했다. 겨우 받아 낸 세벨리아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순간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품 안을 채우던 사랑스러운 존재가 덧없이 스러진 순간의 그 끔찍한 감각이라니.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그건 이미 생명을 잃은 상대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고통이었다. 차라리 제 품에서 조용히 숨이 꺼져 가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지막이라니.
그 순간, 디하트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호흡해야 했다. 살아서 다시 움직여야 했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누가 되었든, 뭐가 진실이든…… 이제는 상관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낸다.”
진짜 세벨리아라면 그녀가 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리라. 하지만 만약 다른 이가 세벨리아의 모습을 훔쳐 자신을 기만하려 한 것이라면…… 용서 따위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서를 손에 넣었습니다.”
일레이가 몸을 일으킨 디하트를 부축하며 말했다. 디하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가 이어서 말하라 고갯짓하자 일레이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마법사가 광장에서 뭔가를 들고 있었던 걸 기억하십니까?”
“……짐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
“여인의 몸으로 그리 무거운 짐들을 들고 장시간 움직일 수는 없지요. 그래서 광장 근방의 가게들을 중심으로 탐문을 했습니다.”
일레이는 그 과정에서 디하트의 펜던트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급히 몽타주를 작성했다고 실토했다. 디하트의 이마에 순간 힘줄이 돋아났으나 예상과 달리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세벨리아가 사라진 뒤 혼절한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냈나?
“예. 잡화점 주인이 그녀와 대화를 나눴던 걸 기억하고 있더군요.”
일레이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말했다.
“서프레디 산맥에 숨어 사는 의원을 만나러 여섯 번째 길로 간다고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