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5)화(35/171)
“역시 제대로 된 길은 없네.”
짙은 밤이 드리워진 숲속. 가능한 선 안에서 주변을 둘러본 세벨리아는 확신했다. 이곳에 눈에 보이는 ‘길’이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
땅에 내려놓은 가방 틈새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닥 부분이라 보지 못하고 지나친 듯싶었다.
“뭐지? 내가 가져온 것 중에 혼자 빛을 낼 만한 것은 없는데.”
불쏘시개는 가져왔지만 그게 저렇게 태양 같은 빛을 낼 리는 없었다. 게다가 만약 불쏘시개가 맞다 하더라도, 그 전에 이미 가방이 타 버렸겠지.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가방의 잠금쇠를 풀었다. 여러 가지 필수품과 함께 잡화점에서 사 온 물건들이 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마침내 빛의 정체가 나타났다.
“소견서…… 아!”
세벨리아는 그제야 얼시크의 의원이 소견서를 작성한 뒤 그 위에 무언가를 뿌린 걸 기억해 냈다. 마법적 처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타인이 소견서를 열어 볼 수 없도록 하는 용도일 거라 추측했었다.
‘설마 이런 용도일 줄은.’
아마도 얼시크의 의원은 세벨리아가 겪게 될 난항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 하기야, 친한 사이 같아 보였으니.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소견서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전보다 더욱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봉투를 봉인한 인장 위로 가느다란 빛이 떠올랐다. 마치 어둑한 밤바다에 길을 드리우는 등대의 빛처럼 빛무리는 숲 안쪽을 향해 길을 만들었다.
“……저기구나.”
시름에 젖어 있던 세벨리아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그녀는 바로 가방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이건만 초목이 흔들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곧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어둠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 * *
“사람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불법 점거한 땅 주위에 이상한 수작을 부려 놨다고?”
“예. 그래서 꼭 준비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답니다.”
“내가 설명을 바란 건 그 부분이 아니야.”
일레이가 잡화점에서 사 온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디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 도시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당초 불법 점거한 자를 쫓아내면 될 일이 아닌가. 서프레디 남작은 도대체 왜 그런 자를 내버려 둬서 일을 이 지경으로 키운 거지.”
쯧, 하고 혀를 차는 디하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여섯 번째 길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물’을 챙기고 있는 이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세벨리아일지 아닐지 모르는 이가 그곳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그를 심란케 했다.
‘나와 마주치기 전부터 그곳에 가려 했다고.’
시간상으로 따진다면 세벨리아는 그보다 뒤늦게 도착해 여섯 번째 길에 가기 위해 준비물을 사러 잡화점에 들린 게 된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뒤흔들기 위해 보내진 수상한 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미치겠군…….”
디하트는 의자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를 두고 세상이 뒤집히고 뒤틀리는 것 같았다. 거센 폭풍이 쉴 새 없이 그의 주위를 난도질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쪼개지는 소리. 벼락이 치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두 눈.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디하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유리시켰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물거품처럼 사라진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그의 뇌리를 울렸다.
[미련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이미 죽은 사람. 설령 그녀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당신 곁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요.]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울컥 치솟아 오른 게 핏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입을 적신 건 쓴물이었고, 상처받은 건 오로지 그의 영혼일 뿐이었다.
‘차라리 말이 칼이 되어 나를 찔렀으면.’
그랬다면 그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죽었을 텐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이었다.
‘살아난다 하더라도 내게는 오지 않는다고.’
깃털로 화하여 사라진 그녀가 제 귓가에 내뱉은 말은 그 정도로 너무나 끔찍했다.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준비가 끝났습니다.”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하트는 텅 빈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어. 그는 바보 같은 짐을 넘겨받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만일 그의 손에 잡히는 게 세벨리아가 아니라면…….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그가 감히 용서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그의 아내뿐이었다.
* * *
낮인지 밤인지, 하루가 지났는지 아직 그대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벨리아는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방향도, 시간도 알 수 없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가느다랗게 뻗어 나간 빛의 길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벨리아는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숲속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인지했다.
“그림자가……. 잠깐, 그렇다면 빛이?”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장막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막막했던 하늘에 어느새인가 달이 떠 있었다. 호수처럼 푸른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지며 부풀어 오른 달을 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네.”
세벨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달이 떴다는 건 여러모로 그녀에게 좋은 징조였다. 앞뒤도 분간할 수 없는 광막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에 의지해 걷는 건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피로한 일이었으니까.
“휴…….”
이렇게 된 김에 잠시 쉴까. 그녀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느끼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변에 앉아서 쉴 만한 너른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바위 위에 앉았다.
“아으…….”
몸을 늘어트리자 피로가 그녀를 덮쳤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꽤나 긴장해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힘을 빼자 그제야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허기까지 졌다.
‘실은 꽤 오랫동안 걸었나 봐.’
시간 감각이 망가진다는 게 이런 건가. 멍하니 어둠 깔린 숲을 바라보던 세벨리아가 이내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달빛이 닿는 거리에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하나둘씩 주웠다.
헛손질을 두어 번 하고, 겨우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세벨리아는 뭉근하게 끓어 가는 스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허기를 해결하고, 혹시 모르니 지금 잠을 좀 자 둘까 고민하는 동안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앙-!
“……?”
흠칫 놀란 세벨리아는 굉음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뿐.
하지만 그녀는 분명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을 들었다. 분명 이 공간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상해를 입고 나왔다는 사람은 없었어. 그렇다면 도대체 뭐지?’
의문을 띄우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커다란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콰앙, 쾅! 땅이 울리는 거로도 모자라 저 멀리, 숲 반대편에서 폭발 같은 불꽃이 번져 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세벨리아는 굉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디하트!”
하나, 둘, 셋……. 새카만 밤의 장막을 배경으로 수백 개의 창날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것은 점점 늘어나 그 수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때가 되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꽈르릉-!
온몸을 뒤흔드는 거센 충격에 세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멀리서부터 시작된 힘의 폭풍이 그녀를 향해 노도와 같이 달려들었다.
* * *
얼시크의 의원이 준 편지는 세벨리아의 추측대로 워츠에게 향하는 길을 알려 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마법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이건 다 거짓이야. 그러니, 아아악. 젠장!”
사람의 정신을 현혹시키고, 가장 끔찍한 절망을 드리우는 검은 숲. 스스로의 존재조차 인지할 수 없게 만드는 숲의 악몽으로부터 소유자를 보호하는 마법이었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여섯 번째 길에 발을 들인 디하트는 계속해서 그의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죽음에 절망했다. 그것은 어린 그가 버리고 도망친 가족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함께 숲에 발을 들인 기사들의 죽음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세벨리아의 반복되는 죽음이었다.
“아, 아아…….”
그의 정신은 뒤틀리다 못해 완전히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숲에 발을 들이기 직전, 여관에서부터 이미 무너질 기미가 보였던 그의 영혼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환각과 실제를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었다. 세벨리아의 장례식 이후 자의적으로 환각초를 복용한 이후, 그에게 그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환각인가 실제인가, 거짓인가 진실인가. 그가 바라는 건 사실 그 둘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살아 있는 세벨리아를 원했다. 용서를 빌고, 하다못해 자신을 증오해 줄 그녀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기대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아아…….”
꽈르릉!
수천 개의 벼락이 허공을 찢으며 내려와 떨어졌다. 일순간 어둠이 걷히고 차가운 현실이 그의 앞에 드러났다. 그림자에 가려진 수많은 세벨리아의 시체들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창에 찔려 죽은 세벨리아, 독약을 먹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세벨리아, 누군가에 의해 난도질당한 세벨리아.
그 순간, 디하트는 자신의 지독히도 어리석은 생각을 후회했다.
‘차라리 내 품에서 조용히 숨이 꺼져 가는 게 나을 거라고?’
그럴 리가. 그녀의 죽음에는 그 어떤 것도 ‘나은’ 게 없었다. 디하트는 발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러지 마, 제발. 내가 잘못했어. 이대로 떠날게. 다시는 당신을 찾지 않을게. 이게 당신이 주는 벌이라면 이만 끝내 줘. 제발…….”
그는 이제 이 모든 게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닿을 수 없는 첨탑 위, 아침을 알리는 종이 매여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 목에는 밧줄을 두르고, 발밑에는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둔 채로 세벨리아는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세벨리아, 제발 그만둬.”
울컥 핏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끔찍했다. 환영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 한다는 게, 가짜임을 알면서도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없다는 게 그저 절망스러웠다.
그 순간, 그녀의 두 손이 밧줄을 움켜쥐었다. 절망의 순간이 다시 그의 앞에 드리워졌다. 디하트의 눈이 다시금 새하얗게 물들었다. 새카만 하늘 위로 다시 수천 개의 벼락의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컥……!”
온몸의 핏줄이 터져 나가고, 핏물이 역류했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드디어 끝인가. 그래,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나아. 거짓일지라도 그녀와 함께 하는 게 나아. 그는 기뻐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디하트의 희망은 본디 꺾이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네.”
후우, 뜨거운 한숨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