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6)화(36/171)
차분한 정적이 공기를 물들였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이곳은 여섯 번째 길의 끝, 깎아지른 산속에 숨어 있는 조용한 연구소.
“드세요.”
바로 워츠의 집이었다.
“감사합니다.”
세벨리아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감싸 쥐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게 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간 그녀가 워츠에 대해 느낀 바는 하나였다.
워츠는 숨어 지내는 학자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현실에 그려 낸 듯한 사람이었다.
짙은 녹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무심한 눈의 남자. 그는 수수한 가운을 입은 채 세벨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때, 짐승의 억눌린 울부짖음 같은 것이 들렸다.
“……!”
세벨리아는 그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하루가 멀다 하고 집기를 박살 내는 검은 머리 짐승, 바로 디하트였다.
쾅,콰앙-!
오늘도 역시나 뭔가가 부서지고 터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뒤를 이었다.
“…….”
“…….”
세벨리아와 워츠는 서로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러나 사방을 휘저으며 울부짖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구원자가 등장했다.
“아, 미안. 요즘 진정제를 통 먹으려 들지 않아서.”
주방에서 나온 사람은 디하트와 비슷한 생김새의 남자였다.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 들고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나, 전체적인 생김새가 유사했다. 함께 두고 본다면 형제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세벨리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상대가 그녀를 보며 눈을 휘었다. 금잔화처럼 선명한 금안이었다.
“저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두 사람은 하던 거 계속해.”
갈색 머리의 남자, 클로드는 손을 흔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워츠와 세벨리아는 다시 거실에 단둘이 남겨졌다.
“…….”
세벨리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심각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어쩌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 * *
수천 개의 벼락이 내리치는 광경은 장엄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창날은 마치 신이 내리는 천벌처럼 느껴졌으니까.
콰앙-!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천벌을 내린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를 만큼 세벨리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어둠을 몰아내는 불꽃을 응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숲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죽어 가고 있을 터였다.
‘중심지는…….’
디하트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그의 주위로 벼락이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으니까.
콰아앙-!
이쯤 되면 벌하고자 하는 게 이 미로 같은 공간인지, 아니면 그 자신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세벨리아는 더 이상 밤하늘이라 부르기 힘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새하얗게 물들었어.”
제국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북해. 그곳에는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오로라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세벨리아는 오로라가 어떤 것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 위로 새하얀 빛줄기들이 얽힌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순간이 되면 가차 없이 땅 위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쿠르릉-!
‘이제 거의 다 왔어.’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귓속이 얼얼하고 눈이 시큰거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십 개의 벼락이 땅을 태웠다.
“윽…….”
그러나 세벨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머지않아 디하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새하얀 빛이 가시처럼 땅을 찔러 대는 가운데, 그는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회개하듯, 고해하듯. 그는 하얗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세벨리아, 제발.”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세벨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위로 일순간 습기가 차올랐다. 그러나 그건 정말 잠시였을 뿐이다. 곧 차갑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 울렁거리는 마음을 잠재웠다. 그건 과거라는 이름의 폭풍이었다.
“예전부터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았지.”
환영을 만들어 놓은 채 떠나면서도 은연중에 이렇게 될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들어준 적이 없으니까.
“……왜 이곳까지 온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쫓은 거야.”
세벨리아는 담담한 시선으로 무릎 꿇은 디하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쳤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비탄에 가득 찬 얼굴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눈은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을 헤매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러지 마, 세벨리아.”
“……!”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러지 마.”
고통에 비틀린 목소리가 황야를 울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내리치는 벼락이 그녀의 몸에 꽂힌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죽지 마……제발.”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게 아득하게 멀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몸이 무거워졌다. 세벨리아는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설마 내가 죽어 가는 장면을 보고 있는 거야?’
그것이 못내 괴로워 저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라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세벨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디하트는, 그녀의 남편은 결코 자신의 죽음에 괴로워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녀 앞에 무릎 꿇은 채 신음하고 있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죽음이라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벨리아, 안 돼……!”
꽈르릉-!
새하얀 벼락이 사방을 물들였다. 하얗게 터져 나가는 빛 속에서 세벨리아는 저택을 떠나며 버렸던 자신의 작고 우스운 소망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우스워 다시 품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 소원을.
‘내가 죽고 당신이 후회하기를.’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살아생전 단 한 번이라도 나로 인해 가슴 아파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를. 그리하여 내 존재를 그리워하면서, 내게 한 행동들을 후회하며 고통받기를.
“세상에.”
세벨리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감정에 휩쓸린 소망은 원망이 묻어 저주가 되었다. 그녀는 새카맣게 그을린 숲을, 이성을 잃은 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디하트를 돌아보며 숨을 삼켰다. 마치 자신의 소망이 지금의 끔찍한 현실을 불러온 것 같았다.
“나는…….”
그래, 그랬다. 자신이 죽고 난 뒤 그가 후회하기를 바랐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기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기를 바랐다. 그가 미워서, 원망스러워서, 자신이 떠난 뒤 기다렸다는 듯 행복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앞에서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어. 이런 건 원하지 않았다고.”
세벨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원한 건 자신이 받은 만큼의 상처를 돌려주는 것. 사랑하는 이로부터 영원히 버려지는 고통을 그 또한 겪기를 바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전제조건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뒤, 그가 고통받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사랑해야 해.’
“말도 안 돼.”
목소리는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당신이 도대체 왜.”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디하트 인버네스에게 세벨리아란 어디까지나 중앙 출신의 사생아, 그의 은혜를 배신한 주제도 모르는 여자여야 했다. 모순적인 감정이며 논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했다.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걸 알기에 소망한 거였어.’
당신이 결코 후회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런 미련 없이, 내 변명 따위는 필요 없다며 그렇게 날 버린 당신이었으니까.
‘그래서 날 향해 달려오는 당신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어….’
광장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세벨리아는 그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부정해야만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죽었다.
사제가 그녀의 장례를 집전하였으며 일가친척들이 모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무거운 관 위로는 꽃과 흙이 뿌려지고 마침내 세상은 그녀를 완전히 보내 주었다. 그녀는 죽었다. 죽은 자는 영원히 살아 돌아올 수 없다.
세벨리아 인버네스라는 사람에게 주어졌던 애정은 이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녀의 존재란 과거에서나 의미 있었던 것이므로.
‘이미 늦었어.’
우리는 이미 늦었어. 실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걸지도 모르지. 세벨리아는 여전히 악몽 속에서 헤매이는 디하트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나는……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세벨리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몸이 꼿꼿하게 섰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정한 현실이 그녀를 일깨웠다.
“그래, 나는 더 이상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아니지.”
나는 더 이상 그가 찾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과거에 휩쓸리지 마. 네가 버린 것에 얽매이지 마. 세벨리아 인버네스, 너는 죽었어. 네가 미워하고 사랑한 모든 것과 함께 땅속에 묻혔어. 그러니….
“그의 후회는 내 것이 아니야.”
세벨리아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저 멀리 두고 온 가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마 소견서에 걸린 마법이 악몽도 쫓아내 주는 거겠지. 나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니까.’
세벨리아는 가방과 디하트를 번갈아 보다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머뭇거리던 세벨리아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이 그녀의 손짓에 쉽사리 무너졌다.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디하트를 땅에 눕혔다.
그 순간, 갑작스레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벨리아는 놀라 어깨를 움칠하며 뒤를 돌았다. 이윽고 푸른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분명 불에 타 버렸던 숲이 재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쑥한 옷차림에 큰 키를 가진 사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등불을 손에 들고 부드럽게 웃는 남자의 눈이 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만…… 그분은 동행이신가요?”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얼굴은 디하트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