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7)화(37/171)
세벨리아는 그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금색 눈동자와 색이 짙은 머리카락. 깎아지른 콧날과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이 꼭 디하트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남자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아닌 고동색이었고, 디하트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유순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웃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츠 씨를 대신해 손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도와드려도 될까요?”
등불에서 흘러나온 빛이 세벨리아를 비췄다. 그녀는 그제야 주위가 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을 수놓던 하얀 벼락은 어느새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벨리아는 정신을 잃은 디하트를 내려다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릴게요.”
“그럼 잠시……. 이것 좀 들어주시겠어요?”
사내는 세벨리아에게 등불을 넘겨주고 디하트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멨다. 호리호리한 체격과는 달리 제법 힘이 있는 듯했다.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요?”
세벨리아가 등불을 들어 올리자 주황색 빛이 그들을 감쌌다. 남자가 감사를 표하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등불을 두 번 흔들면 빛이 나와 길을 알려 드릴 겁니다. 그리로 향하시면 됩니다.”
세벨리아가 그의 말대로 등불을 흔들자 뭉근하게 주변을 비추던 빛 위로 실타래 같은 선이 그려졌다. 소견서 봉투에서 흘러나온 것과 동일한 빛이었다.
“역시 이 빛이 워츠 씨가 계신 방향으로 인도하는 역할이었군요.”
세벨리아의 탄성에 남자의 유순한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네요. 저는 워츠와 함께 지내며 그의 연구를 돕는 카디라고 합니다.”
듣는 이를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기묘한 느낌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는 디하트를 마주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지?’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금빛 눈동자는 인버네스 가의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북부에는 금빛에 가까운 샛노란 눈동자들을 가진 이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벨리아는 자신을 다정한 눈으로 응시하는 카디를 바라보며 튀어나오려는 의문을 삼켰다.
‘이 남자 혹시 인버네스의 일원은 아닐까?’
방계라 한다면 핏줄이 이어져 있으니……, 이렇게까지 닮은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초면에 묻기에는 무례한 질문이었으며, 굳이 자신이 알 필요 없는 사정이었다. 세벨리아는 움트는 호기심을 다시 잠재우고 입을 열었다.
“벨라라고 불러 주세요.”
세벨리아라는 본명을 댈 수는 없었다. 그 이름은 자신이 버리고 떠난 이름이니까. 세벨리아는 씁쓸함을 감추며 발걸음을 옮겼다. 길잡이 빛이 어두운 숲속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불편한 적막 속에서 호흡을 나눴다.
그러다 문득, 카디가 입을 열었다.
“워츠를 찾는 이들은 보통 둘 중 하나더군요.”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에 세벨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카디는 빛을 따라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절박하거나, 오만하거나.”
“……절박하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후자는 어떤 이들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워츠는 희귀병과 불치병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분야의 선구 주자였다. 그러니 희귀병에 걸려 절박한 사람이 그를 찾아온다는 건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만한 사람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세벨리아의 의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죽음조차도 자신 앞에서는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어떻게 감히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냐며 성을 내는 이들이죠. 실은 절박함에 찾아오는 이들보다 오만함에 워츠를 찾는 이들이 더욱 많답니다.”
“그런…….”
“게다가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워츠를 의원이 아닌 하인으로 생각하죠. 내 인생을 다시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당연히 협조해야 하는, 자신에게 마땅히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하인.”
카디가 상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이 가엾은 청년이 당한 함정을 만들게 된 겁니다. 오만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가장 끔찍한 현실을 보여 주는 게 효과적이거든요.”
카디는 그렇게 말하며 보통 자신이 괴롭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거나, 혈육이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조금 고분고분해지더군요. 뭐,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
세벨리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래서 울며불며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구나. 그리고 디하트에게 가장 끔찍한 일이란 자신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것이었고….
‘이런, 그 생각은 그만하자.’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 카디의 옆얼굴을 훑었다. 이렇게 보자 그는 디하트와 별로 닮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먼저 설명해 주는 걸 보면 그와 달리 배려심이 깊기까지 했다.
세벨리아는 카디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는 디하트를 흘긋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비록 그는 워츠를 찾기 위해 이곳에 발을 들인 게 아니었지만 결국 그의 행동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조차도 자신 앞에서는 굴복해야 한다라.’
어떻게 보면 지금 디하트의 상황에도 들어맞는 말이었다. 광장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 세벨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자신을 보고도 그렇게 망설임 없이 달려올 수 있을까. 보통이라면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을 마주쳤을 때 분명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고, 심지어 혼란조차 일시에 내던졌다.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인 것마냥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기진 짐승처럼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땅을 박찼다.
세벨리아는 자연스레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의 섬찟함이란. 다시 떠올려도 정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일부러 가짜 시체를 만들어 장례식을 치른 보람이 없어.’
사람은 한 번 마음속에 묻고 사실로 확언한 것에 대해서 쉽사리 번복하지 못한다. 사람의 죽음 또한 그러했다. 기실 장례식이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떠난 사람을 완전히 과거에 묻고 살아 있는 이들에게 그의 죽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제례. 그게 장례식의 기능이자 역할이었다.
하지만 디하트는 직접 자신의 장례를 치렀음에도 내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세벨리아는 아직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기가 찼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컸길래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이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드높은 자존심, 꺾이지 않는 오만함. 북부를 이끄는 인버네스의 수장다운 냉철함. 한때는 그 수식어들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오만한 사내가 자신에게만은 조금씩 느슨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주제 파악하라는 내 말을 제대로 기억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그 사나운 성정이 자신을 향할 때가 되자, 세벨리아는 그가 얼마나 무섭고 냉혹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또 당신 가문을 위해 내게서 정보를 캐내러 온 건가요. 하긴,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나서서 날 찾을 이유가 없긴 하지.]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판단, 그의 식견, 그의 결정은 언제나 그 자신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래, 왜 잊고 있었을까. 그의 오만은 항상 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만 작동했다.
자신의 죽음 또한 그런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세벨리아는 점점 의혹이 확신이 되어 가는 걸 느꼈다.
“하.”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북풍처럼 차가운 숨결이었다.
“오만한 이들에게 그들이 외면하는 현실을 억지로 보여 주는 것보다 값진 경험은 없죠.”
고저없는 목소리는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디가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손님의 말이 맞습니다.”
길잡이 빛은 천천히 꼬리를 늘어트리며 그들을 안내했다. 가끔씩 디하트가 몸을 뒤틀었으나 카디의 손아귀 힘은 그를 저지할 만큼 억셌다.
“아, 저기 녹색 지붕이 보이시나요?”
카디의 손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던지자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삼 층짜리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숲속에 외따로 지어진 집치고는 멀끔한 데다 낡거나 삭아 보이는 곳도 없었다.
“손님이 오신 건 오랜만이라 대접이 미진할 수도 있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디가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희귀병 분야의 권위자가 은둔하는 연구소라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장작이 타오르는 거실과 여기저기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배치된 쿠션들. 의원의 집이라기보다는 손자들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상념은 산산조각났다.
“그럼 이 환자분은 위층에 묶어 두겠습니다.”
“……예?”
당황한 세벨리아의 표정을 어떻게 느낀 건지, 카디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숲을 미친 듯이 헤집어 놓은 걸 보니 여간 거친 성격인 모양인데. 제 앞에서는 어림도 없죠. 마침 이런 환자들을 위해 흑철로 프레임을 짠 침대를 준비해 놨거든요.”
“…….”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벨리아를 바라보며 카디가 깔끔한 마무리를 날렸다.
“꼼짝도 못 하게 묶어 놓을 테니 손님은 안심하시고 워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네.”
그렇게 카디는 디하트를 짐짝처럼 둘러메고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렇게 수 시간이 지나 세벨리아는 워츠와 대면할 수 있었고 디하트는 늦게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