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8)화(38/171)
디하트는 의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째서 자신이 멀쩡하게 눈을 뜬 건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의 끝에서 겨우 안식을 취하려는 찰나, 억지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가물거리는 시야 때문에 주변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렁 같은 악몽에서 그는 빠져나왔다. 반복되는 지옥으로부터 풀려난 것이다.
‘왜?’
그의 눈이 덧없이 깜빡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대로 끝인 줄 알았건만.’
디하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에게 주어진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러나 감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그리 쉽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 외부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것 외에는.
하지만 눈을 감으면 기다렸다는 듯 세벨리아의 모습이 그를 괴롭혔다. 창에 찔려 죽은 세벨리아, 독약을 먹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세벨리아, 누군가에 의해 난도질당한 세벨리아.
그리고 종탑 위에 서서 목을 매달던….
심장이 지끈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왜 다시 눈을 뜬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끝을 맞이했다면 좋았을 텐데. 악몽에 붙들린 것이어도 상관없었는데.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독처럼 고여 사방으로 흘렀다.
“아아….”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건 의지가 아닌 습관이었다. 기대와 희망이 배반당하는 건 그의 일상이었다. 디하트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키려 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윽.”
금빛 눈동자 위로 싸늘한 빛이 스쳤다. 그는 제 사지가 침대에 완전히 결박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이제 깨달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지?’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 사이로 진정제가 보였다. 보통 제 처지를 모르고 날뛰는 피심문자에게 놓는 약제였다.
‘이래서였군.’
어쩐지 몸이 무겁고 현실을 인식하는 게 느리다 했다.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려든 건가, 방 안을 차분하게 훑어보는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역시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는 함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을 벌여서 이득이 될 자가 누가 있는지를.]여섯 번째 길에 들어서기 전 일레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디하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를 무너트리고 싶어 하는 자들은 너무나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용의자라 상정해도 될 정도였다.
‘내 가족마저 내게 비수를 꽂았으니.’
고개를 떨군 디하트는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찌르고, 입을 가로막은 천 위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현실이 따갑게 그의 피부를 찔렀다. 이제 그녀의 죽음 속에서 헤맬 시간은 끝났다.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이 그를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죽었으며, 그의 손으로 직접 장례를 치렀고, 광장에서 마주친 그녀를 쫓은 끝에 다다른 건 함정이었다.
‘역시 당신은… 죽은 거겠지.’
그날 내가 본 당신의 평온한 얼굴이 마지막이었던 거야. 광장에서 만난 당신은 그저 내 정적이 만들어 낸 환영일 뿐인 거겠지.
디하트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신음했다.
‘그래, 내 기도가 하늘에 닿을 일은 없지.’
가족을 버리고 도망쳐 홀로 살아남은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한 아이. 저주받은 공작의 피를 가장 짙게 타고나 인정이라고는 없는 괴물. 그런 역겨운 자의 소원이 이루어질 리 없지.
‘당신이 사실은 살아 있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내게 베풀어질 리 없지.’
그녀가 죽었다는 현실을 스스로에게 억지로 납득시키며, 디하트는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견뎠다. 운명이 그에게 편안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버텨 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감히 세벨리아의 모습을 훔쳐 농락한 이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했다.
“……큿!”
디하트의 눈동자 위로 서리가 끼었다. 샛노란 눈동자 위로 하얀 안개가 퍼져 나갔다. 파직, 피부 위로 전류가 흐르듯 자그마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던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다.
‘설마.’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 쥔 손을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였다. 그에겐 지금 작은 벼락 하나 만들어 낼 힘도 없었다. 간신히 작은 번쩍임 정도는 만들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시도하려면 내장이 쥐어짜이는 정도는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는 수 없군.’
디하트는 상황이 제게 불리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피를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벨리아의 죽음을 이용한 이들을 잡아 죽여야 했다. 결정을 내린 디하트는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했다.
그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누군가 들어왔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로 보아 체격이 좋은 남자인 듯싶었다. 디하트는 평온하게 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그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생각한 건지 스스럼없이 침대로 다가왔다.
“이런.”
가느다란 한숨이 그의 귓가를 채웠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낯익어 디하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성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흉악한 남자로 큰 거니, 조카야.”
클로드 인버네스, 애칭인 카디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사내가 스프를 내려놓으며 그를 타박했다.
* * *
클로드 인버네스의 삶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출신은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으나, 그의 존재는 사랑받아 마땅했으니까.
[네 어머니가 너라는 선물을 주고 가서 나는 기쁘구나.]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사생아였으나, 2대 전 공작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늦둥이뿐이었다. 심지어 그 늦둥이는 말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뛰어남을 보였으니 얼마나 예뻤을까.
[너는 내 자식이야. 내가 태어나 배우고 자란 모든 것들을 너 또한 당연히 받아야 한다.]아버지는 다정했고, 첫째 형은 상냥했다. 둘째 형은 자신을 거북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저 자신을 질투한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천재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당연하게 가져온 아이는 쉽게 오만해졌다.
하늘을 찌르는 그 오만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도 모르고.
[안돼-!]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 날이었다. 공작의 자리에 오른 첫째 형의 가족과 함께 그는 마차를 타고 산을 지나고 있었다. 창문을 부술 듯 때리는 비에 디하트는 겁을 먹었고, 어린 로잘린은 형수의 품에 숨었다.
그리고 한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호위대는 전멸, 형수는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안 돼. 이럴 순 없어. 아니야……!]빗물이 후두둑 그의 몸을 때렸다. 꺼억, 꺽. 비명이 되지 못한 절규가 목구멍에 가로막혔다. 두 손이 벌벌 떨리고 무릎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클로드는 자신이 오만한 도련님 나부랭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오만과 자존심은 지금에 와서는 하등 쓸모없는 나약한 것이었다.
[허억……헉.]그 순간, 멀리서 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클로드를 일깨웠다. 누군가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님.]현 인버네스 공작이자 가주인 길런드 인버네스. 그의 형일 것이다. 클로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형수의 죽음은 묵과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죽음에 매몰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이들. 아이들을 찾아야 했다. 형님이 그들과 대적할 동안 아이들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디하트, 로잘린…….]그는 장대비처럼 퍼붓는 비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시신들을 뒤지고 다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 안도감이 그를 덮쳤다. 신이시여.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 꿇어 기도할 뻔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가느다란 부름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의 전율을 클로드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클로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채 그루터기 밑에 숨어 자신을 부르던 그 아이. 자신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억눌린 울음을 터트리던 디하트. 클로드는 그 작고 연약한 아이를 떠올리며 회한에 잠겼다.
“죽여 버릴 테다, 네 녀석…!”
그런 애는 어디 가고, 웬 흉포한 사내놈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걸까. 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라쉬는 분명 자신이 길런드를 배신했다고 그를 가르쳤을 테니까.
“하아.”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그의 발 옆으로 작은 빛줄기가 쾅 하고 떨어져 내렸다. 나무가 새카맣게 그을리며 탄내가 코를 찔렀다.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힘쓰지마,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네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건가? 하,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디하트는 클로드의 얼굴을 본 뒤로 계속 저 상태였다.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미친개마냥 그에게 달려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제 손으로 형제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작자가 조카라고 해치지 못할 리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길래 재갈을 풀어 줬는데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다. 클로드는 지친 듯한 얼굴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디하트는 그날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혀를 찬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디하트는 겨우 진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동을 부릴만한 힘이 다 떨어진 거겠지만.
“지금 네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은들 믿지 않겠지. 그러니 괜한 일에 힘을 빼지는 않겠다.”
“…….”
“다만 한 가지는 알아 둬. 난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널 붙잡고자 함정을 팔 정도로 여유롭지도 않고.”
사나운 금안이 그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다. 클로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벽에서 등을 떼었다. 자신도 한때는 저런 시절이 있었다. 가족을 죽이고 제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이들을 찾아내 죽이고자 뒷골목을 전전하던 때가.
하지만 분노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은 없다. 갈피를 잃은 증오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을 잡아먹을 뿐. 지금의 자신에게는 복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클로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내 손님의 뒤를 쫓다 멍청하게 걸려든 거 아니냐? 성질도 작작 부려라, 디하트.”
아가씨가 왜 겁먹었는지 알 만하군. 클로드가 차갑게 덧붙인 말에 디하트가 숨을 삼켰다. 이윽고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