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9)화(39/171)
삼촌과 조카가 살벌하고 따뜻한 재회를 만끽하는 동안, 세벨리아는 거실에 앉아 워츠를 기다렸다. 그녀는 세심한 손길로 꾸며진 소파와 쿠션들 사이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안도감에 모습을 숨겼던 긴장감이 그녀를 덮쳤다.
“이런…….”
세벨리아는 자신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느꼈다. 안전한 공간에 도착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억눌러 두었던 스트레스가 폭발하듯 나타났다. 그녀는 스스로가 굉장히 긴장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팔다리가 욱신거려.’
세벨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몸을 혹사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새삼 도망자의 삶이 얼마나 힘든 건지 느꼈다.
자신을 쫓아오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건, 저택에서 탈출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친 일이었다.
“후우…….”
세벨리아는 카디가 끓여 주고 간 찻잔을 손에 쥐고 떨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짧은 순간 몸을 혹사하였고, 그 반동을 겪고 있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디하트에 대한 생각은 떠올리지 않으려 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자신을 쫓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세벨리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 위층 어딘가에 흑철 침대에 묶인 그가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으리라.
하지만 그 사실은 이전처럼 세벨리아를 두렵게 만들지 못했다. 기사들을 데리고 여관을 포위해 자신을 잡아들이려는 디하트와 달리, 지금의 그는 무력하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돌아갈 거야.”
아니, 돌아갈 수밖에 없어. 워츠 씨가 그를 내보낼 테니까. 세벨리아는 확신에 찬 얼굴로 읊조렸다. 추측뿐이었지만 그녀의 확신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디하트는 그녀와 달리 정식으로 찾아온 손님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기력을 되찾는 대로 되돌려보내겠지.’
연구소까지 오며 카디에게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보건대 디하트는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워츠는 자신처럼 간절한 환자 외에는 되도록 사람을 받지 않는 주의라고 했으니까.
깎아지른 산맥에 연구소를 차리고 악몽을 보여 주는 결계를 친 데에서부터 이미 사람을 꺼려 하는 게 확연히 드러나긴 했었다. 그러니 디하트처럼 다른 이유로 결계에 발을 들인 이는 아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그래, 그렇게 원래대로 돌아가야지.’
그는 떠나게 될 것이다. 힐렌드 홀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외로운 저택으로. 신경에 거슬리는 사생아 부인 따위는 없는 그의 집으로.
생각이 정리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며 점차 떨림이 멎었다. 굳은 입매가 느슨해지고, 이제야 차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생겼다.
“후우…….”
쓸데없는 바람이었지만, 세벨리아는 떠나는 순간의 그가 자신처럼 홀연한 마음이었으면 했다. 무슨 이유에서 자신의 행적을 쫓고, 죽음을 부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길 바랐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이유 모를 그의 후회를 받아 주고, 그를 용서해 줄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야. 그러니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지.’
세벨리아는 쿠션에 몸을 깊숙하게 파묻으며 떨리는 눈꺼풀을 닫았다. 다정한 어둠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 * *
연구를 마치고 지하실에서 벗어난 워츠는 거실을 지나다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눈이 커다란 쿠션 사이에 파묻혀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잠이 든 세벨리아였다.
“…….”
무심한 검은 눈동자가 세벨리아를 기계적으로 훑었다. 그녀의 병약한 안색과 뼈가 드러난 손목, 눈꺼풀 아래의 떨림이 단숨에 수치화되어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환자로군.’
병색이 완연한 주제에 이곳까지 몸 성히 온 걸 보면 아마 몇 안 되는 제 친구로부터 안내를 받은 모양이고. 워츠는 빈약한 자신의 인간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때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클로드와 마주쳤다.
“아, 워츠. 오늘 일은 다 끝났어?”
“카디.”
워츠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가 세벨리아에게 닿았다. 설명하라는 눈짓에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제대로 된 설명은 못 들었어.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지쳤는지 잠들어 버렸네.”
“…….”
“그렇게 보지 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고.”
자신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힐끗 보고 주방으로 향하는 워츠를 따라가며 클로드가 항의했다.
“네가 연구실에 틀어박힌 사이 결계가 깨질 뻔했다는 건 알아?”
잼이 든 병을 꺼내던 워츠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클로드를 향했다. 클로드는 씨익 웃으며 워츠의 손에서 병을 뺏어 갔다.
“벼락이 미친 듯이 내리치더군. 환영을 넘어서 실제 숲까지 태워 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개입해야 했어.”
“네 말은 그러니까.”
“그래. 그 사람을 상대해야 해서 환자의 인적사항을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지.”
워츠가 깊어진 눈동자로 클로드를 응시했다. 클로드의 출신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의 말이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결계를 깰 정도의 벼락을 내린 자라…….’
자연현상을 제외하고, 벼락이라는 말은 제국에서 보통 한 가지를 의미한다. 금빛 눈동자로 전장을 주시하며 천벌을 내린다는 존재, 그로 인해 신의 노여움을 사 버린 공작.
저주받은 인버네스.
그리고 당대의 공작은 클로드의 조카였다. 워츠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괜찮은 건가?”
무덤덤한 목소리 저변에 묻어 있는 걱정을 알아차린 클로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워츠는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것처럼 생긴 주제에 의외로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물론 잔정도 많고.
‘그러니 나 같은 놈도 주워다 살려 주지.’
클로드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워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떠벌렸다.
“괜찮고말고. 애송이 공작 따위야 내 연륜에 비할 게 못 되지. 걔가 힐렌드 홀에서 애지중지 키워지는 동안 나는 밑바닥을 굴렀다고.”
“하지만 성질은 대단한 모양인데.”
실제 숲까지 태워 버릴 정도로 힘을 썼다는 말을 상기하며 워츠가 말했다.
“그 삼촌에 그 조카라는 건가.”
그러자 클로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는 들고 있던 병의 뚜껑을 보란 듯 힘주어 열고는 워츠에게 건넸다. 주방을 나가려는 그를 향해 워츠가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따로 온 건가?”
워츠가 세벨리아가 자고 있을 거실 쪽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클로드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어쩐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의 등에 워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아무래도 내 조카가 저 환자분을 쫓아온 것 같은 눈치인데…….”
“뭐?”
“그게 아니라면 걔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어. 내가 알고 있기로 불면증은 좀 심각한 것 같지만.”
워츠가 빵에 잼을 바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인을 쫓아 이곳까지 발걸음 한다는 게 평범한 일인가? 무언가 탐탁지 않았다.
“무슨 사이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건가?”
“일단은. 은근슬쩍 찔러보니까 입을 딱 다물던데. 나한테 저주를 퍼붓는 것도 멈췄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클로드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심각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어. 여기까지 함께 오는 걸 거부하지는 않았거든. 한 마디로 죽게 내버려 둘 정도로 나쁜 사이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흠.”
“그래도 정 탐탁지 않으면 환자분께 직접 물어보던가.”
세벨리아를 가리키는 말에 워츠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 처음 만난 환자에게 개인사를 캐물을 정도로 오지랖 넓고 수더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별수 없군.”
어차피 그 조카라는 자는 머지않아 연구소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워츠는 잼을 듬뿍 바른 빵조각을 먹으며 세벨리아가 무슨 병을 앓고 있을지나 추측해 보기로 했다.
* * *
얼마 동안 잠에 빠져 있었던 걸까. 조금씩 올라온 허기가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으음…….”
때마침 부드럽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세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녀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부엌 탁자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일어나셨군요.”
긴 녹색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늘어트린 사내가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세벨리아는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을 보고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 그게.”
불치병과 희귀병 분야의 혁신적인 선구자. 어쩌면 그녀의 병을 치료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래를 선물해 줄 사람, 바로 워츠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러니까.”
워츠와 마주한 세벨리아는 자신의 무례에 놀라 뺨을 붉혔다. 집주인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거실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잘 보여도 부족할 마당에 이런 첫 만남이라니. 세벨리아는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떨궜다. 후회와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요.”
“아, 감사해요. 저는 벨라라고 해요.”
“그래요, 벨라.”
워츠는 무심한 얼굴로 세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세벨리아는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세벨리아의 호흡이 평온해졌다. 워츠는 그녀를 다시 한번 천천히 훑어보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무슨 병이죠?”
직구로 들어오는 질문에 세벨리아는 숨을 삼켰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에 들어섰다는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었다.
리히스병이 맞을까, 아닐까.
난 살 수 있을까, 아닐까.
머지않아 답이 내려질 것이다. 눈앞의 남자가 그 삭막한 얼굴로 제 삶의 끝이 언제일지 알려 줄 것이다.
비록 그 답이 제가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곳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세벨리아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