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0)화(40/171)
세벨리아의 말을 듣고, 그녀가 가져온 소견서를 모두 읽은 워츠는 묵묵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작게 혼잣말했다.
“리히스병이라…… 그렇군요.”
워츠의 검은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세벨리아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가 워낙 깊어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병을 판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러나 곧 그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청진기를 보고 세벨리아는 자신의 한심한 생각을 날려 버렸다.
“눈 크게 뜨시고, 제가 방향을 말하면 그쪽을 바라보세요.”
“네…….”
워츠의 지시에 따라 검진을 받는 내내 세벨리아는 긴장 때문에 목 뒤가 뻣뻣했다. 그는 눈 외에도 입 안, 심장 소리 등등을 체크했다.
“좋아요. 이제 소견서를 읽고 함께 얘기해 보죠.”
세벨리아는 가방에서 소견서를 꺼내 워츠에게 건넸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얼시크의 의원이 쓴 소견서를 읽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는 세벨리아에게 이곳까지 오면서 몸 상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다른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았는지 물었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손발이 잘 움직이지 않고, 때때로 피를 토한다는 건 외에는….”
그녀의 말을 들은 워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벨리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확실히 리히스병이라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몇 개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만약 리히스병이었다면 지금쯤 환자분은 거동이 힘든 상태여야 합니다.”
세벨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워츠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멀쩡히 이곳까지 오셨죠. 그것만으로도 이미 증명이 된 셈입니다. 그러니 아마 루스의, 아, 루스는 소견서를 써 준 의원입니다. 그의 소견이 맞을 거예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살벌한 말을 산뜻하게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워츠는 완벽한 의원이었다. 세벨리아가 손을 맞잡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저는…….”
“예, 아마 리히스가 아닌 다른 병일 겁니다. 리히스와 혼동될 만큼 심각한 건 몇 개 없는데……. 흠. 이건 찾아보죠.”
머리가 아찔해졌다. 세벨리아는 숨을 삼키며 등받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다른 병일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은 얼시크의 의원에게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무게가 달랐다. 그녀의 병을 치료해 줄 유일한 사람에게서 들은 희망적인 말. 그건 가까스로 가라앉힌 마음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다.
‘세상에.’
세벨리아는 가늘게 숨을 내뱉으며 눈꺼풀을 떨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자신이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두 손은 기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정도로…….’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세벨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깊은 안도감에 숨겨 놓았던 속마음이 햇볕 아래에 드러났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세벨리아는 떨리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쪽에서부터 절절 끓는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삼키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이곳까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벨리아는 생각했다. 데니사는 제게 다른 곳으로 가라 말했으니 아마 그 말을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니사를 기다리며 전전긍긍 시간을 보냈겠지.’
그러다 가끔 얼시크의 의원이 한 말을 떠올리며 정말 치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아마 그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겠지. 아, 겁먹지 말고 의원의 말대로 서프레디에 가 볼걸. 어차피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적어도 용기 내 볼걸, 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용기를 내서 다행이야.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지 않고, 내 선택을 믿어서 다행이야.
세벨리아는 벅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뜨거워진 눈을 손바닥에 문질렀다. 자꾸만 뭔가가 치밀어 올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흠, 그러면…….”
워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당혹스러워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워낙 많이 보아 온 광경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소견서를 따로 정리한 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일단 피를 조금 뽑아 보고, 그걸로 마지막 확인을 거칩시다. 그동안은 처방해 드리는 약을 드세요. 방은 일 층에 마련되어 있는 곳을 쓰시고 혹시 모르니 최대한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지내시길 바랍니다.”
기계적인 멘트를 읊던 워츠가 마지막 말에 이르러 천장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를 간절한 눈으로 응시하던 세벨리아 또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굉음이 내리꽂혔다.
쾅!
* * *
하나, 둘, 셋…….
“소용없다니까 왜 자꾸 이러는 거냐.”
디하트는 한숨과 함께 문을 여는 클로드를 응시했다. 힘을 쥐어짜내 작은 불꽃을 터트린 뒤 클로드가 도착하기까지 이십여 초.
벽은 단단하지 않고, 소리는 멀리까지 울린다. 작정하고 만든 기지는 아닌 듯싶었다.
‘그리고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지. 적어도 2층 이상이로군.’
디하트가 머릿속으로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클로드는 골치 아픈 얼굴로 망가진 서랍을 들어다 옮겼다.
“이렇게 자랑하지 않아도 네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겠으니 작작 했으면 좋겠구나, 조카야. 이대로 힘이 쭉쭉 뽑혀서 산송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골이 난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어조였다. 디하트는 그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부모의 원수를 앞에 두고도 무력하게 붙잡혀 있어야 하는 처지가 무척 꼴사납고 열 받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지금은 정보를 얻는 게 더 중요해.’
처음부터 이렇게 침착하게 기회를 엿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의 정체를 알고 분노에 사로잡혀 날뛰었으니까. 그런 자신이 이성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클로드가 불현듯 입에 올린 ‘아가씨’라는 말.
[아가씨가 왜 겁먹었는지 알 만하군.]클로드는 분명 자신이 손님을 뒤쫓아와서 악몽에 사로잡혔고, 그 손님이 아가씨라는 듯 이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를 쫓아서 이곳까지 다다랐다. 그러니…….
‘내 추측이 맞다면 여기가 그녀의 목적지야.’
이곳이 바로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가 닿고자 했던 여섯 번째 길의 종착지일 가능성이 컸다. 빌어먹을 친족 살해범인 막내 삼촌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설마 클로드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건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클로드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거지? 설마 부모님의 사건에 그녀가…….’
디하트는 제 망상이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는 걸 알고서 꽉 다문 턱에 힘을 주었다. 이리저리 튀어 나가는 정신을 붙들어 놓아야 했다.
‘젠장.’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그는 초조하고 절박했다. 침착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심장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진짜 세벨리아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일레이의 말이 맞다면 그녀는 날 뒤흔들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야.’
문제는 그 가짜가 무엇 하러 이곳까지 자신을 끌고 왔냐는 것이다.
디하트는 까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정체든, 목적이든, 뭐든 알고 싶다면 일단 만나야 했다. 그런데 자신은 클로드에게 사로잡혀 이 꼴이었다.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방 안을 정리하던 클로드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디하트의 눈매가 단숨에 사나워졌다.
“기운차고 좋구나. 저녁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 괜히 더 힘 빼지 마라. 배고프다고 울어도 소용없으니까.”
“…….”
“입을 다무는 거로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도 좋고.”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디하트는 이를 갈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젠장.”
모든 게 불확실했고 엉망진창이었다. 하나의 혼란을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혼란이 그를 덮친 탓이었다. 그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았고, 악몽의 찌꺼기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눈꺼풀 안쪽에 채워진 어둠 속으로 세벨리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가 보고 싶어 하던 행복한 모습의 세벨리아였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모습은 점차 바뀌었다.
관 속에 누워 있던 평온한 얼굴의 세벨리아, 광장에서 자신을 보고 놀라 달아나던 그녀, 그리고 여관에서 뛰어내리던…….
“욱!”
그 순간, 속이 메슥거리고 골이 흔들렸다. 디하트는 단순한 편두통인 줄 알았다. 항상 자신을 괴롭히는 그 익숙한 고통. 그러나 아니었다.
곧 팔다리가 저릿하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낯선 고통에 디하트는 이를 꽉 물었다.
‘이게 무슨.’
“크윽……!”
발작처럼 퍼져 나간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금빛 눈동자가 새하얗게 변했다. 동시에 하얀 불꽃들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디하트!”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를 들고 온 클로드가 다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 * *
클로드가 지하연구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온 건 가히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워츠.”
단단한 부름에 워츠가 시약병을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그는 세벨리아에게서 뽑아낸 혈액으로 몇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앓고 있는 병으로 추정되는 리스트에서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지워 나가는 선별작업이었다.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보호 안경을 벗으며 워츠는 클로드를 위아래로 살폈다.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 내려온 듯 가슴이 가파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동요한 클로드라니. 이건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워츠는 그제야 상황을 조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벨라 양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나?”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으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처럼 입술을 여러 번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앞둔 것보다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워츠는 기다리는 데에는 꽤나 이골이 난 남자였다.
그는 조용히 클로드가 스스로의 혼란을 잠재우길 기다렸고, 마침내 바라던 바를 얻어 냈다.
“디하트가 이상해.”
그리 신나는 보상은 아니었지만.
워츠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이상하다는 건 제국 신민 모두가 알아.”
클로드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오해의 여지가 크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야. 단순한 탈진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었어. 내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
누적된 피로와 부족한 수면, 과다한 힘의 사용으로 인한 탈진 및 영양실조. 그게 디하트의 진단명이었다. 그런데 클로드는 지금 그보다 심각한 걸 발견한 듯한 태세였다.
“네가 한 번 봐 줘, 워츠.”
금빛 눈동자에 흔치 않은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골치 아파지겠군. 워츠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