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1)화(41/171)
여섯 번째 길 바깥, 그곳에도 워츠와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었다.
“하아…….”
그건 바로 언제나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던 일레이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먹구름이 드리워진 얼굴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기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제자리에 주저앉은 일레이가 땅을 내리쳤다. 퍽, 퍽. 애꿎은 땅을 다 헤집고 나서야 일레이는 손을 털었다. 엉망이 된 손등만큼 그의 입장도 엉망진창이었다.
“도합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공작 한 명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일레이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디하트를 따라 당당히 여섯 번째 길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높이 떠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어둠이 그를 덮쳤다.
‘그다음은 뭐…….’
일레이는 가라앉은 눈으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동료들을 흘끗 훑고는 고개를 떨궜다. 함정에 빠져 시간 낭비를 한 거로도 모자라 보필해야 할 상관을 놓치다니. 게다가 그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정말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디하트의 짐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지…….”
일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짐가방을 끌어안았다.
그 안에는, 데니사라는 하녀에게 당한 옆구리에 바르는 약과 디하트가 매시간 챙겨 먹는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이 들어 있었다. 개중에서 신경안정제는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비상용으로 매일 들고 다니시는 게 있긴 하지만…….’
만에 하나 약이 떨어진다면 디하트는 필시 고통에 시달리리라.
“다시 들어가야 하나.”
진지한 얼굴로 여섯 번째 길을 바라보며, 일레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경고라도 하듯, 라이언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네 선에서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바로 내게 연락해라. 네 독단으로 처리하지 말고. 알아들었지?]일레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일단 라이언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는 게 먼저겠지.
그는 믿음직한 사촌 형을 떠올리며 동료들을 하나둘씩 발로 차서 깨웠다. 고통에 찬 신음이 산등성이로 울려 퍼졌다.
* * *
한편,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들어간 세벨리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와…….”
딱히 화려하다거나, 사치스러운 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택의 거실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문과 마주한 커다란 창문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그 너머의 숲이 한눈에 보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창을 반쯤 가린 커튼을 완전히 걷어 내고 창문을 열었다.
“좋다.”
상쾌한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들뜬 마음에 달아올랐던 뺨이 시원한 바람에 조금씩 가라앉았다.
세벨리아는 멀리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체감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 고즈넉한 저택과 평화로운 정경. 힐렌드 홀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미래 한가운데.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
“꿈만 같아.”
세벨리아는 탄성을 터트리며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깊은 안도감과 함께 충만함이 몸속 가득 차올랐다.
리히스 병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가시고 난 뒤 그녀의 마음은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던 소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진짜 평범한 삶을 계획할 수 있어.”
육 개월 후에 끝날 인생을 위해 모든 걸 다급히 끌어안고, 경험하려 하지 않아도 돼. 가지고 있는 걸 내려놓지 않고, 마음껏 욕심내서 가져도 된다고. 그리고 데니사도…….
“데니사도 이제 날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돼.”
세벨리아는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이건 데니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그녀는 내내 자신이 데니사의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옛날에는 어린 마음에 괜히 그녀를 원망했었지.’
누구도 자신에게 손 내밀어 주지 않았던 시절. 데니사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온기를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세벨리아는 기뻤고, 너무나 행복했다. 그 온기를 잃기 전까지는.
[겨우 하녀 하나 때문에 버릇이 이렇게까지 나빠지다니,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구나.]사랑받는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사랑을 당연시하게 된다. 그래서 착각했다. 자신은 이제 사랑받는 아이이니, 아버지 또한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엘렉트라 수도원은 너 같은 아이들을 교화시키기에 최적의 장소지. 네가 깊이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면 다시 데리러 오마.]그렇게 버려졌다. 내쳐지고, 홀로 남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자신은 데니사가 주는 대가 없는 애정을 이미 맛보았고, 그녀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날이 지나가고… 그녀가 찾아왔다.
[아가씨…!]그 감격의 순간, 마치 먹구름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을 맞이하는 듯한 전율의 순간. 그러나 세벨리아는 흙먼지 묻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보며 죄책감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꼈다.
‘나 같은 애를 왜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모자라고, 불행하고, 쓸모없는 아이인데. 이 사람은 왜 내게 온 걸까. 왜 내게 신경을 써 주고, 내 곁을 지켜 주는 걸까.
[미안해…….]그 순간 세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고, 데니사는 어깨를 떨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데니사에게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걸 밖으로 내놓으면 데니사가 상처받으리란 걸 알기에 지금껏 털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세벨리아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웨든의 골칫덩이 사생아도 아니고, 인버네스의 배신자 공작부인도 아니었다.
자유가 된 그녀의 앞에는 이제 제약 없는 삶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베개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푹신한 솜뭉치가 그녀의 품을 가득 채웠다. 마치 데니사를 안고 있는 것처럼 안도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젠 내가 데니사를 행복하게 해 줄 차례야.”
이제껏 없던 힘이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 * *
똑똑.
“벨라 양, 일어나셨습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세벨리아는 어느새 날이 밝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저녁을 먹고 배가 불러 그대로 잠이 든 듯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연 그녀는 하룻밤 만에 초췌해진 워츠의 얼굴에 놀랐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벨리아를 보며 워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아뇨, 그게…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혹시 제 병이 무엇인지 알아보시느라 무리하신 건가요?”
세벨리아가 그의 눈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제 눈가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워츠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간밤에 일이 있어서.”
그렇게 운을 뗀 워츠는 머뭇거리는 듯싶더니만 느닷없이 세벨리아를 향해 직설적으로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함께 온 남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곧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워츠는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나 싶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환자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협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걸 전제로 두고 여쭙겠습니다. 남자분에게 지병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뇨…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지병이라니, 그런 말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가끔 잠을 설치는 것 같았지만 가슴을 토닥이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면 곧잘 잠이 들었다. 그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전혀 몰랐어요. 상태가 많이 심각한가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좋지는 않습니다. 꽤 오래 앓은 것 같아요. 뭔지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된 처방을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괜히 이것저것 투약했다가 부작용이라도 나타나면…….”
아마도 클로드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워츠는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돌연 세벨리아와 시선을 마주하며 어쩐지 간곡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다면 그가 이곳에 더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워츠는 진심이었다. 세벨리아 또한 그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믿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벨리아는 갈등했으나, 이내 결정을 내렸다.
“저는 괜찮아요.”
이건 디하트만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디하트의 뒤늦은 후회가 자신의 것이 아니듯, 그를 꺼리는 마음 또한 이제 자신의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세벨리아 인버네스를 죽이고 벨라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디하트 또한 똑똑히 마주해야 했고.
‘내가 과거를 부정하고 그를 계속 밀어낸다면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을 거야.’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그 간단하고 절대적인 명제를 그는 결코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 * *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클로드와 워츠, 세벨리아는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워츠는 예정대로 세벨리아의 병력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혹시 부모나 친척 중 비슷한 질환을 앓은 사람이 있습니까?”
워츠가 내민 약봉지를 받으며 세벨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건강하시고…. 형제자매 중 아픈 것도 저 하나뿐일 거예요. 친척은 모르겠네요.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어머니가 빠져 있는 답변에 워츠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가 보군.
많은 환자를 보아 온 워츠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가정사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혀를 찼다.
‘안타깝군. 어머니 쪽에서부터 물려받은 것 같은데. 만약 일찍 알았다면 발병하자마자 치료할 수도 있었을 거야.’
뭐, 이제라도 자신에게 왔으니 상관없지만. 워츠는 세벨리아가 약을 먹는 것까지 확인하고 다시 연구실로 내려갔다.
환자가 두 명이 되었으니, 일도 두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