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3)화(43/171)
세벨리아의 말을 들은 클로드는 고맙다고 외친 뒤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방향을 보건대 악몽의 숲으로 다시 향하는 것 같았다.
‘분명 그곳에 놓고 온 게 있을 거야.’
세벨리아는 숲에서 보았던 디하트를 떠올렸다. 그는 광장에서와 달리 소박한 차림새였다. 풀어헤친 셔츠와 바지, 그리고 구두.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세벨리아는 분명 디하트가 어딘가에 외투를 벗어 놓거나, 짐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힐렌드 홀 밖에서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차림새를 고집하곤 했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아는 디하트라면 결코 그런 꼴로 누군가를 뒤쫓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가 뒤쫓는 게 나였다는 점이네.”
세벨리아가 손에 턱을 괴며 가늘게 눈을 떴다. 만약 클로드가 무사히 디하트의 물건을 찾고, 그곳에서 약이 발견된다면 치료는 순탄하게 진행되리라.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어.”
세벨리아는 워츠가 준 약을 손에서 굴리며 고개를 올렸다. 위층 어딘가에 그가 머물고 있을 터였다.
‘워츠는 바란다면 그를 만나지 않게 생활영역을 분리해 주겠다고 했지.’
세벨리아는 괜찮다고 했으나 그는 굳이 한 번 더 찾아와 물어봤다. 아마도 디하트가 자신을 쫓아 숲에 발을 들였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세벨리아는 두 번째에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거절했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고마워하며 수락했겠지. 하지만….’
[오만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가장 끔찍한 현실을 보여 주는 게 효과적이거든요.]정신을 잃은 디하트를 데리고 연구소로 오는 길에 클로드가 했던 말. 그 말이 그녀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세벨리아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당신도, 나도 현실을 대면해야 해.’
더 이상 도망만 칠 수는 없어. 당신은 내가 죽었다는 현실에서 도망쳤고, 나는 당신이라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광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도망쳐서는 안 되었는데.
“이제라도 확실히 해야지. 나는 이제 벨라야. 벨라로서 살고, 그 이름으로 평생토록 불리며 살아갈 사람이야. 그리고 그렇게 끊어 내고 나면…….”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미래였다. 그래, 미래.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약이 어느새 체온에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달칵.
찬장에서 꺼낸 유리잔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언제나 창백했던 과거와 달리 제법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푸른 눈에는 희미한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될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세벨리아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녀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맺혔다.
몸을 갉아먹는 병과 제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가족이 없는 지금. 자신은 그리도 원하는 자유와 제약 없는 미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편하게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얼시크를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는데.’
병을 치료하고 나면 데니사와 함께 가 보지 못한 곳을 가고, 해 보지 못한 경험들을 하리라 꿈꿨었다. 하지만 막상 치료가 시작되고 건강이 좋아지자 세벨리아는 점차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계절마다 갈아입을 옷, 편히 쉴 수 있는 집, 하루 세 번 먹을 음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구하는 데 필요한 돈.
워츠에게 치료비를 지불하고 나면 지참금을 판 돈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세벨리아는 약을 삼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을 끝낸 워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걸리려나.”
한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그녀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 * *
똑…. 똑….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디하트는 무심결에 성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발작이 멈춰 있었다.
“언제…크윽! 컥!”
무심코 입을 연 그는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신 적이 없었다. 디하트는 고통에 흐려진 눈으로 협탁을 찾았고, 물잔을 움켜쥐었다.
“하아…….”
갈증이 해소되자 드디어 제가 하고 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팔뚝에 꽂혀 있는 가느다란 관으로부터 불투명한 무언가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게 빌어먹을 고통을 끝내 준 약인 듯싶었다. 하, 한숨을 내쉰 디하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칠게 내뱉었다.
“그만 훔쳐보고 좋은 말할 때 나와.”
“흠흠.”
문틈으로 그를 지켜보던 클로드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어딘가 뿌듯하고 뻐기는 듯한 태도로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 목숨을 구하셨다 이거지. 그를 바라보는 디하트의 눈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하…!”
하지만 그는 섣불리 화내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게 옳은 말이었으리라. 그리 선명하지는 않지만… 발작에 시달리며, 그는 어렴풋이 과거를 기억해 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어두컴컴한 산맥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클로드의 얼굴을.
‘빌어먹을.’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팔짱을 끼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저 짜증 나는 삼촌 놈의 그 멍청한 얼굴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을 한 주제에 감히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다니.
디하트는 속이 끓어올랐다.
* * *
그날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비명과 떨리는 호흡, 몸을 내리치는 빗줄기, 점점 식어 가는 누군가의 체온. 그게 일곱 살 디하트가 간직한 참상의 전부였다.
“으으…….”
그날도 디하트는 침대 속에 웅크리고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귓속에서 자꾸만 누군가 속삭였다. 너는 기억해 내야 한다고, 떠올려야 한다고.
[디하트, 똑똑히 기억해. 내가 소리치면 열까지 셌다가 저쪽으로 가서…….]“몰라,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가족을 잃은 일곱 살짜리 아이의 곁으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꽈릉-!
“도련님!”
사람들이 달려와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디하트의 발작은 지속되었다. 결국 그는 가까스로 다가온 주치의가 가져온 진정제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나…. 기억을…….”
정신을 잃으면서도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가 자꾸 내게 기억하라고 하는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너무 무서웠다. 그 목소리만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나고 심장이 쿵쾅거려 숨쉬기가 힘들었다.
잊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러면 아픈걸. 기억한다고 약속했잖아. 무엇을?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며 부딪혔다. 분명 잊고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되찾으려면 다시 고통 속으로 손을 뻗어야 했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죽어가는 끔찍한 날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게 무섭고 두려워 디하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무의식 속에 각인된 약속과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쉬지 않고 충돌했다.
[불쌍한 것, 그래서 그런 사생아는 거둬 키우는 게 아니었는데. 이게 다 그 녀석 탓이란다, 디하트. 클로드 인버네스, 그 저주받을 종자의 짓이야.]그런 자신을 라쉬는 동정했다.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며 모두 잊으라 속삭였다. 굳이 기억해 낼 필요 없는 일이라고, 오히려 네게 독만 되는 거라며 달콤한 말을 잔뜩 불어넣었다.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하마, 아가. 그러니 너는 편히 쉬고 아무것도 하지 말렴. 세상에는 그렇게 잊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야.]아니, 잊어야 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아물지 못한 상처를 그대로 덮어 두고 외면하는 건 미련하다 못해 스스로를 좀먹는 짓이었다.
디하트는 뒤늦게, 너무나도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발작을 일으키는 자신을 내리누르며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눈을 한 막내 삼촌을 보고 나서야 그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디하트, 똑똑히 기억해. 내가 소리치면 열까지 셌다가 저쪽으로 가서…….]비좁은 나무둥치 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던 그때. 클로드는 마치 신처럼 나타나 그를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로잘린과 함께 반대편으로 뛰어. 도중에 어떤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면 안 돼. 나를 찾아서도 안 되고. 알았지?] [싫어, 삼촌. 같이 가자. 나는…….] [삼촌이 아빠 데리고 갈게. 약속할게. 그러니까 로잘린하고 사이좋게 기다리고 있어.]억지로 미소 짓는 그의 얼굴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디하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클로드는 울고 있었다.
[잊지마, 디하트. 열까지 센 후에 반대편으로 뛰는 거야.]그는 아마도 일곱 살 된 조카를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없는 제 처지에 절망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희망이 남았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떻게 내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이제는 훌쩍 커 버린 사내가 되어, 디하트가 클로드에게 물었다.
“나는 여태껏 당신이 우리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믿고 있었는데 말이야.”
디하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
그린 듯 미소 짓고 있던 클로드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 * *
“카디?”
워츠와의 상담을 마친 세벨리아는 층계참을 구르듯 뛰어 내려오는 클로드와 마주쳤다.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괜찮아요?”
“아, 벨라. 여기 있었군요”
“일단 쉬어요. 손끝이 파랗게 질렸어요.”
세벨리아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자 클로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길 반복했다.
“후우…….”
항상 여유만만하고 능글맞던 클로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세벨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 위에는 분명….
‘디하트가 있었지.’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층계참 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