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4)화(44/171)
세벨리아는 클로드를 그의 방으로 데려간 뒤 거실로 나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를 위해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타 주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주방에서 나오던 워츠가 그녀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억지로 하품을 참는 모습이 꽤나 졸려 보였다.
“벨라 양, 산책을 나가신 줄 알았는데요.”
“그러려고 했는데… 위층에서 내려온 카디 씨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방으로 모셔다드리고 왔어요.”
“음…….”
세벨리아의 말을 들은 워츠가 턱을 쓰다듬으며 계단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세벨리아는 그도 자신처럼 디하트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세벨리아에게 건넸다.
“하는 수 없군요. 이건 클로드, 그러니까 카디에게 가져다주세요.”
“네. 워츠 씨는 환자분을 보러 올라가시는 건가요?”
“담당자가 사라졌으니 제가 돌봐야죠.”
어깨를 으쓱인 워츠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세벨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클로드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클로드가 원래 이름이었구나. 그럼 카디는… 애칭이겠네.’
피곤해서 그런지 워츠는 평소 하지 않던 말실수를 했다. 그 덕에 세벨리아는 카디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이름으로 쓰기에는 너무 귀여운 어감이지.’
고동색 머리에 금빛 눈동자, 디하트 못지않은 체격을 가진 클로드는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그래서 세벨리아는 내심 그의 이름과 모습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클로드 쪽이 더 잘 어울려.’
그런데 왜 굳이 애칭인 카디를 알려 줬을까. 나라면 클로드라는 이름을 알려 주고 발랄한 애칭을 숨겼을 텐데. 세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는 의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의 출신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알려 주지도 않은 디하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던 클로드의 태도, 지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냐며 매달려 오던 그 절박함. 어느 모로 보나 디하트와 가까운 사이라는 건 확실했다.
게다가 그의 외모는 디하트와 견주어 보았을 때 닮은 점이 꽤나 많았고, 무엇보다 투명한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계속해서 외면해 왔지만… 이쯤 되니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힘들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디하트의 인척이라. 알아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이대로 계속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 내게 더 도움이 되는 길일까. 고민 하나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게 바로 바람 잘 날 없는 삶이라는 건가. 세벨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곧 문 안쪽에서 다 죽어가는 클로드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그래요, 환자분. 원하는 게 뭡니까.”
문을 열며 나타난 워츠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놈의 조카와 삼촌이라는 놈들은 한 시도 쉴 새 없이 다투기만 했다.
‘대충 해독은 끝냈으니 이대로 쫓아내 버릴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약을 계속 처먹어 온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일주일만 제대로 먹이고 운동시킨다면 바로 연구소 밖으로 내쫓아 버려도 큰 무리는 없을 터였다.
‘그러면 이 집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그렇지 않아도 클로드가 새벽에 남몰래 훌쩍거리다 오는 것도 거슬렸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슬슬 내쫓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워츠는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으며 디하트를 응시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그의 갈색 눈이 디하트를 보자마자 찌푸려졌다.
그는 닫힌 창문 너머 새로 피어난 꽃송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잠깐 내가 당신한테 무슨 약을 처방했는지 살펴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의원들은 너 미쳤냐는 소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그것참 색다르고 좋군.”
“그 입은 여전하군요. 다행입니다. 말투까지 고와졌으면 당장에 정신 감정이 필요했을 테니까.”
담담하던 디하트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변했다. 진심이냐며 물어 오는 디하트의 눈빛에 워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독 과정에서 뭔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 그래. 말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디하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내려앉았다. 크게 한숨을 쉰 그가 이어 워츠를 향해 말했다.
“내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이 필요해.”
“그 녀석이 놀라 달아날 만하군요. 마치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
워츠가 혀를 차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지막 발작 이후 다시 만난 디하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금이 간 유리처럼 아슬아슬하고 자기 파괴적인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고, 그 자리를 당당한 북부 공작이 차지했다.
“쯧.”
저게 바로 그 인버네스 공작이란 건가. 어쩐지, 클로드가 사색이 되어 뛰어 내려올 만하군. 워츠는 이제라도 그에게 안정제를 투약하고 밖으로 내다 버려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기력과 이성을 되찾은 디하트는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무리겠지.’
하는 수 없군. 워츠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디하트의 눈이 진지한 빛을 띠었다.
* * *
“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
세벨리아가 침대 위에 걸터앉은 클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클로드는 그녀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푸스스 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았네요, 고마워요.”
“제가 받은 도움이 더 많은걸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럼, 푹 쉬세요”
빈 찻잔을 정리하며 세벨리아가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클로드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세벨리아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드 씨?”
“벨라 양,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제 이름은 어떻게?”
“워츠 씨가 알려 주셨어요.”
“아, 그렇군요. 그가 알려 줄 수도 있죠. 그래요, 아, 계속 말을 이어 보자면 음…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낮게 깔린 음성이 사뭇 진지했다. 세벨리아는 트레이를 움켜쥐고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세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주먹을 쥐었다 피더니 망설이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디하트가… 당신을 쫓아온 게 맞습니까?”
지금까지 내내 확인하기를 미뤄 두었던 사실이었다. 클로드는 디하트를 빨리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묻지 않았고, 세벨리아는 그가 묻지 않았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기억을 되찾은 디하트는… 그에게 당당하게 이곳에 머물겠다 요구했다.
[거의 이십 년 넘게 헤어져 있다 겨우 만난 가족이잖아. 함께 있고 싶어.] [너…….] [삼촌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일부러 과거의 일을 들추면서 아픈 곳을 찔러 대는 디하트라니. 자신을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며 삼촌이라 부르는 조카라니. 그가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클로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겁하게도 도망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디하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들어주고 말 것 같아서.
그렇게 다급히 계단을 구르듯 내려온 클로드는 상냥한 벨라와 마주쳤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더욱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디하트가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가 그녀잖아.’
물론 벨라와 디하트의 반응과 행적들을 보이는 대로 짜 맞춰 얻어 낸 추측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자신이 정말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되찾은 디하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 남게 해 달라 떼를 쓸 것이고…….
“혹시 디하트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한 겁니까? 부디 기탄없이 말해 줘요.”
제 추측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여인은 그로부터 쫓기는 피해자인 게 분명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클로드의 간절한 말을 들은 세벨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반응에 클로드의 얼굴은 새까맣게 죽었다.
* * *
“그러니까… 내가 복용해 왔던 약이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십이 년 전부터 아무도 처방하지 않는 조합이라 이거지.”
디하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웃었다. 워츠의 말에 따르면 그가 복용해 온 약은 중독성이 강해 금단증상을 불러일으키며, 장기간 복용했을 시 발작 같은 부작용까지 초래한다고 했다.
“내가 약을 먹기 시작한 게 햇수로 십오 년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전 주치의 탓을 안 할 수가 없군.”
디하트가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토록 오래, 잘못된 처방을 고집해 왔다는 건 의심할 수밖에 없어.”
몇 년 전 은퇴한 힐렌드 홀의 주치의 로덴, 그는 디하트가 열넷이 되던 해부터 특별히 조제한 약이라며 시중의 약보다 훨씬 강도가 센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디하트는 마침 그때 끔찍한 편두통과 악몽에 시달리던 참이었기에 별 의심 없이 그의 약을 받아 왔다. 효과가 좋기도 했고, 할아버지 대부터 일한 믿음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그가 은퇴한 후 림스 후작에게 거취를 의탁한 지금까지도 로덴은 그에게 약을 보내왔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십오 년이었다.
“학계의 최신 동향에 어두운 이라면 한발 늦을 수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래, 당신 말대로야. 그 오랜 시간 동안 약의 부작용을 몰랐다? 말도 안 되지.”
워츠가 담담하게 디하트의 말에 동의했다.
“고의로 부작용이 큰 약의 처방을 지속해 왔을 가능성이 커.”
“숙부 부부에 이어 이제는 전 주치의라.”
디하트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얼굴을 감쌌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이를 꽉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것만 같았다.
‘정말 지독하군.’
마치 한순간 눈을 뜨니 자신이 사실은 연극 속 인물이었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날 둘러싼 세계가 실은 모두 거짓으로 꾸며 낸 연극이었고, 나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배역에 지나지 않았다는 끔찍한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건 세벨리아가 죽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힐렌드 홀이 감추고 있던 추악한 비밀이 하나씩 그 베일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이고…….
“아아.”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리며 디하트가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졸던 워츠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디하트가 그린 듯 미소 지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이 빌어먹을 사슬 좀 풀어 주겠어?”
삼촌은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도망가 버렸거든. 덧붙이는 말이 퍽 상냥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