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5)화(45/171)
달빛이 산등성이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적막한 밤, 불이 꺼진 저택 안에서 세벨리아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하트가… 당신을 쫓아온 게 맞습니까?]그때, 세벨리아는 다급히 자신을 붙잡은 클로드의 얼굴을 마주하고 침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절박하게 응시하는 클로드의 얼굴에서 그가 바라는 답을 읽어내 버렸다.
디하트가 자신을 쫓아온 게 아니길 바라는 그의 마음을 말이다.
“그렇게 쉽게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아끼는 사이라.”
세벨리아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결국 자신은 클로드에게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클로드, 그는 디하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괴로워한 남자니까.
그에게 섣불리 제가 가진 패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편을 들기 마련이다. 애정이 이성을 무디게 만들고, 편견이 눈을 멀게 만든다. 자식이 그 어떤 흉악한 짓을 저질러도 감싸는 부모처럼, 사실을 알게 된 클로드는 자신을 배척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러니 당장은 아무것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제는 디하트의 존재였다.
“하아…. 도대체 클로드와 무슨 사이인 거야.”
클로드가 제발 속사정 좀 알려 달라며 매달리는 걸 보아하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는 그런 사이만 아니길.”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세벨리아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아침이었다. 일찌감치 일어난 세벨리아는 세안을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먼저 앉아 있는 워츠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칠 뻔했다.
“벨라 양?”
“아, 아니에요. 벌레가 날아들어서…….”
세벨리아는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을 들고 나타났다. 세벨리아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조심스레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조, 좋은… 크흠! 흠. 좋은 아침이에요, 벨라.”
어쩐지 조금 허술해진 것 같은 클로드와 인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늘 그렇듯 후식은 없었고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이 각자의 몫으로 나왔다.
“나는 먼저 일어나 볼게.”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건 클로드였다. 그는 거실 협탁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쏜살같이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남은 두 사람은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세벨리아의 찻잔이 거의 다 비워질 때쯤, 워츠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벨라 양의 치료에 있어 소홀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차를 거의 다 마신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세벨리아는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라 차를 엎지를 뻔했다. 그녀가 당황스러워하자 워츠가 담담하게 말했다.
“위층에 있는 또 다른 환자의 상태가 워낙 위중해, 그에게 집중하느라 벨라 양의 병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했어요. 여러모로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만… 어찌 되었든 제 잘못입니다.”
“사과하시지 않아도 돼요. 워츠 씨가 지금 처방해 주신 약으로도 충분히 나아지고 있으니까요. 보세요, 아침인데도 이렇게 잘 움직이잖아요.”
세벨리아가 보란 듯이 손을 펼쳤다 오므리길 반복했다. 그녀는 워츠가 웃음기 띈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나서야 제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래도 위층 환자의 상태가 제법 호전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벨라 양의 치료에만 집중할 계획입니다. 이번 주 내로 확실하게 알아보고 그에 맞는 치료계획을 다시 짜도록 하죠.”
워츠가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잠시 아래를 향한 채 움직이지 않더니, 세벨리아를 응시했다.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쩐지 어제저녁 클로드와 있었던 일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워츠는 디하트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클로드와 달리 그는 디하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짧은 고민을 마친 세벨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러크우드의 피가 섞이신 분이 안 계십니까?”
“…예?”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 * *
러크우드는 서리숲을 끼고 제국과 마주하고 있는 폐쇄국가였다. 왕가를 포함한 일곱 개의 가문이 균형을 유지하며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방인의 출입을 거부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디든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죠. 시대가 달라지면서 러크우드 출신들이 제국에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워츠가 러크우드와 관련된 책을 하나 뽑아서 건네주었다.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책등에 씌워진 가죽의 색이 선명했다.
“아직 국내에 러크우드와 관련된 정보는 많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들의 풍토, 습관, 체질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제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 순간, 세벨리아는 어쩐지 워츠가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세벨리아가 책장을 넘기자 워츠가 말을 이었다.
“제 전문분야는 희귀병이고, 그런 병들은 대부분 특정한 조건 하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자료 중에… 러크우드의 것이 있었습니다.”
워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분한 어조와 진지한 눈빛은 그가 본론에 다다랐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책장을 덮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앓고 있는 병이 러크우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판단하신 거군요.”
세벨리아의 말에 워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가시나무병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러크우드 출신이신 분이 없는지 물어본 겁니다.”
“그렇군요…….”
세벨리아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두 손을 마주 잡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어떤 병인지 알게 된 건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그 병의 역사를 알게 된 건… 기뻐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게 러크우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이 피를 물려준 건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그녀는 웨든 후작가의 가계도를 외우고 있었으니까. 유서 깊은 웨든 후작가의 가계도는 모두 한가락 하는 가문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을 뿐, 어디에도 출신 없는 이방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를 제국인이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셨어.’
그 이방인, 그 마녀, 악마 같은 년. 세벨리아는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매도하며 흘린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병을 고치러 왔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되다니. 정말 인생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던 걸까.’
러크우드는 최근에서야 타국에 문호를 개방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였다. 갇혀 자란 중앙에서의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북부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 바로 러크우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가 그곳 사람이라니. 세벨리아는 솔직히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들은 것마냥 정신이 멍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춘기 시절에도 꾹꾹 눌러 두었던 야속한 마음이 무차별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쩌다가 제국까지 오게 되신 걸까. 그리고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고…….
‘나를 버리고 가셨을까.’
자연스레 떠오른 질문은 날카롭게 그녀의 심장을 할퀴었다. 기쁨에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어느새 창백해졌다. 세벨리아는 심호흡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사이, 워츠는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갑자기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런.”
세벨리아가 아직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워츠가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세요?”
“한 가지를 더 물어본다는 게, 러크우드 이야기를 하느라 잊고 있었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질문이라면 귀찮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셔도 좋아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질문을 하는 본인도 슬슬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가 찌푸려진 미간을 하고 물었다.
“벨라 양. 정말 그와 마주쳐도 괜찮은 겁니까?”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워츠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이제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더 이상 침대에만 누워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지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
“디하트 인버네스와 마주쳐도 괜찮은 겁니까?”
* * *
클로드는 열댓 살처럼 구는 디하트 앞에서 살아생전 두 번째로 무력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낀 날은… 뭐, 떠올리기에 좋지 않은 기억이니 차치하고.
그는 야채를 먹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자꾸만 고개를 팩하니 돌리는 디하트의 앞을 가로막고 다시 물었다.
“아래층 환자분과 무슨 사이인지 얘기해 봐.”
“…….”
디하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벨라 때문에 구속구를 풀어 달라는 게 확실한데,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양쪽이 아주 다 난리군.’
세벨리아는 쫓기는 처지 같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뭐가 억울해서 묵비권을 행사한단 말인가? 클로드는 덩치만 커졌지 속은 일곱 살 그대로인 디하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디하트가 그 비싸고 무거운 입술을 달싹였다.
“확인이 필요해.”
“뭐?”
“그녀가 내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그전까지는 대답해 줄 수 없어. 자칫하면 당신까지 말려들 테니까.”
“꼭 그녀가 수상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클로드가 미묘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디하트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니 한발 물러서 있어. 이건 그녀와 내가 풀어야 할 문제야.”
과연 그녀는 가짜일까, 진짜일까.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한 함정일까, 그게 아니라면……. 디하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만나야 했다. 만나서 그녀가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한 함정인지 탐색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내 계획에 협조할 게 아니라면 더 이상 들들 볶지 마.”
느릿하게 말하는 태도가 꽤나 냉정했다.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열쇠 꾸러미를 든 워츠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