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7)화(47/171)
다시 시간은 두 사람이 재회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먼저 식당에 와 있었던 세벨리아는 디하트를 기다리며 의지를 되새겼다. 그를 마주쳐도 놀라지 말자. 과거처럼 그의 앞에 무조건 고개 숙이지 말고, 약자처럼 행동하지도 말자.
‘나는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아니야.’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그녀는 죽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를 두 번이나 배신한 데다 도망친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세벨리아는 심호흡했다. 층계참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격만큼 단호하고 거침없는 발걸음 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밤을 새우며 수많은 상황을 가정해 보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숙지한 뒤였다.
‘화를 내면 무시하고, 윽박지르면 워츠씨에게 도움을 구하자. 울며 매달린다면…….’
그가 과연 그럴까? 세벨리아는 회의감에 젖었다. 그러나 상념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식당과 거실을 구분하는 주렴이 차르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벨리아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그곳에 있었다. 병마에 시달려 한껏 창백해진 얼굴로 금빛 눈동자를 순전하게 빛내는 디하트가. 그리고 세벨리아는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을 움켜쥐었다.
‘진정해.’
그녀는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디하트가 갑자기 그녀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
얇은 유리창처럼 아슬아슬한 침묵. 그리고 디하트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세벨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 안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자, 이제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할까. 내게서 무엇을 원할까. 구두 속에 감춰진 발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머리는 예측해 둔 모든 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의 패를 모두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하트라고 합니다.”
‘뭐?’
순간적으로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세벨리아는 무례를 잊고 그를 놀란 눈으로 빤히 응시했다. 내밀어진 손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순박하고 정겨웠다.
‘이게 무슨 농담이지?’
경주마처럼 뛰던 심장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빠르게 돌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당황스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일단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디하트?”
그러자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그의 얼굴을 수놓았다. 세벨리아는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미소에 감탄할 뻔했다. 그러나 곧이어 현실이 그녀를 일깨웠다.
“혹시 저를 알고 계신 분이신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최근에 기억을 잃어서…….”
디하트는 자신이 기억상실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기억이 휘발된 것 같다며 우울하게 시선을 떨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길래 스스로 기억을 지웠는지…. 솔직히 두렵네요.”
지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얼음처럼 굳었다. 악몽의 숲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을 아침으로 만들 것처럼 하늘을 하얗게 수놓던 수천 개의 벼락. 그리고 환상 속을 헤매며 죽어가던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푸른 눈이 수면 아래로 침잠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혼란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디하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어찌 되었든 잘 부탁드립니다.”
세벨리아의 금빛 속눈썹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디하트를 마주 보았다. 자신의 순수성과 솔직함을 증명하는 듯한 웃음. 그건 과거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이었다.
‘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머릿속을 뿌옇게 채우고 있던 안개 같은 혼란이 일시에 걷혔다. 눈앞의 그는 자신을 경멸하고 밀쳐 내던 디하트가 아니었다.
기억이 없는 디하트, 과거와의 접점이 없는 남자. 자신을 세벨리아라고 부르지 않는 완벽한 타인. 본 적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낯선 미소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내. 그렇다면.
‘이게 거짓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세벨리아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디하트가 알았다면 대경실색할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세벨리아는 그가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내는 거라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게 진짜라면 적당히 그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인버네스의 가주가 실종된다는 건 큰 혼란을 야기할 테니까. 진짜라면 자신의 치료가 끝나는 대로 그에게 적당한 편지를 남기고 연구소를 떠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벨라로서 대할 거야.’
당신이 무슨 속셈이든지 말이야.
세벨리아는 무심코 미소 지었다. 그러자 디하트의 손이 순간적으로 움찔 흔들렸다. 그러나 생각에 빠져 있던 세벨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담담히 자신 안의 혼란을 정리했다.
‘그래, 중요한 건 그의 상태가 아니라 나야.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해. 과거에 발목 잡혀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니 당신이 날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든,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든 상관없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가 정한 길을 걸어 나가면 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무력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두 번이나 그를 따돌린 자신의 환영들을 떠올리며 상냥하게 웃음 지었다. 여차하면 다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놓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세벨리아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걸 느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는 벨라라고 부르세요, 디하트 씨.”
이렇게 서로를 속고 속이며, 경계하고 의심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 * *
어깨 위로 경쾌하게 흔들리는 짧은 갈색 머리. 두려움이나 죄책감 없이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디하트는 제 손 위로 내려앉는 자그마한 손을 감싸 쥐며 생경한 감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
‘예상보다 더 교활하군.’
그는 자신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워츠의 시선을 무시하며 세벨리아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두어 번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손을 빼냈다.
“앉으세요.”
“…예.”
자리에 앉은 디하트는 클로드가 건네주는 식사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당황한 것처럼 보였는데.’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이름을 밝히며 인사한 순간, 디하트는 그녀의 푸른 눈이 당혹감에 크게 뜨이는 걸 목격했다. 그래서 내심 자신이 그녀의 계획을 간파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떠나간 반쪽을 그리워하며 미쳐 가는 권력자에게 그와 닮은 인물을 보여 주고, 그를 이용해 무너트리는 건 아주 고전적인 수법. 디하트는 상대가 제게 그것과 같은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고, 이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역사 속의 멍청한 폭군들이나 당하던 수법이지.’
난봉꾼인 주제에 유일했던 사랑을 몰라보고 상대가 떠나간 뒤에 후회하는 머저리들. 폭군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똑같이 생긴 상대를 구해 와 내밀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으셨으나, 기억을 모두 잃으셨습니다.]그리고 폭군들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가짜를 가까이 두었다가 뒤통수를 맞아 죽게 된다.
‘그런 하찮은 수작질에 내가 당할 줄 알고.’
그래서 디하트는 그녀가 기억상실이라 주장하기 전에 아예 자기가 먼저 기억을 잃어버리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 말을 들은 세벨리아는 몹시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가짜고, 이게 함정이라면…….’
분명 자신의 죄책감을 이용해 제 정신을 완전히 무너트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무엇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질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벨리아의 죽음.
디하트는 환상이나 악몽이 아닌, 실제 세벨리아의 죽음을 한 번 더 겪으면 자신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적들도 아마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사실 적뿐만이 아니라 온 제국이 알고 있는 수준이겠지만.’
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으며 나이프를 들었다. 세벨리아가 죽은 뒤 그가 벌인 만행들은 신문을 통해 제국 곳곳으로 흩뿌려졌다. 특히 중앙의 귀족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기행을 벌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세벨리아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이 있을 거라며 직접 중앙까지 들쑤시고 다녔으니까.
‘다른 수작질은 상관없어. 하지만… 감히 세벨리아를 건드리다니. 정신머리가 나가다 못해 죽여 달라고 제 손으로 빌고 있군.’
자신을 직접 욕하고 조롱하거나, 저주받은 가문이라며 모욕하는 건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만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디하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며 심호흡했다.
“…괜찮은 거야?”
“네.”
클로드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어 주며 디하트는 베이컨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가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를 가만히 두는 이유는 하나였다. 감히 그녀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기만한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서.
그 순간,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함께 세벨리아가 그와 눈을 맞췄다.
“빵을 좀 더 드릴까요?”
그제야 디하트는 자신이 세벨리아 쪽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숨을 삼키며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두 손을 말아쥐었다.
‘제길.’
아니야, 아닐 거라고. 디하트는 자꾸만 불쑥 고개를 드는 희망을 두 손으로 가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얄팍한 기대를 품은 희망은 빛나는 눈동자를 감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진짜 세벨리아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끊임없이 무시하고 억지로 외면하던 의혹이 가슴 속을 꿰뚫고 올라왔다. 디하트는 세벨리아가 건네는 빵을 받으며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자꾸만 머저리 같은 폭군들처럼 생각하려는 자신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처음 광장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는 그저 기뻤다. 그녀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울부짖고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올리고만 싶었다. 자신을 증오하든, 미워하든 살아만 있다면 괜찮다며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건 지독히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만 생각하고, 그 전은 전혀 고려해 보지도 않은 멍청한 판단이었다.
만약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가 진짜라면… 그녀는 살아서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말이었으니까. 가짜 시체를 그의 곁에 버려두고, 자신이 고통과 후회에 울부짖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말이니까.
[이미 아가씨는 공작님께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보내신 상태였습니다.]데니사의 담담한 말이 떠올랐다. 수십 개의 창날이 가슴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