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8)화(48/171)
그렇게 두 사람은 제각기 가면을 뒤집어쓰고 연극을 시작했다. 세벨리아는 그가 기억상실이든 아니든 벨라로서 행동하고자 다짐했고, 디하트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청년 행세를 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연극의 이점이 발휘된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결코 먼저 가면을 벗어던지지 않는 출연자들. 그들은 서로를 출연자가 아닌 무대 위의 사람으로서 받아들였다.
“베이컨 좀 더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보네요.”
이제 이 자리에 있는 건 이름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디하트라는 청년과 병을 치료하고 새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벨라라는 여인이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벨라.”
“별말씀을요.”
덕분에 식사 시간은 무탈하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기치 않은 복병이 숨어 있는 법이었다.
“다들 식사 끝난 거 맞죠?”
오늘따라 어딘가 붕 떠 보이는 클로드가 후식을 들고 왔다. 여태껏 식사하면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후식에 세벨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에 한 번 구워 봤습니다. 자, 어때요. 장관이죠?”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머핀 위로 따끈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저마다 맛이 다른 걸까. 어떤 건 잘 익은 밀처럼 노랬고 어떤 건 초콜릿처럼 검었다. 세벨리아는 워츠가 따라 준 찻잔을 감싸 쥐고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먼저 골라요.”
“네?”
“초콜릿 칩이 들어간 것도 있고, 블루베리가 들어간 것도 있어요. 원하는 거로 먹어요.”
세벨리아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상황은 조금 낯설었다. 그녀는 어느샌가 세 명의 남자가 모두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음…….”
“초콜릿 칩이 들어간 거로 줄까요?”
클로드가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채고 접시 위에 머핀 하나를 놓아 주었다. 세벨리아는 작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따끈따끈한 머핀을 포크로 무너트리자 촉촉한 속살이 드러났다.
“어때요, 맛있겠죠?”
“정말 그러네요.”
세벨리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것을 주저 없이 먼저 고를 수 있다는 건 특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특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힐렌드 홀에서 공작부인으로 생활했던 때조차 그녀는 타인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행동했으니까.
‘아버지가 보낸 보석상인이나 원단장인에게 물건을 살 때도 그랬지.’
공작부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 흠이 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피고, 다른 사람들이 의사표시를 하면 따라서 동의했다.
그 와중에 디하트에게 선물할 목걸이를 샀던 건, 정말 없는 용기를 모두 끌어모은 행동이었다. 다행히도 그에게 선물할 물건이었기에 힐렌드 홀 사람들도 별말 없이 넘어갔었고.
“디하트 씨는 여기 남은 걸 드시면 되겠네요.”
세벨리아가 조심스럽게 포크로 머핀을 쿡쿡 찌르는 동안 클로드가 디하트에게 머핀 하나를 건네주었다. 세벨리아에게 주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성의 없는 태도였다. 디하트는 세벨리아 몰래 피식 웃으며 블루베리가 들어간 머핀을 한 입 삼켰다.
“윽.”
디하트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디하트가 머핀을 입에 가져가던 벨라의 행동을 막으며 말했다.
“잠깐 드시지 마세요. 머핀에서 비린내가 나네요.”
“뭐? 그럴 리가 없는데.”
클로드가 놀라 자신의 것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디하트와 똑같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윽…….”
“혹시 오븐에서 생선 구웠어요?”
디하트가 입 안에 남은 잔여물을 겨우 삼키고 물었다. 그 순간 조용히 머핀을 제자리에 되돌려놓던 워츠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벽에 잠깐 호수에서 낚아 온 것들을 몇 개 구웠지.”
“뭐?”
“배가 고파서.”
범인은 오븐에 배인 생선 냄새였다. 클로드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그걸 여태껏 말하지 않은 워츠에게는 더욱 짜증이 났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워츠가 담담한 얼굴로 다시 머핀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사이, 디하트는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윽…….”
“괜찮아?”
“아, 네.”
디하트가 클로드의 걱정에 상냥한 얼굴을 꾸며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는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 낼 것 같았지만 세벨리아가 보고 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순수하고 구김살 없는 청년처럼 식은땀을 닦으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몰랐는데. 제가 비위가 좋지 못한가 보네요.”
그 순간이었다. 덜컹! 의자가 흔들리고, 세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 남자는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벨리아가 얼굴을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도 비린내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아서. 죄송해요.”
그러더니 잰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가 모습을 감췄다. 자리에 남아 있는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그녀가 사라진 문을 응시했다.
* * *
[내가 비위가 좋지 못해서.]코끝을 찌르는 음식 냄새, 울려 퍼지는 목소리. 차가운 눈빛과 접시를 긁어내리는 날카로운 칼끝. 세벨리아는 한순간 자신이 힐렌드 홀에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허억…….”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위가 좋지 못하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식당이라는 공간과 디하트의 존재, 그의 말. 삼박자가 모두 어우러지며 곪은 상처를 터트렸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신음했다.
‘바보같이.’
끊어 내야 하는데. 이제 그 상처는 내 것이 아닌데. 세벨리아는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아. 나는 더 이상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아니니까 그런 일로 상처받지 않아.
“나는 괜찮아.”
한참 뒤 베개 아래에서 빠져나온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담담하고 온유하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세벨리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수백 번 있을 수 있어.”
그때마다 이렇게 바보같이 굴 거야? 세벨리아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벨라.”
세벨리아가 자신의 새 이름을 되뇌이며 거울로 손을 뻗었다.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가 바람에 일렁이는 수면처럼 물결쳤다.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과거의 상처는 더 이상 널 괴롭게 하지 못해.”
그러니 일어나자.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야지. 그녀는 그린 듯 미소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디하트와 마주쳤다.
* * *
세벨리아가 식당을 빠져나간 뒤, 디하트는 상냥한 낯을 집어던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금안을 본 클로드는 워츠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디하트는 한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비린내 나는 머핀은 더 이상 그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지 못했다.
‘뭐지?’
디하트의 입술이 꾹 맞물렸다. 내리뜬 눈꺼풀 아래, 그림자 속에 감춰진 금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 넘어서, 그녀의 행동이 무슨 의도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디하트는 식사 후, 자연스럽게 그녀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눠 볼 요량이었다. 가능하면 신뢰를 얻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호감을 쌓기 위해서.
‘그런데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
디하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세벨리아의 돌발행동은 그의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그는 벽에 걸린 뒤집개를 노려보며 그녀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려 애썼다. 그리고 한 가지 의심할 만한 이유를 찾아냈다.
‘설마 내가 기억상실이란 걸 배후에게 보고하기 위해?’
세벨리아가 알았다면 기가 찰만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짜 세벨리아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디하트는 평생 주변을 의심하고 사람들을 불신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런 그에게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가 가짜라는 생각은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한마디로 본래의 사고방식에 걸맞은 편리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세벨리아라면…….
‘그만, 그만 생각하자.’
디하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억지로 고통을 유발하는 결론을 생각하려 애쓰지 않았다. 아직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지 않은가. 그는 당장의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의 디하트는 그 결론이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을 가로막는 주렴을 손으로 헤치고 거실을 가로질러 세벨리아의 방이 있다는 일 층 복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디하트는 그녀를 기다렸다. 딱히 뭔가를 캐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음흉한 속내를 까발려 주지. 덤으로 네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말이야.’
가당찮은 포부와 함께 그는 복도에 등을 기댔다. 그로부터 수 분이 지나, 디하트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달칵.
잠금쇠가 풀리며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틈 사이로 따뜻한 빛이 퍼져 나왔다.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빛 사이로 빠져나와 자신이 있는 그림자 진 복도로 나오는 세벨리아의 모습을.
“젠장…….”
그리고 그는 나지막한 욕설을 삼켰다. 등 뒤에서 비추는 강렬한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평소보다 반짝이게 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눈부신 햇빛에 감춰져 마치 금발처럼 보였다. 디하트는 신음을 삼켰다.
‘세벨리아.’
당장에라도 그렇게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싶은 걸 참으며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는 무슨 생각인 건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속은 괜찮은, 아니. 괜찮아요?”
젠장! 평소처럼 말하려다 뒤늦게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말을 바꿨으나 이미 늦었다. 졸지에 어수룩한 청년처럼 말을 절어 버린 디하트의 목덜미가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해 죽겠는데,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