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4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49)화(49/171)
한편, 정신 나간 주인과 달리 제법 성실한 데다 능력까지 있는 부관 라이언은 차근차근 힐렌드 홀을 정리해 나가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었다.
‘드와이어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건가.’
그는 처리하기가 무섭게 쌓이는 서류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저 중의 하나라도 드와이어에게서 왔다면 기분이 좋겠건만, 현실은 절반 이상이 림스 후작과 관련된 업무였다.
쯧, 그는 혀를 차며 펜을 들었다.
‘연락이 닿으면 바로 후작의 기를 꺾을 계획을 시작할 수 있는데 말이지.’
라이언이 오매불망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림스 후작은 기세 좋게 날뛰며 힐렌드 홀을 휘저었다.
바로 지금처럼.
“비키거라, 감히 누가 내 앞을 막느냐!”
두 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었을 게 분명한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라이언은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림스 후작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거침없이 집무실을 가로지른 그가 책상 앞에 당도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레온 경, 나와 급히 할 이야기가 있는 거로 알고 있네만.”
무시하는 건 림스였다. 라이언은 일부러 제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림스 후작에게 말려들지 않고 묵묵히 펜을 움직였다. 그렇게 무언의 대치가 지속되고, 다급히 달려온 집사가 라이언에게 다 죽어가는 얼굴로 애걸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하아.”
하는 수 없지. 계속 뻗대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자신은 그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게 가능이라도 하지, 다른 하인들은 그의 행패를 죄다 받아 줘야만 할 테니까.
“급한 업무라 도중에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결국 라이언은 펜을 내려놓고 림스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림스 후작은 콧방귀만 뀌었다. 라이언이 주인인 것마냥 앉아서 자신을 맞이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봤자 뭘 어쩌겠는가. 공작님께서는 엄연히 나를 대리인으로 두고 가셨는데.’
라이언은 일부러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앉으십시오, 후작님.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입에 발린 말은 되었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야. 플로라에게 주어지던 품위 유지비를 다시 본래대로 되돌리고, 이번 연회에 사용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하게.”
지팡이 위에 손을 얹은 림스가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라이언의 두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다 흘끗 다른 곳을 보았다가 다시 림스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이언은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거절에 림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내 명을 거부하는 건가?”
“후작님의 부탁을 거절하는 거겠지요. 더불어 제가 공작님께 받은 권력을 옳은 방향으로 쓰고 있는 것이고요.”
라이언은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뒤로 웃음 짓는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강직하게만 보였던 눈매가 휘어지는 걸 림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플로라 아가씨께서는 어디까지나 방계이십니다. 그동안은 그분의 아버님이신 라쉬 경이 공작님께 베푸신 헌신과 그분의 입지를 고려하여 직계 대우를 해 드렸던 것뿐.”
딱딱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라이언은 깍지 낀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같은 이유로 연회에 대한 비용 또한 힐렌드 홀이 지불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연회를 원하십니까? 좋습니다. 장소는 빌려드릴 수 있지요. 하지만 그 값을 치르는 건 플로라 아가씨 본인이어야 할 겁니다.”
“뭐, 이…!”
한 치의 막힘 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온 완벽한 논리 앞에 림스는 콧김을 뿜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이 그를 지나치며 그에게만 들릴 크기로 속삭였다.
“그리 아끼시는 조카분이라면 직접 연회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주시지요, 후작님.”
사실 플로라가 주최한다는 건 눈속임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연회의 진짜 주인은 림스였다. 귀족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같잖은 수작. 라이언은 그걸 간파하고 돈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너 이놈…….”
“그럼 저는 이만.”
라이언은 공손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끄응… 그 빌어먹을 임명장만 없었어도!”
쾅, 쾅! 지팡이 끝이 바닥을 내려찍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드디어 한 방 먹였군. 라이언은 체증이 내려가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었다. 그리고 개 중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바로 그의 상관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공작님.’
그가 고달픈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 * *
신기하게도 디하트는 그 시각,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갈색 머리 세벨리아, 그러니까 자칭 ‘벨라’와 통성명을 한 날로부터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디하트는 그녀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맴돌며 감시를 지속했다. 혹시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하면 바로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벨라는 지극히 평화롭고, 어떻게 보면 정말 한가롭기 그지없는 생활을 할 뿐이었다.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가거나 책을 읽고.
‘별장에 놀러 온 것마냥 굴고 있군.’
그가 지켜본 이틀 동안 세벨리아는 그것 외에 하는 게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디하트는 이 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정신 차리자. 저 뻔뻔한 얼굴이 연기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녀는 분명 광장에서 자신과 마주친 적이 있음에도 처음 보는 사람인 척 제 손을 맞잡았다. 그래, 한평생을 같이 산 사람의 속내도 모르는 게 바로 사람이었다. 그는 그렌과 라쉬의 경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지금 같은 경우에는.
“아, 디하트 씨. 잠시 뒤로 세 걸음만 가 주실래요?”
“이렇게 말입니까?”
“네. 거기에 가만히 서 계세요. 힘드시다면 저기 바위 위로 올라가서 쉬시고요.”
평소와 달리 갑자기 바구니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따라 나온 게 문제였다. 뭔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게 틀림없다며 재빨리 따라 나왔는데, 정작 그녀는 근처 숲에서 웬 이상한 들풀만 캐고 있었다.
“역시 검은 손톱풀이 맞네요. 그림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나 봐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낮은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디하트가 다리를 접으며 서 있던 자리에 앉았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같아졌다.
“그런데 왜 당신이 직접 나와 약초를 캐는 겁니까. 이런 일은 의원인 워츠 씨나 조수인 클로드의 일일 텐데요.”
약초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 내던 세벨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부탁한 일이예요. 아직 별다른 직업을 가진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워츠 씨가 도와주기로 하셨죠.”
“약초꾼이라도 되실 생각입니까?”
어째선지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디하트는 급히 손사래를 치고 다시 상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약초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산에 오르는 일은 위험하니까요.”
“…알아요. 곡해해서 듣지 않았으니 염려 마세요. 약초꾼이 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뭐든 전문 지식이 있으면 살아가는 데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할까 걱정하던 세벨리아가 워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그가 제시해 준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연구소에 있는 동안 저를 도와주시면서 약초에 대해 배우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문 지식은 어디서든 귀하지요. 이곳을 떠난 뒤 약제상 등에 취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그래서 세벨리아는 틈틈이 워츠를 도와 그에게 필요한 약재들을 채취해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왜 클로드가 이 일을 맡지 않나 궁금했으나, 곧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자리를 자주 비우던데. 도대체 어디를 그렇게 오가는 거지?’
클로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싫어하는 워츠를 대신해 생필품을 사 오고 우편국에서 편지를 받아 오는 조수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뜬금없이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흐음…….”
세벨리아는 검은 손톱풀을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비춰든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그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디하트는 숨죽여 그 장면을 감상했다. 마치 명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숭고하고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어깨에 겨우 닿는 귀여운 단발머리,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는 장밋빛 입술과 두 뺨이라니. 마치 요정 같은 세벨리아의 모습에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그 순간의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홀려서는 안 된다며 매일 밤 스스로를 다그치던 디하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일은 그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갑자기 눈을 뜬 세벨리아가 호수처럼 영롱한 두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헉…!”
순간적으로 제 생각을 들킨 건가 싶었던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
다행히도 완전히 넘어지기 전에 손으로 땅을 짚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러나 방심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목덜미부터 시작해 온몸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올라간 체온에 내뱉는 숨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디하트는 거울을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말이다.
“크흠, 흠.”
그가 겨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자세를 바로 했을 때, 세벨리아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어여쁜 얼굴에는 미약한 죄책감이 깃들었다.
“죄송해요. 디하트 씨의 발치에 바람꽃이 있는 걸 봐서 무심코…….”
“아, 아닙니다. 제가 칠칠치 못하게 넘어진걸요.”
디하트는 이를 꽉 물고 부끄러움을 털어 내기 위해 심호흡했다. 난 정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러려고 따라온 게 아닌데. 깊은 자괴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