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0)화(50/171)
아무래도 기억상실이 맞는 것 같다. 세벨리아는 강아지처럼 제 뒤를 졸졸 쫓아오는 디하트를 흘끗 보았다가 바구니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디하트가 눈꼬리를 접으며 해맑게 웃어 보였기 때문이다.
‘으윽.’
세벨리아는 바구니를 꼭 껴안고 고개를 돌렸다. 빨리 돌아가야지. 걸음을 재촉하자 뒤따라 오는 발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마치 말 잘 듣는 늑대에게 쫓기는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가름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천천히 가요, 벨라. 그러다 넘어져요.”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게 연기라면, 제국은 엄청난 배우 한 명을 놓친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 * *
남자는 살가웠다. 숨이 막힐 정도로 곰살갑고 자꾸만 달라붙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세벨리아는 그가 연기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했던 말을 철회했다.
‘이러다 위경련이라도 올 것 같아.’
기억을 잃었다는 디하트와 통성명을 한 지 오늘로 닷새. 그녀는 어딜 가던 자신에게 따라붙는 시선에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힐렌드 홀에서처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게 낫다고 무심코 생각할 뻔했으니까.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환자한테 험한 말을 할 수도 없고.’
세벨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까지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았다. 매번 거실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디하트가 은근슬쩍 같이 거실로 나오는 게 거슬려 오늘은 정원으로 나온 참이었다.
무슨 음흉한 목적이 있다거나, 해코지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밀어내기라도 할 텐데. 그는 단 한 번도 제게 함부로 손을 대려 한 적도 없었고, 이상한 낌새도 내보인 적 없었다.
그저 알에서 갓 깨어난 아기 새처럼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참견할 뿐.
‘그럴 때마다 자꾸 이상한 충동이 든단 말이야.’
어째선지 디하트를 볼 때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세벨리아는 매번 놀라고 말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디하트와 눈이 마주쳤다.
“헉…!”
“좋은 아침이에요, 벨라. 그 책은 뭐예요?”
무어라 항변할 틈도 없었다. 디하트는 손에 턱을 받치고 사르르 웃으며 금빛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는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음에도 당당했다.
“집중한 것 같아서 말도 못 걸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장소 선정이 특이하네요. 평소에는 거실에서 책을 읽었잖아요.”
쏟아지는 말에 세벨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책을 덮었다. 그녀의 미간에 작은 골이 파였다.
‘정말 기억상실이 맞는 것 같네.’
제가 알고 있던 디하트는 저렇게 능글맞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날카롭고 예민했다. 사람들을 믿지 않고, 항상 주변을 의심하는 비틀린 성격의 남자.
‘하물며 아내인 나조차 단 한 번도 그의 마음에 들어간 적이 없는걸.’
한때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착각이었다. 세벨리아는 배신의 날, 그가 제게 속삭인 말을 통해 그 통렬한 사실을 깨달았다.
[들켰다고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고. 사람이 살면서 실수 한 번 할 수 있는 법이잖아.] [하지만… 주제 파악하라는 내 말을 제대로 기억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며 눈물을 닦아 주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거친 손으로 뺨을 쓸어 주고선 나를 완전히 밀어낸 그는 정말로 사라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슬퍼서라기보다는 하필 사라진 뒤에 나타난 성격이 저 모양이라서였다.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이제라도 기억을 찾는 걸 도와줘야 하나?’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삼 년간의 결혼생활은 제게도 상처였지만, 그에게도 좋은 기억이 아니었을 테니까.
* * *
한편, 디하트는 오늘도 가짜 세벨리아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열심히 일레이를 따라 하는 중이었다. 그는 창틀에 기대어 세벨리아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원에서 읽으면 더 집중이 잘 돼요?”
“집중력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냥, 기분의 문제죠.”
“흐음…기분의 문제라. 그럼 저도 정원에서 한번 책을 읽어 봐야겠어요.”
“네?”
“알잖아요, 지금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기억하는 게 없으니 새로운 경험이라도 많이 쌓아놔야 하지 않겠어요.”
디하트가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세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당혹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도 놓치지 않을 거라고. 디하트는 클로드의 책장에서 아무거나 한 권을 집어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거실이 아닌 정원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흠. 깊은 침음을 흘린 디하트가 빠르게 층계참을 내려갔다. 요사이 자꾸만 저택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도는 게 퍽 수상했다. 아마도 자신이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배후에게 알리려고 시도하는 듯했다.
“후우…….”
정원으로 가는 곁문을 열기 전, 디하트는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표정을 관리했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그 빌어먹을 일레이처럼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도록.
“됐어.”
디하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벨리아가 보였다. 그는 그녀를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디하트 씨.”
아침 햇살을 받아 잔잔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거친 숨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침착하자,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역사 속의 멍청한 폭군들을 생각해 보라고. 간신들이 데려온 가짜 연인에게 뒤통수를 맞고 자멸한 머저리들을 기억해.
‘세벨리아는 힐렌드 홀에 묻혀 있어. 내가 직접…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녀의 가슴에 꽃을 얹어 주었다고.’
세벨리아의 관이 땅속에 묻히던 순간을 떠올리자 끓어오르던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차가운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디하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벨리아를 향해 몸을 숙이며 상냥하게 물었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제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살면서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적도, 가까워지고자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살갑다는 평가를 받는 일레이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허나 이 계획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디하트의 외모였다. 어디 산골에 던져 놔도 잘 적응할 것 같은 호감형의 일레이와 달리 그는 도회적이고 신경질적인 미남이었다. 그 덕에 디하트가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 하는 모든 행동은 퇴폐적인 향기를 뿜었다. 정작 그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아… 그럼요. 여기 앉으세요. 비켜 드릴게요. 마침 몸이 으슬으슬해져서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아침부터 난데없이 유혹당한 세벨리아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십 년 넘게 저택에서 갇혀 살다가 바로 디하트와 정략 결혼한 그녀는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 면역력을 높여 주는 행동을 한 번도 해 준 적도 없었고.
그리고 그 장본인은 뻔뻔스럽게도 시무룩한 척 세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때문에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실 필요는 없어요. 벨라 양의 자리를 빼앗는 건 싫으니까요. 같이 앉아요. 이렇게…. 자, 이러면 사이좋게 같이 읽을 수 있잖아요.”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겨우 손바닥 하나만 한 공간을 두고 그 옆에 앉았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세벨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이게 뭐람?’
그리고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디하트가 공격에 나섰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책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 있지는 않나 살펴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책이 꽤 두껍네요. 워츠 씨가 빌려준 책인가요?”
“아, 네. 그런데 디하트 씨가 읽기에는 지루하실 거예요. 약초에 관한 거라.”
“흐음…. 벨라 양이 생각하는 저는 그런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군요.”
의미심장한 말에 세벨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고개를 돌리자 디하트가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를 마주 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탐색과 경계심이 산뜻한 아침 공기를 진득하게 물들였다.
그리고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빨랫감이 잔뜩 든 바구니를 들고 클로드가 모습을 보였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무척 언짢아 보였다. 그는 디하트와 세벨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디하트를 향해 손짓했다.
“지식을 쌓는 것도 좋지만 살림하는 법도 알아 둬야지. 이리 와요.”
“…….”
“몸을 움직이다 보면 없던 기억도 생기는 법이에요. 지금 의원 조수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클로드가 팔짱을 낀 채 엄한 얼굴로 그를 타일렀다. 디하트의 웃는 얼굴 위로 짜증이 어렸다 사라졌다. 대치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세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뇨, 벨라 양은 들어가서 쉬어요.”
“같이 하죠.”
클로드가 정색하고 그녀를 만류하려 들자 디하트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채도가 다른 두 금안이 서로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쳇. 클로드가 혀를 차는 모습을 디하트는 똑똑히 목격했다.
“힘쓰는 일은 제가 하죠. 두 분이 앞장서세요.”
디하트가 빨랫감이 든 바구니를 번쩍 들어 올리며 클로드의 거절을 원천 봉쇄했다. 세벨리아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디하트는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유심히 바라보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가까워지는 건 좋았으나 아직도 경계심이 심했다. 하긴, 작전 대상이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새로운 지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소극적으로 행동하겠지.
디하트는 클로드의 지시에 따라 빨래 널면서 새 작전의 필요성을 느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그녀를 뒤흔들어 정체를 알아내야만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다.
그가 펄럭거리는 이불보를 빨랫줄 위로 휙 하고 얹어 놓는 순간이었다.
“벨라!”
클로드의 비명이 마당을 울렸다. 평화로웠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디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하얀 천들 사이로 세벨리아가 천천히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그는 세벨리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바닥에 뒤엉켜 엉망진창이 된 옷들이 보였다. 클로드가 어딘가를 향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