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2)화(52/171)
세벨리아가 다시 안정을 취하도록 방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잠시 뒤, 클로드가 계단을 올라가려던 디하트를 붙잡았다.
“이야기 좀 하자.”
“…….”
“이대로는 안 돼, 너도 알고 있잖아.”
클로드는 디하트의 결심이 무엇이든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또한.
디하트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중에.”
“날 믿고 털어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계단을 올라가던 디하트가 어깨너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진 금색 눈동자는 소리 없이 침잠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그의 시선을 붙들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병이 뭔지 알고 싶다고 했지.”
난간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진실을 캐내네, 거짓말을 했네 해도 그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원래 환자의 개인정보는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게 워츠의 입장이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입장을 철회해야 할 때가 있지.”
“어느 때?”
물어보는 목소리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치료 도중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순간이 와. 그런데 그런 환자 중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있거든.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인척이나 지인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혹시라도 환자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거나, 사망하면 수습을 부탁해야 하니까. 이어지는 말에 디하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손을 갖다 대면 쩡 하고 깨져 나갈 것처럼 위태로운 표정이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병이라고?’
디하트는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가짜 세벨리아가 아프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병에 걸린 척하고 있다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딱히 환자처럼 굴지도 않았다.
때때로 약을 먹거나 잠시 산책을 할 뿐, 건강한 생활을 유지했으니까. 그래서 디하트는 그녀가 가벼운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네가 위층에 묶여 있는 동안 워츠는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지 못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게 무슨…….”
“그녀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도 내가 그에게 너를 먼저 봐 주길 부탁했다는 말이야.”
“뭐?”
디하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알기를 거부했던, 은연중에 별거 아닐 거라 치부했던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껏 아무렇지 않았잖아. 나는, 그래서.”
“별로 심각한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군. 아니면 아프다는 걸 믿지 않았거나. 알 만해.”
클로드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디하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그는 세벨리아가 워츠마저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심 워츠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실력을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세벨리아가 쓰러졌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악몽 속에서 강제로 겪어야만 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서였기도 했고, 어쩌면 그녀가 진짜로 세벨리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서였다.
그녀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세벨리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눈물을 흘리고 호소하거나 화를 내야 함이 옳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 앞에서 쓰러지는 게 아니라!
‘세벨리아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내 앞에서 쓰러져 봤자 무슨 효과가 있겠어.’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억지로 외면하던 사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정말로 그녀가 아팠다고.”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건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왜 그녀가 자신을 이곳까지 끌어들였을까. 굳이 이럴 필요 없이 힐렌드 홀에 있을 때 나타났어도 됐을 텐데. 어째서 서프레디여야만 했을까.
내내 그를 괴롭히던 의문이 이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풀려 버렸다.
“그렇다면 일부러 나를 이리로 끌어들였다는 말이 아니지. 그렇게 되면, 그러면.”
디하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함정을 판 게 아니라면, 정말 아파서 이곳까지 왔을 뿐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디하트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큭…….”
“디하트!”
클로드가 달려와 무너지려는 그의 몸을 붙들었다. 디하트가 헐떡이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세벨리아가 정말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자신은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광장에서 자신을 보고 도망친 것도, 마법을 부려 끔찍한 짓을 한 것도 사실은 간악한 함정이 아니라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었다.
‘내게 살아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심장 한복판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뜨끈뜨끈한 피가 흘러나와 몸을 적시는 기분이었다. 비참했다. 슬펐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극심한 고통이었다.
“디하트, 괜찮아? 방으로 올라가자.”
“됐어.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부탁이니까, 잠시만이라도.”
디하트가 고개를 내저으며 클로드의 팔을 풀었다. 그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익숙한 어둠이 그를 반겼다.
“윽…….”
하지만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그를 버리고 갔다는 속삭임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어. 하찮은 수작질이 아니라 이게 진실이야. 네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진실.] [얼마나 네가 끔찍했으면 시체를 준비하면서까지 널 벗어나려 한 걸까?]하하하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
“정신 차려, 몸도 웅크리지 말고 고개 숙이지 마. 제대로 숨 쉬어!”
점점 위태로워지는 정신에 디하트의 방어기제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가짜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고집스러운 편견이 그의 생각을 덮어씌우려 했다.
그러나 디하트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세벨리아를 보는 순간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이미 은연중에 그녀가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윽…….”
단지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그가 미쳤다고 말했기에 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다행히 클로드의 도움으로 디하트의 발작은 멈췄다. 하얗게 물들었던 그의 눈이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확인한 클로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헉…….”
디하트가 거친 숨을 내뱉자 클로드가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는 디하트가 어느 정도 진정한 걸 보고 차분하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한 건 아니지만 벨라 양에게는 지금 보호자가 필요해. 하지만 나는 바쁘고, 워츠도 마찬가지지.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가족이나 지인에 대한 이야기도 일절 꺼내지 않으려는 눈치야.”
“…결국 내가 나서야 한다는 거로군.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디하트가 씁쓸한 얼굴로 내뱉었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하트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심정이 꽤나 복잡한 듯했다.
“그래. 이 긴 대화의 결론은 그녀와 내가 무슨 사이인 알고 싶다는 거겠지.”
디하트는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어차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으니까.”
두 사람은 디하트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뒤, 클로드의 장탄식이 방을 가득 메웠다.
* * *
다음날, 세벨리아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워츠가 주고 간 책을 읽고 있었다. 정원에서 읽었던 책의 심화 편이었다.
[선행학습이라고 치죠. 당분간은 숲에도 나가지 못하니까 남은 시간은 공부에 투자하도록 합시다.]세벨리아는 전문용어들이 가득한 학술서를 고민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심화 편이라지만 너무 심한데.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시야에 가득 차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워츠 씨가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
워츠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스승은 아니었다. 세벨리아도 그에게서 그런 면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두 사람의 수업은 제법 원활히 진행되었다. 문제라면 그가 제게 바라는 수준이 높다는 거겠지.
“으윽.”
세벨리아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가 탁하고 표지를 덮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심화>라고 적혀 있는 책을 베개 아래에 두고 자리에 누웠다.
“…심심해.”
세벨리아는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쳐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누워 있으면 피곤하고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심심하다는 투정을 부릴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세벨리아는 힐렌드 홀을 떠나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깨달았다. 항상 움츠러들곤 하던 어깨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펴져 있었고, 때때로 클로드를 상대로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떠나와서 다행이다.”
내게 환영 술사의 능력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겠지. 세벨리아는 자신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환영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자신이라는 사람을 세상에서 없앨 수 없었을 테니까.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벨리아는 고개를 들고서 들어와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벨라.”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디하트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세벨리아의 의문은 그가 들고 있는 쟁반의 내용물을 보고서 해소되었다.
“아침을 가져왔어요. 식당까지 나오기 힘들 것 같아서.”
디하트가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고 방을 가로질렀다. 세벨리아는 절벽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그의 발걸음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다 뭐예요?”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아침이라기엔 너무 과했다. 스프만 세 종류에 빵은 다섯 가지, 신선한 야채로 만든 샐러드도 무려 네 개나 있었다. 세벨리아가 질린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디하트가 당황했다.
“마음에 안 듭니까?”
“그게 아니라, 너무 많잖아요.”
“아. 그게 문제였군요. 놀라라.”
디하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게끔 준비한 거니 남겨도 상관없어요.”
디하트가 커트러리를 건네며 싱긋 웃어 보였다. 세벨리아가 미친놈을 보듯 그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