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4)화(54/171)
세벨리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전에 또 다른 절망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왜 그녀는 기억을 잃은 제게 다른 이름을 댔을까. 세벨리아라고 말했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기억상실인 걸 믿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녀에게 자신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기억을 잃었다 해도 혹시나 싶은 거겠지.
“하…….”
어찌 되었든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세벨리아는 어떤 이유에서 힐렌드 홀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환영술을 이용해 장례식을 열었고,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어떻게 봐도 제게는 암담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힐렌드 홀이 좋아서 떠났을 리가 없으니까. 가짜 시체까지 준비하는 치밀함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힐렌드 홀을, 그곳의 사람들을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디하트의 눈이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금빛 눈동자 위로 먹구름이 끼었다. 세벨리아가 살아 있다면 그저 행복할 거라 여겼다. 기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도대체 뭐가 신경 쓰여서. 디하트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신음했다.
그때, 데니사와 나누었던 대화가 화살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가씨는 보답받지 못하는 애정에 이미 오랜 기간 지쳐 있으셨지요. 그러니 결혼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일은 그분의 굳어 버린 피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 그 이상의 상처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대 말은… 그러니까. 그녀가 이미 나를 포기했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예.] [이미 아가씨는 공작님께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보내신 상태였습니다.]디하트는 그제야 제가 놓치고 있던 현실을 깨달았다. 왜 자신이 이리도 안절부절못하는지,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받고도 왜 자꾸 불안한지 알게 되었다.
저 아래, 잠들어 있는 여인은 그를 마음에서 완전히 놓아 버린 세벨리아였다. 그가 그리워하고 꿈속에서라도 만나길 원했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라.
* * *
이쯤 되니 고통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는 가슴을 파고드는 가시 같은 아픔에 신음했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디하트는 머리를 굴렸다. 장례식을 열면서까지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한 그녀의 곁에 어떻게 머무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더 갖다줄까요?”
디하트는 초콜릿 칩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눈을 깜빡이고 있는 세벨리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스푼을 들고 멈칫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디하트는 그대로 신음을 흘릴 뻔했다. 그녀가 진짜 세벨리아라는 걸 알자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어쩐지 숲에서 자꾸 마음이 흔들리더니. 진짜 그녀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다리면서 다른 것도 한 번씩 맛봐요. 라즈베리가 들어간 쿠키도 꽤 맛있던데요.”
디하트가 색색의 쿠키가 담긴 그릇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세벨리아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싱긋 웃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순간순간 회의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런 손발이 뒤틀리는 짓 따위는 해 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디하트로서 계속 사는 것. 그녀가 버린 과거의 디하트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사람으로서 그녀와 마주하는 것.
‘내게는 이 길밖에 없어.’
인버네스의 가주이며 그녀의 남편인 디하트는 버려졌으니까. 금빛 눈동자 위로 고통스러운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기억을 잃었다고 한 건 정말 천운이었다. 디하트는 냉동고의 문을 열며 쓴웃음을 삼켰다. 만약 신중을 기하지 않고 그녀에게 무슨 속셈이냐고 윽박부터 질렀다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 테니까.
‘일레이를 따라 한 게 득이 될 줄이야.’
그 녀석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디하트는 쉽게 사람들의 벽을 허물고 호감을 사는 그의 행동을 따라 해 다정하고 상냥해지려 노력했다. 세벨리아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비록 지금과는 다른 목적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한 함정인 줄 알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제 행동을 합리화한 디하트는 초콜릿 칩이 박힌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시 복도로 돌아갔다.
‘나는 그 빌어먹을 힐렌드 홀의 주인이 아니라, 기억을 잃은 스물아홉 살짜리 청년이야.’
그러니 나를 밀어내지 말아 줘, 세벨리아. 나는 더 이상 당신을 힘들게 만들던 그때의 내가 아니야.
똑똑.
“디하트?”
“아이스크림을 가져왔어요.”
“들어와요.”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막이 올랐다. 마침내 디하트는 그가 쓴 가면과 하나 되기를 선택했다.
* * *
“보고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나.”
사일러스가 서류를 내던지며 말했다. 서늘한 눈과 마주친 네이튼이 목을 움츠렸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일러스가 한숨을 쉬고 깍지를 꼈다.
“내가 원한 건 그런 말이 아니다, 네이튼.”
세벨리아의 유모인 데니사를 놓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네이튼은 일부러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사일러스가 상황을 알게 된 건 그가 네이튼에게 붙여 준 비서가 참다못해 사실을 고해서였다.
“진작 말했다면 내가 추적조를 편성했을 거다. 하지만 네가 미적대며 시간을 끈 탓에 하녀의 뒤를 쫓는 게 불가능해졌어.”
사일러스는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하게 사실을 읊었다. 강도 높은 비난이나 원색적인 욕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네이튼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사죄했다. 사일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확실한 결과야.”
자신만만하기에 어디 한번 해 보라고 맡겼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이라니. 그는 네이튼의 재교육을 검토하며 쓸모없어진 서류를 던졌다.
“됐으니 너는 일선에서 물러나라. 지금까지 맡고 있었던 일은 모두 스웨인에게 넘겨.”
스웨인은 사일러스가 네이튼에게 붙여 준 비서의 이름이었다. 네이튼이 혼날 것을 두려워해 데니사를 놓쳤다는 사실을 숨긴 걸 폭로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네가 하녀를 놓친 그 순간 내게 알리기만 했어도 이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다. 하물며 그녀를 데려간 사람이 누군지만 알았어도.”
사일러스가 쯧하고 혀를 찼다.
네이튼이 손수 모은 첩자들은 하나같이 어중이떠중이들뿐이었다. 미행을 들킨 거로도 모자라 목표물을 데려간 자가 누구인지조차 파악을 하지 못했다니.
네이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버지 앞이라는 걸 자각했는지 빠르게 본래대로 돌아왔다. 사일러스는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미욱한 아들이지만 어쨌든 제 자식이니까.
사일러스가 나가 보라 손짓했다. 그러나 네이튼은 그에 따르지 않고 버텼다. 사일러스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방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네이튼.”
사일러스가 혀를 차며 그를 내쫓으려 했다. 네이튼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무릎 꿇고 앉으며 속삭였다.
“최근 제가 플로라 인버네스와 어울리고 있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시겠죠. 그런데 그녀가 이번에 힐렌드 홀에서 연회가 열린다며 제게 은밀히 말을 흘렸습니다. ”
사일러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가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자 네이튼은 한결 밝아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기는 명목상의 주최자일 뿐, 림스 후작이 모든 자금을 대기에 그분의 마음에 들어야 연회에 초대받을 수 있다며 그와 교류를 가지길 제안하더군요. 어떻습니까, 아버지.”
사일러스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맺혔다. 그가 네이튼의 어깨를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
“제법 하는구나. 그래, 연회에 초대받으면 힐렌드 홀에 들어갈 수 있겠지. 별 볼 일 없는 하녀의 뒤를 쫓는 것보다 훨씬 쓸모 있는 소득이야.”
“감사합니다. 그러니 스웨인의 건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마. 너는 가서 나와 림스 후작 사이에 자연스레 다리를 놓을 방법을 생각해 오거라.”
네이튼이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사일러스는 창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힐렌드 홀의 저택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데니사를 놓친 건 아쉬운 일이었다. 그녀가 있다면 세벨리아의 거처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없다고 절망할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두 눈으로 텅 빈 세벨리아의 관을 확인하는 거였다. 그녀의 생존이 확정되는 순간 부차적인 문제들은 의미 없어지니까.
세벨리아가 자신의 딸인 이상, 결코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제가 구상한 완벽한 계획을 떠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러니 마음껏 도망쳐 보거라, 얘야.”
뭐, 뒤늦은 사춘기라고 생각하니 못 참아 줄 것도 없었다.
* * *
나른하고 온화한 오후였다. 기운이 회복될 때까지 휴식할 것을 명받은 세벨리아는 거실에서 주간지를 읽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클로드를 불렀다.
“클로드 씨.”
“음?”
“여기 생필품은 다 서프레디에서 사 오시는 건가요?”
세벨리아가 거실을 훑으며 물었다.
“워츠 씨의 조수라는 걸 알면 서프레디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은데…….”
세벨리아의 의문은 타당했다. 아직도 여섯 번째 길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었다. 클로드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그래서 서프레디 거리를 활보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죠. 산맥 뒤로 마을이 여러 개 있어요. 주로 그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오곤 해요.”
“아하.”
세벨리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런 깎아지른 산 한가운데 이상한 결계까지 세우고 살고 있으니까. 산맥을 넘어 맞은편 마을에 들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런데 벨라 양한테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또 뭐가 궁금해요?”
클로드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세벨리아는 입을 작게 벌린 채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음… 사실 서프레디로 다녀오시는 거라면 클로드 씨를 통해 요새 그곳 분위기를 알 수 있을까 했어요.”
“서프레디야 언제나 같은 분위기일 텐데요.”
고개를 기울이는 클로드를 보며 세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진짜로 서프레디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