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5)화(55/171)
데니사의 속달 우편을 받고 얼시크를 빠져나올 당시, 세벨리아는 나중에 그녀가 제 행방을 찾을 것을 대비하여 여관에 한 가지 부탁을 해 놓았다.
[누군가 제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며 이것과 한 쌍인 반지를 보여 준다면 제가 맡겨 놓은 편지를 전해 주세요.]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만일 자신이 지금 서프레디에 있다면 여관에 편지를 보내 데니사가 방문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클로드 씨에게 부탁하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디하트는 기억을 잃었으니 차치하더라도, 클로드는 인버네스의 일원인 게 틀림없었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에게 제 정체를 들킬 수 있는 무언가를 맡긴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한담…….”
세벨리아가 무심코 한숨을 내뱉은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 아파요?”
디하트였다. 그가 금빛 눈동자에 걱정을 대롱대롱 매달고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나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매가 순하게 내려와 있는 게 참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됐다.
“아니에요. 그냥 집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요.”
“그렇군요.”
“네.”
세벨리아가 주간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디하트는 쿠키가 든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답답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솔직한 답변을 바라는 건 아직 무리인 걸까.’
디하트는 괜히 시무룩해져서 그녀처럼 들고 온 쿠키 바구니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이럴 때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항상 주변인들이 그의 비위를 맞춰줬지, 그가 한 적은 없었으니까.
일레이의 행동을 아무리 따라 한다 한들, 그의 내면까지 완전히 동일하게 베껴 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마디로 디하트는 실속 없는 쭉정이에 불과했다.
“하아.”
“후우…….”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가 놀라 서로를 응시했다.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치자마자 바로 고개가 돌아갔다. 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클로드가 보았다. 쯧쯧. 혀를 찬 그가 디하트를 불렀다.
“와서 이불 빨래하는 것 좀 배워 봐요.”
“…….”
“남자가 돼서 이불 빨래하는 법도 모르면 안 되지.”
디하트의 강렬한 눈빛에도 클로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디하트는 소리 없는 한숨을 푹 쉬더니 바구니를 세벨리아 쪽으로 좀 더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뒷마당으로 나오자 쌀쌀한 가을 햇볕이 얼굴에 내리꽂혔다. 클로드는 커다란 목조통에 물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아까 벨라 양과 이야기하다 서프레디 이야기가 잠깐 나왔거든.”
“그래서?”
디하트가 개킨 이불을 가져오며 물었다. 클로드가 거품을 내며 흠, 하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서프레디에 기사들을 데리고 왔어?”
“아.”
“그렇지 않아도 반대편 마을 사람들한테 요새 서프레디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소리를 들었어. 표식 없는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이 근처를 돌아다닌다던데.”
스르륵. 들고 있던 이불이 잔디 위로 떨어졌다. 클로드가 기겁하며 그를 타박했다. 하지만 디하트는 그의 잔소리를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젠장, 연락을 취한다는 걸 잊고 있었어.”
“역시 혼자 온 게 아니었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디하트는 그제야 자신이 세벨리아에게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된 이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구속에서 풀려나 세벨리아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디하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네가 이곳에 도착한 지 이 주 가까이 됐지.”
“젠장, 이런 실수를.”
디하트가 침음을 흘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를 동안 그는 두고 온 기사들을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디하트의 머릿속에서는 매일같이 난장판이 벌어졌으니까. 그에게는 세벨리아 외에는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두고 왔다는 걸 잊을 수 있지?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 지났는데,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어.”
“…사람이 한 가지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것들을 모두 놓아 버릴 때가 있는 법이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야.”
클로드가 흙이 묻은 이불을 털어 내며 자조하듯 말했다. 그 또한 그런 때가 있었다. 로잘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 나서던 때가.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편이야. 보통 사람들은 세월을 허비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잃은 뒤에야 자기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닫거든.”
“…그런가.”
한숨을 내쉰 디하트가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다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 일레이에게 연락을 취해야 해. 그 녀석이 아래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몰라.”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남작에게 공관을 요청하려던 놈이었다. 그런 녀석을 두고 2주나 지났다니. 디하트는 뒷목이 서늘해졌다.
“인버네스랍시고 날 찾는다며 설치고 다닌다면 아주 곤란하다고.”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디하트는 뒤늦게 라이언을 원망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클로드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든 표식이든 뭐든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알릴 만한 걸 준비해 둬. 며칠 뒤에 내려갈 때 전해 주마.”
“고마워.”
“별말을 다 하는구나. 대신 이불은 네가 밟아.”
“무보수는 아니란 건가, 알겠어.”
쓴웃음을 지은 디하트가 어느덧 물이 가득 채워진 목조통 안으로 들어갔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물 아래 푹신한 이불이 밟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세벨리아가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지.’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며 디하트는 자신이 정말 운이 좋다는 걸 인정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점점 정신적으로 미쳐 가는 자신을 느꼈으니까.
‘미쳐 가는 방법도 수백 가지라는 걸 그때 느꼈지.’
세벨리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를 놓아 버렸을 때와는 다른 정신적 고통이었다. 그는 매번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목을 졸랐다.
진짜 세벨리아일지도 모른다며 매번 흔들리는 자신과 그를 부정하고 매도하는 냉혹한 자신. 그래, 나는 미쳤으니 내 생각도 모두 미친 거겠지 하는 자괴감과 그럼에도 혹시 모른다며 버리지 못하는 기대감.
두 자아가 세벨리아의 생사를 가운데 두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소모적인 논쟁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순간에도 그는 세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가짜라면 가짜인 대로, 진짜라면 진짜인 대로 그녀 곁에 붙어 있을 이유를 제 마음대로 만들어 냈으니까.
그 정도로 디하트는 세벨리아에게 홀려 있었다.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이래서야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군.”
미끈거리는 이불 사이로 푹푹 발을 쑤셔 넣으며 디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벨리아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세벨리아의 인영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 * *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저택 앞에 있는 숲으로 발을 들였다. 잘못 발을 들이면 바로 착란에 빠지는 악몽의 숲과 달리, 여기서부터 호수가 있는 곳까지는 안전지대였다.
그녀는 검은 손톱풀을 채취하던 자리에서 조금 더 걸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표식을 남기며 몇 분 정도 걸었을까.
“제대로 찾아왔네.”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가 보였다. 토끼풀처럼 자그마한 잡초들로 뒤덮인 공터는 편히 앉아 쉴 수 있을 만큼 푹신했다. 세벨리아는 혹시 몰라 챙겨 온 쿠키 바구니를 근처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던 세벨리아는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미약한 바람이 스치고, 적막이 풀숲에 내려앉았다.
세벨리아는 눈을 감고 온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너무 오랜만에 힘을 운용해서일까. 예전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여관에서는 단시간에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상황이 급박해서 순간적으로 힘이 발휘되었었나 봐.’
세벨리아는 눈을 찡그린 채 집중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오랜만에 환영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곧 보이지 않는 공을 쥐고 있는 것처럼 굽은 손가락 사이로 파란빛이 터져 나왔다.
화악-!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 위로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성공했나?’
세벨리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단추처럼 반질거리는 검은 눈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자신을 불렀느냐는 듯한 눈에 세벨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안녕, 오랜만이야.”
파란 새가 삐빗거리며 꼬리를 휙 쳐들더니 풀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세벨리아는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새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굳이 이런 곳에 숨어 환영을 불러낸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데니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해.’
제가 앓고 있던 병이 리히스가 아닌 가시나무병이라는 것도 알았고, 치료도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소지금은 거의 다 떨어졌지만 워츠에게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나중에 이곳을 나간다면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미래에 데니사가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위해 제 삶을 희생해 온 사람이었다. 세벨리아에게 그녀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이 주 가까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얼시크에 도착했을지 몰라.”
데니사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을 거란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디하트가 찾아왔다며 쪽지를 보냈으니, 아마 그를 따돌리고 중앙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을 떠돌았겠지.
“나 때문에…. 하아.”
세벨리아는 어느새 어깨에 올라와 앉은 파란 새의 깃털에 뺨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서프레디에 몰래 다녀올 동안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환영을 만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