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6)화(56/171)
다섯 개나 되는 이불을 모두 헹구고 돌아왔을 때 세벨리아는 자리에 없었다. 디하트는 반쯤 비워진 쿠키 바구니를 흘끗 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고 더 날뛰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디하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펜을 들었다. 일레이는 서프레디 남작을 부추겨 여섯 번째 길로 쳐들어오고도 남을 녀석이라 왠지 불안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을 여태껏 잊고 있었던 제 죄였다.
사각, 사각.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은 소위 말하는 여섯 번째 길의 목적지에 머물고 있으니 별 탈 없으니 가만히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흠.”
하지만 편지만 달랑 클로드 편에 보내면 분명 의심을 살 터였다. 디하트는 고민하다가 망설이는 눈으로 펜던트를 풀어냈다. 그는 한참이나 세벨리아의 초상화를 바라보다 결국 봉투 안에 펜던트를 넣었다.
‘이래도 못 알아먹는다면 힐렌드 홀로 돌아가자마자 면직이다.’
디하트는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마침 현관으로 들어오는 클로드와 마주쳤다.
“벌써 준비했어?”
편지봉투를 받아 들며 그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까.”
“그래…. 이건 그 일레이라는 기사에게 전하면 되는 거지. 다시 한번 확인하마. 짙은 금발에 회갈색 눈, 허리춤의 장신구, 맞지?”
클로드가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읊자 디하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가 같이 고개를 까딱이고 봉투를 품 안에 넣었다.
“나머지는 내게 맡겨. 참, 벨라 양한테 가서 오늘 저녁 메뉴 괜찮냐고 좀 물어봐 줄래? 송어를 버터에 구울 건데 좋아할지 모르겠네.”
“아마 좋아할 거야.”
부엌으로 향하는 클로드를 뒤로하고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축적되어 온 경험에 의해 발휘되는 순간적인 감각. 노크 소리가 텅 빈 방을 울린 짧은 순간, 디하트 또한 직감적으로 느꼈다.
‘설마.’
달칵. 문을 열었다. 세벨리아는 방에 없었다. 그의 눈에 정갈하게 정리된 침구와 작은 테이블,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힐렌드 홀에서 머물던 그녀의 작은 방과 꼭 닮았다. 디하트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트라우마가 입을 벌리고 그를 집어삼켰다.
“헉.”
그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잠시 동안 자신이 힐렌드 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없는 삭막한 방, 다 타 버린 가구들, 그곳에서 그녀의 환영을 본 순간으로 돌아갔었다.
‘진정해.’
여기는 힐렌드 홀이 아니고, 그녀는 다른 곳에 있을 거야. 방에 없다고 도망쳤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성적으로 굴어, 디하트. 빌어먹을. 제발 호들갑 떨지 말라고.
그는 귀에 찬 제어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심호흡했다.
“별일 아니야. 그녀는 여기 있을 거야. 사라지지 않았어. 아무 일도 없었잖아. 떠날 이유가 없어, 그렇고말고.”
세벨리아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생긴 부작용이었다. 가짜일 때는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는데, 사실을 깨닫고서는 부쩍 불안증이 심해졌다.
“후우…….”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일단 침착하게 일 층의 모든 방을 뒤졌다. 서재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던 워츠가 불쑥 들어온 그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봤지만 상관없었다.
‘일 층에는 없어.’
워츠가 지하연구실에 있지 않으니 거기도 아닐 테지. 디하트는 덜컥이는 심장을 억지로 무시하며 계단을 올랐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이름을 내지르고 싶은 걸 참으면서.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괜히 소란을 부렸다가 놀라게 하면 안 되지.’
그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문을 여닫는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쾅, 쾅! 연달아 문이 닫히는 소리에 아래층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에도 없잖아.”
불안이 점점 커져 나갔다. 세벨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마모된 그의 정신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짚고 삼 층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있어야 해.
그러나 디하트의 기대는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마지막 방,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휘잉.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찬바람이 그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디하트는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
“내가 놓친 곳이 있을 거야.”
디하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다시 방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작은 비명이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
정원이었다. 그곳에서 세벨리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디하트가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췄다.
* * *
디하트가 그녀를 발견하기 전, 숲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세벨리아는 두 사람이 뒷마당에 있는 걸 확인하고 정원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집 안에만 있으라던 워츠의 말이 떠올랐지만 도무지 들어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답답함 때문에 가끔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아, 좋다.”
겨우 벽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뿐인데. 같은 햇살임에도 거실 창가와 정원에서 느끼는 게 확연히 달랐다. 세벨리아는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무릎을 덮쳤다. 새라도 떨어졌나? 세벨리아는 놀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
그녀의 무릎 위에 뒹굴고 있는 건 고양이였다. 세벨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웬 고양이? 놀라움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가느다란 회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갑자기 어깨를 타고 오르려 했다.
“잠깐, 안 돼. 아가야, 아야!”
세벨리아는 그제야 고양이가 자신을 덮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삐빗. 작은 새소리와 함께 파란 새가 총총 팔을 타고 뛰어내려 오더니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아.”
내가 널 돌려보내는 걸 잊었구나. 세벨리아의 장탄식에 고양이가 발버둥 쳤다. 회색 고양이의 뒷발에 머리카락이 엉키며 난장판이 되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안 돼, 제발…. 꺄악!”
파란 새는 종종거리며 고양이를 놀리고, 고양이는 약이 올라 하악질을 하며 세벨리아를 쿠션마냥 밟아 댔다. 내려놓으려고 손을 대면 고양이는 귀엽게 생긴 것과 달리 매섭게 그녀의 손등을 내려쳤다.
그러다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아야!”
자꾸만 몸을 건드리는 손에 성질이 났던지, 고양이가 그녀의 팔목을 물었다. 송곳니가 살갗을 파고들고 깊게 박혔다. 세벨리아는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 당황해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고양이를 떼어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세벨리아!”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고양이의 습격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오늘따라 해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내려 줘요!”
“피가 나잖습니까. 감히 누가…! 너구나.”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가 회색 털의 고양이를 향했다. 고작해야 짐승일 뿐인데도 노려보는 기세가 대단했다. 하악-! 고양이가 등을 구부리며 그를 위협했다.
세벨리아가 디하트를 말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안 돼요. 내버려 둬요.”
“하지만.”
“그리고 나도 내려 주고요. 빨리요.”
디하트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망설였다. 갈팡질팡하는 그의 눈동자가 여실히 보였다. 세벨리아가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결국 디하트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그녀를 땅에 내려놓아야 했다.
고양이는 어느새 접었던 귀를 펴고 그들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세벨리아가 손짓으로 고양이를 멀리 보내자 디하트가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응급처치는 해야 해요. 당장 워츠 씨에게 갑시다.”
“그럴 참이었어요.”
땅에 발이 닿자 안심이 되었다. 세벨리아는 휴, 하고 숨을 내쉬고는 디하트의 손목을 붙들었다.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이 태양처럼 반짝하고 올라왔다.
“같이 가요.”
“아, 그, 그러죠.”
디하트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내게 마음이 조금은 생긴 걸까. 방금 전까지 머리를 울리던 불안증은 어디 간 건지, 그는 하늘을 날듯 걸었다.
물론 그의 추측과 달리 세벨리아는 디하트가 혹시 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그를 끌고 가는 중이었다. 손목을 붙잡을 때만 해도 싫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를 세벨리아라고 불렀어.’
분명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일부지만 기억이 조금은 돌아왔나.
세벨리아는 워츠가 있을 연구실로 향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똑똑.
그녀는 지하연구실의 문을 두드리는 디하트의 모습을 한 발자국 멀리서 지켜보았다. 돌아보는 눈매가 순하고 선량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에게서 세벨리아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더 이상은 믿을 수 없었다.
‘조심해야겠어.’
그와 재회한 첫날에는 기억상실이든 일부러 연기하는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속이야 어떻든 그는 디하트였다. 세벨리아는 그와 마주하며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물론 그의 죄는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디하트는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온전히 세벨리아 자신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 아무것도 모르는 디하트에게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그때가 되면 나는 정말로 당신을 원망할지도 몰라. 세벨리아 인버네스라는 과거를 버려 놓고서, 무책임하게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일은 절대 안 되지….”
“벨라, 뭐라고 했어요?”
“아, 아니에요.”
디하트를 뒤따라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며 세벨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정한 그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많이 나요.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혹시 감염이라도 되었다든가.”
“약을 바르면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 어린 그의 곁을 지나치며 세벨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연히 제 이름이 떠올라 부른 것이든, 일시적으로 기억이 떠오른 것이든.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빨리 데니사와 연락을 취해 치료가 끝나는 대로 떠나야겠어.’
그녀의 푸른 눈이 빛 아래서 서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