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5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59)화(59/171)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꽃향기와 철컹철컹 울려 퍼지는 가윗날 소리. 효수되는 목처럼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는 붉은 장미와 그것을 집어 드는 하얀 장갑.
한순간 세벨리아는 디하트가 제게 지독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후우…….”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마야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보다 쿠션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비슷한 광경이었지.”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긴 했으나 방금 전 그녀가 본 모습은 힐렌드 홀에서 마지막으로 그와 마주한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만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세벨리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속셈을 캐내려다 그가 기억상실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목에 걸린 가시처럼 꺼림칙함이 마음속에 남았다. 그녀는 무엇 때문일까 고민하다 깨달았다.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장미를 솎아 내지?”
세벨리아는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가 출렁이며 반동으로 파란 새가 튀어 올랐다. 그녀의 푸른 눈에 시린 빛이 가득 찼다.
“몸에 익은 습관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과 학습한 지식을 떠올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잖아.”
원예는 사전지식 없이 도전할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필요 없는 가지와 열매를 솎아 내는 데에는 경험과 지식이 필요했다. 보통은 들꽃과 이름 있는 꽃을 구별할 줄도 모르니까.
즉, 기억 없이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역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거야.”
세벨리아는 초조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아직 만족할 만한 환영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는데, 그는 벌써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다시 망쳐 버리고 말 거야. 세벨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위기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일까,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힐렌드 홀의 주인이자 인버네스의 가주가 아닌 디하트는 무능했다.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세벨리아는 끝까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필사적으로 느껴져 디하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하.”
기억상실이라. 그런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니. 디하트는 과거의 자신을 미친 듯이 저주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조각난 웃음 부스러기에는 자괴감이 묻어 있었다.
‘이제라도 기억이 돌아왔다고 말해야 하나?’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말한 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를 낼까, 눈물을 흘릴까, 소리를 지를까.
어느 쪽이든 디하트는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모든 걸 알게 된 그녀와 자신이 서로를 마주한 그다음에는?
이 뒤에 우리에게 이어질 미래가 있을까?
“아, 나는,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니, 디하트는 실은 모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내내 진실과 마주하는 걸 회피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천성이나 다름없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
어린 디하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가족들의 마지막을 머릿속에서 통째로 지워 버렸다. 그건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편이었다.
문제는 도망침의 편리함을 알아 버린 그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배신에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뒤에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음모를 찾아 헤맸다.
갈색 머리의 세벨리아가 진짜라는 걸 알고도 계속 기억상실인 척 연기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는, 견딜 자신이 없어.”
그 모든 걸 직접 마주하려면 그만큼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니까. 폐부를 찢고 심장을 할퀴는 감각을 감내해야만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디하트는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있는 힘을 다해 거부했다. 그는 끝없이 도망쳤고, 도망을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세벨리아.’
“만약 이대로 거짓 연기를 이어 간다면 그 이름을 다시는 부르지 못한다는 건가. 두 번 다시는.”
디하트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편리하고 쉬운 선택, 고통스럽지 않은 길을 택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세벨리아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임에도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르쳐 주지 않은, 기억 없는 디하트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오직 ‘벨라’였으니까.
디하트의 아내이자 한때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은 그렇게 과거 속에 묻혔다. 앞으로 그는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도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것이다.
‘언제까지?’
평생토록?
그 순간, 아득한 어둠 속에 내던져진 것마냥 끝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까마득한 수렁 속에서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미 무의식중에 그녀의 본명을 불렀다는 것도 모른 채, 디하트는 자괴감과 후회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 쌍의 눈동자가 문틈 사이로 훔쳐보고 있었다.
* * *
자신을 노려보는 회갈색 눈동자에 클로드는 마음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클로드는 대놓고 의심 간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일레이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놈이라더니, 설명보다 더한 놈인데.’
클로드가 서프레디에 도착한 건 반나절 전의 일이었다.
그는 서프레디에 들리기 전에 산맥 뒤편 마을에 먼저 도착했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매입하고 자그마한 우편국에도 들린 뒤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산을 내려가 도보를 따라 서프레디로 입성할 수도 있지만 클로드에게는 시간 낭비였다. 그는 환영술사였으니까.
“그러니까 여섯 번째 길 안에 있는 워츠 연구소의 조수, 칼 어펜츠 씨라고요.”
“예. 분명 신분패도 보여 드린 거로 기억하는데요.”
클로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일레이는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았다.
‘너무 사람이 좋아 보이는 걸.’
클로드는 현재 환영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위장한 상태였다. 아주 얇게 뽑아낸 환영을 자신의 위에 덮어씌우는 것으로 엄청난 집중력과 정교함이 요구되는 능력이었다.
그 덕분에 클로드는 지금 풍채 좋은 50대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더해 평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 항상 웃는 듯한 눈에 듣기 좋은 목소리까지.
어딜 보나 저 사람 참 성격이 좋겠네, 하는 감탄이 나오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눈치 없는 일레이에게 그런 외적인 매력은 통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간단하게 풀린다고? 흠.’
그는 오로지 사실만을 따졌다. 여섯 번째 길에서 사라진 상관, 여태껏 아무런 소식 하나 없던 시간, 그러다 갑자기 그의 편지와 펜던트를 가지고 나타난 사내.
상황이 너무 순조롭게 풀려 간다는 게 일레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디하트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갈색 머리 여인을 따라 여섯 번째 길로 발을 들여놓고 그대로 사라진 거였으니까.
‘그 여자가 공작님을 붙들어 놓고 같은 편을 보내 날 속이려는 거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클로드는 억울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일레이에게 붙잡혀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웃고 있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좀 전과는 다른 기세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가장 의심스럽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절 붙잡고 늘어지실 생각이십니까. 가져온 편지의 필체도 공작님의 것이 맞다고 확인하신 거로 아는데요.”
“…….”
“공작님께서 친히 펜던트까지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일레이 경께서는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
클로드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일레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편지는 디하트의 친필이 맞았고, 펜던트 또한 자신이 보았던 것이 확실했다.
“끙…….”
일레이는 콧잔등을 찌푸리더니 결국 탁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지금 당장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곤란하군요. 지금껏 지체한 시간만 해도…….”
“길 앞까지 마차를 태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공작님께 현재 상황에 대해 알려 드릴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일레이가 냉랭한 어조로 말하더니 펜을 집어 들었다. 클로드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쓸 심산인 듯싶었다.
“다음번은 언제입니까?”
“…서프레디로 내려오는 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음 주나 되어야 할 겁니다.”
“그건 너무 늦어요. 사흘에 한 번으로 합시다.”
일레이가 제멋대로 약속을 정하며 편지를 휘갈겨 썼다. 쓰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종이의 절반이 채워졌다.
한편,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자주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연구소에도 사정이라는 게 있고…….”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죠, 칼 씨. 그리고 한낱 연구소의 사정보다는 북부의 사정이 더 중요하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아는 일이고요.”
일레이가 편지를 쓰다 말고 눈을 치켜들어 클로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회갈색 눈이 차가운 빛을 품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한껏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에 클로드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사흘이나 걸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
“편지를 받자마자 뛰어내려 오시려는 걸 말리지나 말아요.”
일레이의 날카로운 경고에 클로드는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레이는 그대로 다섯 장의 편지를 모두 채우고 봉투에 넣어 밀랍으로 봉했다.
“그럼 다음번에 뵙는 일은 없도록 하죠, 칼 어펜츠 씨.”
“…일주일 뒤에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일레이와 클로드 모두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제 말만 쏘아붙이고선 등을 돌렸다. 잠시 뒤, 클로드가 여관 문을 나서자 일레이가 창가에 나타났다.
“뒤를 쫓을까?”
방 안에 함께 있던 동료 기사, 헨킷이 물었다. 일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한 번은 속아 넘어갔다는 느낌을 줄 필요가 있어. 오늘은 내버려 두자.”
“쯧. 너는 너무 조심성이 많아, 일레이.”
헨킷이 혀를 차며 돌아갔다. 일레이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 일이 아니기에 일레이는 무시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멀어져 가는 클로드의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힐렌드 홀의 주인이 사라진 지 2주, 드디어 그가 무사하다는 연락을 보내온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