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0)화(60/171)
세벨리아는 자연스러운 환영을 만들어 내기에 앞서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병. 그게 세벨리아를 이곳에 묶어 놓고 있는 족쇄였다.
‘어떻게 할까.’
세벨리아는 고민했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연구소에 온 뒤로는 한 번도 피를 쏟지 않았고, 몸이 굳어지는 경우도 없었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퇴원한 뒤 가끔씩 연구소에 들르거나 멀리서 약을 배달받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녀는 가능하면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고 싶었다. 제 상황이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그로 인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어리석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진료 때 워츠가 무슨 고민이 있냐며 먼저 물어봐 주었을 때, 세벨리아는 내심 기뻤다.
“요즘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참견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번에 쓰러졌던 게 스트레스 때문인지 알아 둬야 해서요.”
“아…….”
세벨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생각해 보니 제 의견이 워츠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워츠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태세였다.
세벨리아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사실 두고 온 가족이 있어서요. 이곳으로 온다는 말 없이 떠나왔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통원치료가 가능할까, 하고…….”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워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연구소를 떠나고 싶은가 보군.’
마을에 세워진 병원도 아니고 산속에 고립된 연구소다 보니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워츠는 여기서 그녀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매번 이야기해 드렸듯 환자분의 의지가 강하다면 장소는 중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병은 환자분의 사정을 기다려 주지 않죠.”
워츠는 등을 돌려 책장을 뒤지더니 그녀 앞에 두꺼운 파일 하나를 내려놓았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가득 꽂힌 파일은 제법 오래되어 보였다.
“제가 의원이 된 초창기에 진료한 환자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연구소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 때인데… 그때도 이 중 삼 분의 일이 치료 도중 떠났죠.”
“네?”
영문 모를 눈으로 파일을 바라보던 세벨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놀라움에 커진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워츠가 말을 이었다.
“차도가 보이기 시작하니 병이 이전처럼 무섭지 않아진 것 같더군요. 이제 몸도 괜찮은 것 같고 치료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괜히 붙잡고 있다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삶에 닥쳤던 불안이 해소되어 가는 걸 느낀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전의 태도로 돌아간다. 병에 걸리기 이전, 게으르고 안주하며,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은 괜찮을 거라는 낙관주의 생활로.
동시에 그들은 더 쉽게 병이 치료되길 바라고, 단기간 내에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좋아지기를 바라란다. 그리고 치료를 가능케 했던 강건한 의지는 사라진다.
“더 빨리 치료할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 해 주지 않느냐는 말도 들어 봤죠.”
“그런…….”
세벨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녀는 파일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림잡아도 백 개가 넘어 보이는 서류를 바라보며 세벨리아는 말을 잃었다. 이 중 삼 분의 일이 완치 전에 떠나다니. 워츠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제게 왔습니다. 말만 통원치료지, 사실 그들의 의지에 맡겨야만 했으니까요. 그리고 돌아온 환자들은 이미 치료의 적기를 놓친 뒤였습니다.”
“…….”
“벨라 양, 섣부른 말일 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저는 당신이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랍니다.”
워츠의 고동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무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의원으로서 자신이 맡은 환자의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눈이었다.
“……알겠어요.”
그 눈앞에서 세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눈동자를 보며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래, 살아야지.’
불안함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었다. 자유든 고통이든 살아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인데.
‘디하트로부터 멀어지고 싶다고 내 목숨을 거는 바보 같은 짓을 하려 했다니.’
만일 치료 속도를 높일 수 없다면 멀리서 약을 받을 수는 없나 물어보려 했었다. 그 순간 제게 중요한 건 디하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워츠의 말을 듣고 그녀는 제 시야를 좁히고 있던 자그마한 틀이 깨지는 걸 느꼈다.
‘조급한 마음에 또 성급한 결정을 할 뻔했어.’
온실에서 마지막 희망을 떠나보낸 뒤, 아무 계획 없이 힐렌드 홀을 떠나려던 그때처럼 말이야.
“하아…….”
세벨리아는 지하연구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며 자신이 아직도 미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큰 교훈을 얻어 놓고도 옛날 버릇을 답습하려 하다니.
‘역시 사람은 무의식중에 자꾸만 편한 길을 찾으려고 하는구나.’
고달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버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순간의 고통 때문에 대책 없이 도망치는 게 그때에는 좋아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데니사가 날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아무도 모르는 산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겠지.”
쓴웃음이 입가에 드리워졌다. 감히 도망쳐서 가문의 명예에 먹칠했다며 평생을 가둬 뒀을지도. 아버지에게 품기에는 너무 삭막한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괘념치 않았다. 아버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림자 진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고개 돌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디하트가 기억을 되찾든 아니든 상관없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고난이 내게 손을 뻗으면 그걸 뿌리칠 방법을 찾으면 돼. 그뿐이야.
“벨라, 너는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야.”
그러니 나 자신을 믿자.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세벨리아는 거실에 걸린 거울을 보며 용기를 북돋듯 씩 웃어 보였다. 반짝거리는 눈과 환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다.
“냐악.”
마야가 거실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하품을 내쉬었다. 세벨리아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현실에 주눅 들지 않고, 조급함에 스스로를 망치지도 않으며, 두려움에 겁먹어 자신의 의견도 피력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디하트는 그 점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세벨리아는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디하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 좋은 아침이에요.”
디하트는 낯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이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디하트는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달싹였다. 겨우 다시 제게 마음을 연 듯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함에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피는 순간, 세벨리아가 말했다.
“어제 워츠 씨에게 한 소리 들었어요.”
“예?”
“시간이 지날수록 치료가 더뎌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조급해졌거든요.”
디하트가 뜻밖이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속내를 터놓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줄 몰랐어요.”
“제가 고민하는 게 밖으로 보이는 타입은 아니죠. 하여튼…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 혼났어요.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완치가 중요한 건데 어느새 그걸 잊고 있었다고요.”
디하트가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세벨리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이 나는 내 고통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자괴감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쳤다. 스스로가 볼품없어지는 느낌에 눈물을 흘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디하트는 그대로 제 심장을 뜯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디하트 씨는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을 버텨 내고 계세요?”
“저는…….”
그가 당황스러움에 입을 달싹였다.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벨리아는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두렵고 혼란스러워요. 완치라는 것에 약속은 없으니까요. 언젠가 그날이 오겠지 하며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죠.”
“…….”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억을 잃은 것도 병과 같다고 느껴졌어요.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고, 그전까지는 막연히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죠.”
디하트는 제 심장이 천천히 느려짐을 느꼈다. 한순간의 기쁨에 빠르게 흐르던 혈류가 잠잠해지고,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진지한 얼굴이,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가 본 디하트 씨는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어요. 항상 절 챙겨 주시고, 배려해 주셨죠. 그래서 늘 궁금했어요.”
디하트는 그 순간 제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심장을 찌르고 숨결을 얼어붙게 했다.
“혹시 디하트 씨는 지금에 만족해 과거를 굳이 찾지 않으시려는 건가요?”
“그게. 저는, 그러니까.”
그대로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았다. 죄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언제나 도망쳐 온 현실이 갑자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었다.
“제 질문이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항상 궁금했어요. 저와 달리 디하트 씨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의 앞에 자리한 건 다름 아닌 세벨리아니까.
‘당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어.’
그럼 이렇게 끝인가?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나면 이제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텐데. 당신은 날 떠나고 싶어 했고,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생각하니까.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는 디하트가 아닌 나를, 증오스럽고 미운 남편일 뿐인 나를, 당신은 다시 버리고 떠날 텐데.
“저는…….”
그는 무엇이든 말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혀는 꼬이고, 숨은 가빠 왔으며 눈은 미친 듯이 시큰거렸다. 혈색 좋은 얼굴이 순식간에 시체처럼 창백해지는 걸 보며 세벨리아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디하트가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