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1)화(61/171)
“디하트 씨, 지금 이게 뭐 하시는…….”
“미안해요.”
디하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에게 결정권 따위는 없었다.
그는 그저 세벨리아의 선택에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조금이라도 늦게 맞이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뿐. 디하트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곳이 없어진 지금에서야 그는 눈앞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미안해, 세벨리아.”
괴로움에 갈라진 목소리는 헐떡이는 숨소리에 먹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달라진 어조와 필사적인 태도, 그리고 끝내 불리고 만 자신의 본명.
세벨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빙벽처럼 얼어붙었다.
“당신.”
전부 다 기억하고 있구나.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그녀의 말에 디하트는 물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당신의 질문에 답할 자격이 없어. 나는 과거를 잊은 적도, 현실에 만족하며 새로운 미래를 그린 적도 없으니까.”
“…….”
“단 한순간도 디하트 인버네스가 아닌 순간이 없었으니까.”
일그러진 금빛 눈동자가 세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푸른 눈과 절절하게 끓는 금빛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벨리아는 원치 않은 전율을 느꼈다.
온몸을 오싹 소름 돋게 하고 심장을 떨리게 하는 그 고약한 감정은 바로 희열이었다.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세벨리아는 이성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디하트의 갑작스러운 고해 때문일까. 그녀는 제 마음에 격렬한 풍랑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속였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건 아니야.’
어차피 그에게 별다른 기대를 한 적도 없었다. 기억상실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은 자신대로 해야 할 일을 하자고 다짐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자꾸만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 이성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청년이 아닌 디하트 인버네스. 자신을 홀대하고 경멸하며 무시한 남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점차 벨라가 아닌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되어 가는 걸 느꼈다. 그 시절의 감정, 원망, 분노가 회오리치며 그녀의 가슴을 불태웠다.
“하.”
‘이래서야. 이래서 그가 기억을 찾기 전에 떠나려 한 거라고.’
세벨리아는 두 눈을 감고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떨리는 숨을 삼키기 위해, 당장이라도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디하트에게는 억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세벨리아의 차갑고 푸른 눈이 다시 열렸다. 겨울 바다처럼 차갑고 냉혹한 눈이 디하트를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그가 신음했다.
“세벨리아…….”
“아뇨, 아니에요. 절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 동안 날 기만하고 속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기만이라니, 그게 아니야. 나는.”
“당신과 달리 나는 단 한순간도 세벨리아 인버네스인 적 없었어.”
불행하고 불우하며 불쌍한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만이 가득한 벨라. 그게 그녀가 선택한 정체성이었다.
“그러니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당신이 찾는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도, 당신 곁으로 갈 수도 없으니까.”
서릿발처럼 매서운 말이 쏟아져 내렸다. 그에 디하트의 평정은 완전히 무너졌다.
“세벨리아! 아니, 벨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불러 주지. 그러니 제발 당신이 죽었다는 말만은 하지 마.”
내게 당신이 죽었다는 그 말만은 하지 말아 줘.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려 했다. 그녀에게 매달려 애원할 뻔했다. 그러나 세벨리아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제 옷자락으로부터 떼어 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
디하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푸른 눈 위로 미끄러지듯 비켜 나가는 제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제 호소가 결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억울하다며 외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가 참담한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세벨리아가 몸을 바로 세웠다. 디하트의 텅 빈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분명히 말씀드렸지요, 디하트 씨. 나를 벨라라고 부르라고.”
담담한 목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떨어져 내렸다. 디하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처음부터 내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였군.’
더 이상 도망칠 길 없는 디하트는 심장을 가시로 찌르는 고통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진실로 세벨리아 인버네스라는 삶을 버리길 원했다. 그녀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해서. 그래, 자신마저도.
그가 고개를 떨군 채 속삭이듯 읊조렸다.
“다시는 당신을 세벨리아라고 부를 수 없는 건가?”
“그래요.”
“이렇게 무릎을 꿇는다 하여도?”
“당신이 내게 목숨을 바친다고 해도.”
물기에 반질거리던 금빛 눈동자가 조금씩 메말라 갔다. 금방이라도 말라비틀어질 것처럼 퍽퍽해진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강렬한 충동이 세벨리아의 가슴을 울렸다. 그녀가 살짝 상체를 숙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디하트, 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람에게 너그러워요.”
덜컥,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가 떨리는 눈으로 세벨리아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지난날 자신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람에게 관대하지.]그게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처음 만나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리고 난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 믿고 싶군.]“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디하트 씨.”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부인.]마지막 말을 그의 귓가에 불어넣은 세벨리아는 디하트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아.”
세벨리아는 자신이 결국 감정에 패배했다는 걸 인정했다.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자신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두 손 놓고 방관했다. 다짐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패배감보다는 짙은 만족감이 가슴 속을 가득 메웠다.
오래도록 남아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 * *
클로드는 그날 저녁 연구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번에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다. 한쪽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했다. 당연히 전자는 디하트였고 후자는 세벨리아였다.
“쯧.”
클로드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 풀죽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있는 디하트를 방으로 불렀다. 그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침대에 툭 걸터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대강 알 것 같다.”
“…….”
“기억상실이 아니라는 걸 들켰구나.”
“정확히 말하자면 들킨 건 아니야. 그녀가 갑자기 내게 과거를 아예 잊기로 한 거냐고 물어보더군. 그래서 이 이상 거짓말을 이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
디하트가 텅 빈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과거를 잊을 거라고 말하면 나는 그녀가 선택한 벨라로서의 삶을 긍정하는 거고, 아니라 한다면 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그리고 그건 세벨리아에게 위협처럼 느껴질 거야. 결국 어느 쪽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솔직하게 용서를 비는 수밖에.”
하지만 용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벨리아 본인이 용서의 주체가 되기를 거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꼴이 되었네.”
결국 이 자리에 남은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 용서를 구하는 바보 같은 남자 한 명이었다. 디하트가 벽에 뒷머리를 기대며 작게 읊조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어.”
혀를 찬 클로드가 가방에서 일레이의 편지를 꺼냈다. 조카의 실연은 보기에 참 안쓰럽고 딱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세벨리아에게 버림받은 남자였으나 동시에 인버네스 공작이었다.
“같은 남자로서는 딱하게 느껴지지만, 인버네스의 일원으로서는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구나. 언제까지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천장을 바라보던 두 눈이 느리게 내려와 클로드를 응시했다. 짐승의 것처럼 섬뜩한 금안에 불꽃 같은 감정이 넘실거렸다.
클로드가 일레이의 편지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리도 바라던 답을 얻었으니 이제 네 본연의 의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조카야. 일레이 경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왔어. 그리고 요 며칠간 발간된 신문들도 가져왔다. 잘 살피고 깨달아, 네가 네 의무를 내팽개쳤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디하트는 강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느릿하게 편지를 잡아 뜯었다. 무참히 뜯긴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두툼한 편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부디 이 편지가 공작님께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그렇게 시작한 편지는 클로드를 의심하면서도 그를 믿을 수밖에 없어 어렵사리 꺼내 놓은 비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태양처럼 선명하고 광막한 눈동자 위로 분노가 일었다.
“하.”
림스 후작이 그의 영역을 더럽혔다. 그 오만한 늙은이는 힐렌드 홀의 주인이 것마냥 휘저어 대는 거로도 모자라 주변 귀족들을 포섭하여 그렌과 라쉬가 억울하게 붙잡혀 있다며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그렌과 라쉬는 선량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되어 당당하게 힐렌드 홀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감히.”
편지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디하트의 손이 클로드를 향해 뻗어 나갔다. 클로드는 지체하지 않고 그에게 신문들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것들도 하나같이 일레이의 편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되겠지.”
“…그래.”
“그럼 돌아가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인버네스 공작.”
클로드는 그에게 세벨리아에 대한 일은 가슴에 묻고 책무를 다하는 삶으로 돌아가라고 한 말이었다. 디하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래서 클로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디하트가 그의 말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