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3)화(63/171)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속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그가 인버네스 가문의 일원임은 인정했으나 자신이 디하트의 막내 숙부임을 밝히지는 않았다.
클로드는 가계도에서 이름이 지워진 이후 인버네스에서 완전히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존재한다는 걸 설명하려면 디하트의 부모가 죽은 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그리고 클로드는 세벨리아가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힐렌드 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례까지 치른 사람이야.’
인버네스가 증오스러워 도망친 이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아 봤자였다. 그는 대신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선대 공작 길런드 님의 숙부인 바이렌 백작님의 아들입니다. 가계도에 오르지 못한 사생아지만 어릴 적부터 디하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죠.”
“아, 그래서.”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라면 디하트가 아플 때 그가 그리도 이성을 잃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세벨리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프레디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에 관해서는 아마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겁니다.”
“네? 설마.”
“디하트는 이미 그들에게 당신을 찾지 말라고 말해 뒀어요. 그러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클로드가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가슴 위로 내려앉는 안도의 감정에 세벨리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혹시 서프레디로 내려가실 생각이셨던 겁니까?”
“…….”
세벨리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가 다시 한번 탄식했다. 이 부부는, 아니. 이제는 부부가 아니지만. 하여튼 이 두 사람은 정말 다른 의미로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혼자서 숲을 지나 산을 내려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셔야 합니다, 벨라 양.”
“저도 무턱대고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게다가 완치되기 전까지는 내려가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고요.”
세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클로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어차피 끝난 일이니까요. 그래서 언제 서프레디로 내려가실 생각인가요?”
사실 클로드는 그녀가 서프레디로 내려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디하트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만 노려봐. 들키겠다, 이 자식아.’
그는 커튼 틈새로 아련하게 세벨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는 디하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가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편국에 들릴 생각이시라고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서프레디에 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럼 이틀 뒤 점심에 같이 내려가도록 하죠.”
세벨리아가 감사 인사를 하고 저장고에 들어가기 위해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디하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이고…….”
길런드의 모습을 닮아 간다고 한 건 취소였다. 클로드는 혀를 차며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세벨리아가 뒷문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디하트는 소리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벨라.”
세벨리아가 아닌 벨라라 부르는 디하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림자 아래 가려진 금색 눈동자에 희미한 슬픔이 맺혔다 사라졌다.
세벨리아를 보지 못한 지 오늘로 닷새. 그녀의 추측과 달리 그는 세벨리아에 대한 미련을 접기 위해 이곳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니었다.
디하트는 그녀를 위해, 벨라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녀가 스스로의 미래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군.”
그가 쓴웃음을 삼키며 펜을 집어 들었다. 지금껏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로 그녀의 곁을 맴돌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한낱 죄인일 따름인데,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녀의 곁을 차지하려 했는지.
그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 데에는 분명 세벨리아의 마지막 말도 있지만 일레이와 클로드를 통해 전해 들은 힐렌드 홀의 사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두 잊더라도 나는 잊지 않아.’
그렌과 라쉬, 그리고 플로라. 자신 다음으로 세벨리아를 상처입히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인들. 그들이 피해자가 되어 힐렌드 홀을 제멋대로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니. 허튼 생각하지마, 디하트.’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감상에 빠지는 게 아니야. 네게 그런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디하트는 이를 악물었다.
* * *
서프레디로 내려가는 날이 되었다. 세벨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갑과 편지를 챙기고 거실에서 클로드를 기다렸다. 그는 워츠한테 받아야 할 게 있다면서 연구실에 내려가 있는 참이었다.
“안 돼, 이리 와!”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야가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왔다. 어찌나 빠르던지 세벨리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믁!”
이상한 소리를 자랑스럽게 외친 마야는 순식간에 그녀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계단참에 서 있는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
“…….”
침묵보다 깊은 정적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자리에서 그저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의 상대를 눈에 가득 담았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클로드가 지하연구실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먹먹한 눈으로 세벨리아를 바라보던 디하트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그럼, 이만…….”
그는 제가 말을 해 놓고도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바로 계단 위로 사라져 버렸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마야를 바라봤다.
“…이 말썽쟁이야.”
흐릿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마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응, 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야가 물고 있던 걸 퉤 뱉더니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다.
마야의 침이 잔뜩 묻은 무언가가 툭 하고 소파 밑으로 떨어졌다. 세벨리아가 무심코 그걸 주워 드는 찰나, 클로드가 그녀를 불렀다.
“벨라 양, 출발합시다.”
“아, 네.”
세벨리아는 무심코 주워 든 물건을 슥슥 손수건으로 닦으며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제야 마야가 가져온 물건이 낯익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깐, 이거.’
세벨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반짝이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푸른 보석이 박힌 은 십자가. 그건 그녀가 디하트에게 주었던 생일 선물이었다.
‘당신이 왜 이걸 가지고 있는 거야.’
“벨라 양, 갑시다!”
클로드가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세벨리아는 십자가를 다급히 주머니에 넣고 그를 따랐다. 현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디하트가 있던 곳을 스쳤다.
* * *
안전지역을 넘어 악몽의 숲이 펼쳐지는 곳까지 다다른 클로드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우뚝 선 그 때문에 뒤따라 걷던 세벨리아 또한 걸음을 멈췄다.
“클로드 씨?”
“아, 음. 잠시만요.”
클로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난색을 표했다. 매번 혼자서 마을을 오갔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구소를 벗어날 때마다 환영으로 얼굴을 위장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세벨리아가 함께 있었다.
‘이를 어쩐다.’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침음을 흘렸다. 미리 생각해 둬야 했었는데 워낙 챙겨야 할 일이 많다 보니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혀를 차던 그가 뒤를 돌았다.
“벨라 양.”
“네.”
세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가 이전과 달리 사뭇 진지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라 세벨리아는 조금 긴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그녀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벨라 양,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사실 안 좋은 의미로 저를 쫓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내려가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클로드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걸 선택했다. 뻔뻔한 선택이라 해도 할 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여태껏 지켜본 세벨리아는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는 세벨리아를 자리에 두고 두꺼운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잠시 뒤,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건 클로드가 아닌 웬 중년의 남성이었다.
놀란 세벨리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클로드 씨?”
“저 맞습니다.”
클로드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한 건지 목소리도 바뀌어 있었다.
“마법사이신 줄 몰랐어요.”
“음, 뭐…. 굳이 떠벌릴 일은 아니니까요.”
사실 마법이 아니라 환영술이지만 클로드는 애매하게 말을 넘겼다. 이제 와서 자신도 그녀와 같은 환영술사라고 고백하는 쪽이 이상했으니까.
‘게다가 연구소를 떠나면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세벨리아는 아마 병이 완치되는 대로 연구소를 떠날 것이다. 디하트와의 관계도 마무리된 것 같으니 더 이상 그녀를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적당한 마무리야.’
클로드는 세벨리아가 떨어트린 가방을 챙기고서 다시 앞장섰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길을 비췄다.
세벨리아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다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혹시 그래서 저번에 제가 클로드 씨의 이름을 불렀을 때 당황하신 거였나요?”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계단에서 급히 내려와서 쓰러지실 뻔했던 때요. 방으로 부축해 드린 뒤에 제가 카디가 아닌 클로드 씨라고 부르니 놀라셨잖아요.”
“아…….”
그때를 떠올리며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 양의 추측이 맞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절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어서요. 조심하기 위해 본명은 숨기며 생활하고 있죠.”
“그렇군요. 죄송해요, 놀라셨겠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참 신기하네요. 저희 둘 다 서로 이름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되니까요.”
‘정말 신기한 건 당신과 나 둘 다 사생아 출신의 환영술사라는 거지만 말입니다.’
클로드가 진실을 삼키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세벨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빛 한 줌 없는 숲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