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7)화(67/171)
세벨리아가 문을 열었을 때 디하트는 준비를 모두 마친 뒤 떠나려던 참이었다.
“여긴 어떻게.”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죄책감이 보였다. 세벨리아는 문을 가로막고 그를 마주했다. 금빛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세벨, 아니. 벨라.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곤란해.”
“뭐가 곤란하다는 거죠?”
세벨리아가 따라 들어오려는 클로드를 막고 문을 잠갔다.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지 디하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세벨리아가 그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클로드 씨에게서 당신이 지금 뭘 하러 어디에 가는지 다 들었어요.”
디하트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감정이 스쳐 지났다. 세벨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만둬요, 디하트. 이건 불행한 사고였을 뿐. 당신이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질 필요 없어요.”
“뭐?”
“이번 일로 내게 죄책감이나 책임감 같은 걸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값을 치른 약재들은 어쩔 수 없지만… 유리눈꽃은 제가 따로 약초꾼을 구할 테니 이쯤에서 그만뒀으면 해요.”
디하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세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말라고.”
사정없이 흔들리는 금색 눈동자 위로 실금이 그어졌다. 차갑게 얼어붙었다 깨진 금속처럼 날카로운 파편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디하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 자식이 날 찾겠답시고 이곳까지 따라와 모든 걸 망쳤어. 나 때문에 당신은 살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린 거라고.”
“……화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에요. 그리고 아마도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그 대가를 치렀겠죠. 제가 틀렸나요?”
“겨우 그런 거로 만회할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
디하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진 그가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디하트!”
“난 당신이 죽는 꼴을 다시 볼 수 없어!”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듯 끔찍한 목소리였다. 세벨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 디하트가 울듯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욱더 용납할 수 없어.”
“당신…….”
세벨리아는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감정을 추스른 디하트가 그녀를 붙들며 부탁하듯 말했다.
“제발 내 책임이 아니라는 소리만 하지 말아 줘.”
“디하트. 잠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요.”
세벨리아가 자신을 지나치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디하트는 슬픈 눈빛으로 그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 순간, 세벨리아는 참고 참았던 분노가 확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는 거지?’
유리눈꽃이 없으면 제대로 된 치료 약을 만들 수 없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당장 그녀가 죽는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저 완치가 힘들어질 뿐, 꾸준히 병세를 늦추며 살아갈 수 있었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몰라도 유리눈꽃을 구하면 그때 처방 약을 만들어도 되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자신이 내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처럼 굴었다. 세벨리아는 그의 조급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목숨을 바친다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 다시는 당신을 세벨리아라고 부를 수 없을 거라고.”
“…….”
“그것 때문에 죽으러 가는 건 아니야. 당신에게 그런 부담을 줄 수는 없지. 단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을 뿐. 그러니 더는 신경 쓰지 마.”
그의 말대로 디하트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위험에 뛰어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전문약초꾼을 암암리에 모집했으며 안전장비 또한 제대로 챙겼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은 남아 있었다. 유리눈꽃이 자라는 지형이 워낙 험한 데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도착한다 해도 돌아오는 길이 몇십 배는 더 힘든 여정. 그게 바로 디하트가 가려는 곳이었다.
‘상관없어.’
하지만 디하트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자신 때문에 세벨리아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렸다. 완치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 걱정 없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는데.
자신으로 인해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디하트는 무거운 죄책감을,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신은 당신 건강을 챙기는 데만 집중해.”
세벨리아는 그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아니, 미처 느낄 새도 없었다.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격렬한 감정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그녀의 잇새로 뜨거운 숨과 함께 가시 돋친 말이 터져 나왔다.
“그래. 당신 부인도 아닌 내가 무슨 권리로 당신을 말리겠어. 가 버려, 디하트.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무모한 도전에 목숨을 내맡겨.”
“…….”
“당신이 그걸 당신의 책무로서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지. 뜻대로 해.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하길 바라.”
세벨리아가 어딘가 멍해 보이는 디하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건 나야, 당신이 아니라.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봐. 나는 내 마음대로 우울해하지도 못한 채 당신의 바보 같은 짓을 말리러 여기까지 와 있지. 이게 당신이 날 걱정하는 방식이야?”
디하트의 눈이 크게 뜨이며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도 화를 낼 줄 알았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당신이 걱정한 게 나인지, 아니면 나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미래의 당신인지!”
그는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를 꽉 깨물었다. 세벨리아는 표정 변화 없이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디하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세벨리아는 더 이상의 대화는 소용없다고 느꼈다.
“이젠 몰라. 당신 마음대로 해.”
세벨리아가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아주 작고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그녀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란 말이야. 디하트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세벨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떨리는 금색 눈동자 위로 물기가 어렸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순간 툭 하고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어리석고 아는 게 없어서 그랬어. 그러니 그렇게 화내지 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축축한 목소리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떨리는 눈동자 속에 후회와 절망, 간절함과 애원이 엉망진창으로 섞여 있었다.
“세벨리아…….”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가에서 흐른 눈물이 세벨리아의 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끔찍할 정도로 강렬하고 비참한 전율이었다. 세벨리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들바들 떨리는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피어올랐다.
숨이 멎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안 된다고. 그러나 신경을 파고드는 감각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이건 그가 제 앞에 무릎 꿇었을 때 느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겨우 잊으려 했던 그 감정이었다.
‘나는 결국…….’
당신이 이렇게 무너지기를 바랐나.
오만했던 이성은 마침내 감정에 패배했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장례까지 치르고 이 먼 곳까지 도망쳐 왔음에도 결국 세벨리아 인버네스라는 과거의 망령을 버릴 수 없었다.
짙은 패배감이 발밑에서부터 차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오싹한 전율이 몸을 감쌌다. 그건 죽어 버린 세벨리아를 갈구하며 신음하는 남자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원망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아.”
복잡한 감정이 담긴 탄식이 터졌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침음했다. 이래놓고 여태껏 고결한 척 과거를 모두 버릴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니!
결코 느끼고 싶지 않았던, 아니 자신의 안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깊은 원망과 증오. 그리고 후회하는 남자를 볼 때마다 느끼는 희열과 만족감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세벨리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세…벨라?”
디하트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세벨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존재가 제 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잠깐만.”
그녀가 손을 들어 디하트를 밀어냈다. 디하트는 힘없이 물러났다. 과거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뜨거운 감정이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올라왔다.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됐어.’
나 따위는 언제 사라져도 아쉽지 않은 것처럼 굴었잖아. 그래서 마음 놓고 당신을 떠날 수 있었는데. 당신은 절대 후회하지도, 바뀌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훌쩍 사라질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왜 나를 흔드는 거야. 왜 내가 몰랐던 내 안의 감정들을, 원망들을 일깨우는 거야.
세벨리아는 텅 빈 웃음을 흘렸다. 디하트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것처럼 머뭇거렸다. 고개를 든 세벨리아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디하트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세벨리아, 당신 지금.”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손수건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세벨리아는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언제나 저를 경멸하고 밀어내기 바빴던 남자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 눈물 한 방울에 어쩔 줄 모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기뻤다.
“아아…….”
이게 자신의 추악하고 비참한 본심이었다. 세벨리아는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볼 때마다 귓가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과거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괴로웠으면 한다고. 가슴에 멍이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일 밤을 한숨으로 지새웠으면 좋겠다고.
‘아니, 실은 그보다 더 몸부림쳤으면 좋겠다고…….’
세벨리아는 숨어 있던 원망이 터져 나오면서 함께 모습을 드러낸 속내에 어깨를 들썩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 걸 아는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끊어 내려 한들, 그녀는 세벨리아 인버네스였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상처받아 절망했던 비참한 공작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