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8)화(68/171)
“벨라.”
보다 못한 디하트가 그녀를 불렀다.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세벨리아는 그로부터 몸을 바싹 물렸다. 디하트는 숨을 삼켰다. 푸른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럼 이만.”
내던지는 듯한 작별인사와 함께 세벨리아는 말릴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도망쳐 버렸다. 디하트는 망연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조심스러운 음성이 그를 일깨웠다.
“디하트.”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클로드가 있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디하트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은 아냐.”
“…….”
“잠시 뒤에 와.”
문이 닫히고, 클로드는 침음했다. 그의 눈이 텅 빈 복도와 굳게 닫힌 문을 오갔다.
* * *
세벨리아의 냉정한 말에 디하트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에 얼룩져 있던 금빛 눈동자 위로 냉정한 빛이 서렸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내가 굳이 협곡 아래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하트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다시 볼 낯이, 아니. 그녀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생길 테니까.
“미쳐 버리니 판단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더군.”
디하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바로 디하트가 그렇게 조급해한 이유였다. 그는 은연중에 세벨리아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치료가 끝난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는 절대 북부 근처로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북부 바깥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어. 그녀가 내게 화를 내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차분하게 듣던 클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어.”
“그래. 늦지 않게 깨달은 게 천만다행이지.”
디하트가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벼린 칼처럼 냉정한 그의 낯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 * *
세벨리아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녀는 창문에 맺힌 달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하아.”
아직도 가슴 속이 파도치듯 울렁거렸다. 그녀는 창가 아래 데이베드에 반쯤 몸을 눕히고 창문을 열었다. 달빛과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감쌌다.
“이제 어쩌면 좋지.”
더 이상 그를 무감하게 대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원망이 깨어나 버린 이상 예전처럼 냉정하게 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세벨리아는 창턱에 팔을 얹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싸늘한 달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달칵. 어느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망연한 감정 속에 잠겨 있던 세벨리아는 느지막이 고개를 돌렸다.
“마야?”
어둠 속에서 형형한 녹색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벨리아가 손을 뻗자 토도돗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털 뭉치가 품으로 뛰어들었다.
“너 또 뭘 몰래 가져온 거야.”
어쩐지 울음소리를 내지 않더라니. 무언가를 입에 야무지게 물고 있었다. 클로드가 숨겨 놓은 장난감이나 워츠의 진료 도구일 가능성이 높았다.
세벨리아가 살살 힘을 줘 입에 문 것을 빼내려 하자 마야가 므응, 하고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벨리아는 목적한 바를 이뤘다.
“아, 마야.”
마야가 훔쳐 온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녀의 입가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침으로 범벅된 은 십자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세벨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목걸이를 닦았다. 목걸이에 박힌 푸른 보석이 달빛을 머금어 영롱한 빛을 흩뿌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억지로 묻어 두었던 생각이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당신은 설마 내가 목걸이를 선물해 준 이래, 줄곧 이걸 가지고 있었던 거야?’
지난번에는 보고도 못 본 척 무시할 수 있었다. 과거의 세벨리아와 지금의 벨라는 다른 사람이라며 완벽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어 놓은 경계선은 이미 희미해져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과거를 완벽하게 버릴 수 있다는 건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생각이었다.
“진작에 갖다 버린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다 내놓고, 왜 이걸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거야. 풀리지 않는 의문과 원망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꽈악. 세벨리아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사실 결혼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이 없어.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세벨리아는 뜨거운 숨을 삼키며 손을 폈다. 손바닥 안이 목걸이 모양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아스라한 달빛에 물들어 반짝이는 푸른 보석은 꼭 일렁이는 호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함께 뱃놀이를 하러 가자고 했던 호수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아득한 곳을 헤맸다.
* * *
세벨리아는 밤새 고민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뜨거운 홍차가 필요했다.
“어디 있지…….”
반쯤 감긴 눈으로 찬장을 뒤적이는데 복도 건너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벨리아는 아침 일찍 일어난 워츠가 거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은 파도에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모하게 굴지 않기로 했잖아.”
목소리는 클로드의 것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그의 날카로운 음성에 세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찬장 문을 닫고 벽에 몸을 기댔다.
“이 일의 어디가 무모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약속대로 협곡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이어서 디하트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그 음성은 어제 그녀가 들었던 것과 달리 너무도 차갑고 날카로웠다.
“시간이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 이런 사소한 일로 하나하나 붙잡고 늘어지지마, 클로드.”
세벨리아는 멍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클로드는 디하트가 협곡 근처에 지휘소를 차리고 그곳에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걸 말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과보호가 심한 줄 몰랐어. 걱정에 눈이 멀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가. 약초꾼들의 손에 돈과 장비를 맡기고 나는 산 아래에서 머저리처럼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라고?”
서늘한 음성이 거실을 울렸다.
디하트는 약초꾼들과 함께 직접 협곡으로 내려가는 대신 근처에 기지를 세우고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게 최선의 양보였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마저도 탐탁지 않아 했다.
“마법사나 주술사를 협곡 아래로 보낼 수 없으니,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나도 협곡에 있어야 해. 미치겠군,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
디하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심 세벨리아로 인해 흔들린 그의 고집을 완전히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과신이었다.
디하트는 세벨리아에게는 흔들릴지언정, 제게는 털끝만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고집과 신념을 꺾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세벨리아,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얹지마, 클로드. 날 화나게 만들어서 협곡 바닥으로 뛰어내리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알았다, 알았어.”
클로드가 두 손을 들며 항복선언을 외쳤다. 디하트가 살벌한 눈으로 그를 훑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뒤, 클로드가 뒷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협곡이 그 정도로 위험하구나.’
세벨리아는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되뇌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깊은 수심에 잠겼다.
* * *
저녁이 되어 디하트는 연구소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는 무의식중에 가슴팍을 더듬다가 지난날 마야가 제 목걸이를 다시 훔쳐 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일부러 가져가라고 보란 듯이 손에 쥐고 흔들었건만, 이제 와서 후회가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런 얄팍한 수에 다시 한번 기대려 들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군.’
디하트는 목걸이를 핑계로 다시 한번 세벨리아와 대면하려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뒤를 클로드가 따랐다. 그는 아직도 포기를 못 했는지, 제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예감이.”
“헛소리를…….”
아침부터 내내 되풀이되는 헛소리에 디하트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가 짜증을 내며 복도를 지나던 순간이었다. 디하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채 예감이 좋지 않다며 중얼거리던 클로드는 무슨 일인가 싶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세벨리아가 있었다.
“벨라 양.”
“지금 가시나요?”
클로드가 디하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디하트가 무슨 짓이냐며 눈을 치켜떴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더없이 고맙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이 녀석을 설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이 바보 같은 놈이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근처에서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전달받고 그때마다 필요한 걸 지원하기로 했어.”
디하트가 클로드의 말을 받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덜기 위해 무모한 일에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없을 거야.”
“…….”
“나는 이제 내 주제를 잘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