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6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69)화(69/171)
세벨리아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희미한 미소가 덧그려진 입술과 버들잎처럼 축 늘어진 속눈썹. 그리고 그 아래 짙은 슬픔에 잠겨 있는 금색의 눈을 차례차례 훑었다.
“주제라… 그런가요.”
담담하게 말한 세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디하트를 탓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에게 주제를 알라고 협박하기 위해 일부러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심지어 그게 자신의 약을 구하기 위하려다 생기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세벨리아는 아직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해묵은 원망을 풀고자 그에게 일부러 상처를 줘야 하나?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에게?
‘나는, 모르겠어.’
세벨리아에게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시간도, 경험도 모자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죄책감 때문이든, 자기만족을 위해서든 결국 그의 행동은 내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
그러니 자신을 위해 험한 길을 나서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세벨리아는 과거의 잘못을 들춰 디하트를 책망하는 대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감싼 듯 동그랗게 모인 두 손이 디하트 앞으로 내밀어졌다.
“받으세요.”
디하트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무언가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였다. 디하트는 놀라 숨을 삼켰다.
삣!
“이건.”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디하트의 손바닥 안에서 종종거리는 파란 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세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협곡 아래로 내려갈 약초꾼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데 어려움이 있으시다는 걸 얼핏 들었어요.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거예요.”
“…….”
“어제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니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말하는 세벨리아의 목소리에서 묘한 떨림이 묻어 나왔다. 디하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그는 혼절할 것 같은 정신을 다잡으며 푸른 새를 감싼 손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고, 고마워.”
“…….”
“하지만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깊은 협곡은 너무 힘겨운 곳일 거야.”
디하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은 새를 담아 갈 바구니를 찾기 위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세벨리아는 아차 싶었다. 파란 새가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것부터 설명해야 했는데.
“그거라면.”
세벨리아가 파란 새의 정체에 대해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 끼어들어도 될까?”
한 발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클로드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세벨리아의 말을 끊었다. 그는 대화에 끼어들면서도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드 씨?”
“미안, 정말 미안한데. 아. 내가 왜 이걸 미처 생각 못 했는지 모르겠어.”
이어지는 혼잣말에 세벨리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클로드는 머리를 싸매고 도리질 치다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희번득한 눈에 세벨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클로드가 디하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소식을 주고받는 거라면 이 애가 더 도움이 될 거야.”
화악-!
자그마한 빛이 그의 손바닥 아래서 움텄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팔랑, 하고 자그마한 불꽃을 흩뿌리며 날아오른 나비가 세 사람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날고 디하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잘 부탁드려요.]부드럽고 짙은 목소리가 곧장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세벨리아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충격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잠깐, 설마?’
그녀의 의심을 지우기라도 하듯, 붉은 나비가 날개를 팔랑이며 디하트의 손 위로 내려앉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클로드 님의 환영마인 알로스라고 해요.]* * *
놀랄 겨를도 없었다.
“하.”
막힌 숨을 터트림과 동시에 세벨리아는 지끈거리는 눈을 손으로 눌렀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 클로드가 한 건 분명 환영술이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환영마라니, 그게 뭐지? 마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다니. 이런 게 가능한 일이었나? 잠깐, 그렇다면.’
세벨리아는 파란 새를 내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설마 자아를 가진 환영을 환영마라고 부르는 건가. 커다란 망치가 머리를 강타한 것처럼 멍했다. 세벨리아는 뻣뻣해진 혀를 움직여 겨우 말을 꺼냈다.
“클로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읽은 클로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설명은 이따 해 줄게요. 디하트, 시간이 없으니 일단 가. 연락을 주고받는 건 알로스가 알아서 해 줄 거야.”
아직도 충격에 빠져 있는 세벨리아를 두고 클로드가 디하트의 등을 밀었다.
“잠시만…….”
“이럴 시간 없어!”
디하트는 세벨리아가 걱정되었는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세벨리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대신 파란 새를 소중하게 껴안고 숲으로 발을 디뎠다.
* * *
디하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협곡으로 향하는 동안, 북부의 힐렌드 홀에서는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일러스는 네이튼과 함께 서관에서 플로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그녀가 힐렌드 홀의 이곳저곳을 소개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실은 딱 한 군데만 가면 되지만 말이지.’
사일러스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고 바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북부인들의 입맛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비스킷을 집어 입가심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라가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우시군요, 플로라 영애.”
“역시 북부의 꽃이라 불리실만합니다.”
“아침부터 이렇게 칭찬 일색이라니, 이러다 교만해질까 두렵네요.”
플로라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동자는 당연하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럼 가시죠.”
“후후, 오늘 이 힐렌드 홀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제대로 알게 되실 거예요.”
플로라가 뻐기듯 말하며 하녀를 향해 턱짓했다. 양산을 든 하녀가 바로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곧 세 사람은 플로라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저택을 나섰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플로라는 개의치 않았다. 눈엣가시인 세벨리아가 죽고 부모님이 풀려날 날이 머지않은 지금, 그녀에게 두 사람은 그저 중앙의 유서 깊은 귀족일 뿐이었다.
‘인버네스를 위해서라도 예우에 걸맞게 대접해야지. 도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람?’
게다가 웨든 후작은 ‘자신은 라쉬 경과 관련한 불순한 소문 따위는 믿지 않는다.’며, 미욱한 자식 때문에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의미로 커다란 루비가 박힌 팔찌까지 제게 바쳤다.
‘흐흥.’
팔찌를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플로라는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남자를 이끌었다.
“별채까지는 모두 가 보셨을 거예요. 오늘은 제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을 데려가 드리죠.”
“힐렌드 홀의 사냥터가 황실과 견줄 정도로 대단하다는 소리는 몇 번 들었습니다만.”
“어머, 그런 황량하기만 한 땅과는 견줄 수가 없죠.”
두 남자는 플로라의 허영심을 한껏 만족시켜 주며 힐렌드 홀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일러스가 그토록 고대하던 인버네스의 묘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이군요.”
“그러고 보니 머무르시는 곳에서 묘역이 내려다보였죠, 참. 할아버님도 왜 그런 곳을 손님들에게 내주신 건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림스 후작님께 감사한걸요. 대대로 인버네스의 가주들은 강대한 힘으로 제국을 지켜 오지 않았습니까.”
사일러스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더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도 강력한 힘을 가진 전설적인 분들의 마지막을 사람들이 가까이서 접하고 존경심을 품어야 마땅한데 말입니다.”
“세상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있으신 줄 몰랐어요.”
플로라가 눈을 크게 뜨며 사일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뺨이 자긍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플로라는 잘됐다는 듯 묘역을 향해 걸으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좋아요. 마침 잘됐네요. 웨든 후작님께서 선대 공작님들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 그 깊은 뜻에 감동할 거예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없이 기쁠 따름이지요. 가능하면 이곳에 머무르는 내내 기도를 올리고 싶습니다.”
“안 될 거야 없죠!”
플로라가 발랄한 음성으로 허락했다. 그 순간, 사일러스의 입가에 뱀처럼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북부의 축축하고 더러운 흙을 퍼내고 그 무거운 관 뚜껑을 열어젖힐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슬슬 도망친 딸을 잡아 볼까.’
머릿속으로 유명 신문사의 이름을 하나둘 떠올리는 사일러스의 푸른 눈이 즐거움에 물들었다.
* * *
“먉.”
귀여운 울음소리가 싸늘한 침묵을 깨트렸다. 세벨리아는 발목에 몸을 비비는 마야를 품에 안으며 클로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디하트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잔잔하게 떨리던 푸른 눈동자는 빙하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
클로드는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세벨리아로부터 압박감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알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연구소를 떠날 때까지 알릴 생각이 없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클로드는 디하트를 배웅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세벨리아의 시선을 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현관문을 닫으며 안쪽을 손짓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
“처음부터 다 이야기해 줄게요.”
세벨리아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경계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벨리아와 달리 자신은 그녀가 환영술을 쓰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으니까.
‘지금쯤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클로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 그는 맞은편에 앉은 세벨리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숨기고 있던 걸 전부 털어놓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