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화(7/171)
플로라가 들이닥친 건 세벨리아가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을 시점이었다.
“이봐, 웨든 가의 여자.”
붉은 머리의 플로라는 예고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갑자기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집사장의 말이 정말이었군.”
나직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리더니 거친 손길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하!”
그녀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구절이 들어왔다.
‘지참금으로 가져온 사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금고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세벨리아는 갑작스러운 침입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플로라, 이게 무슨 짓이죠?”
그러나 플로라는 세벨리아의 면전에서 편지지를 흔들어 대며 그녀를 비꼴 뿐이었다.
“오, 세벨리아. 중앙이 보낸 우리의 귀중한 첩자님.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우리 재산을 탕진할 생각이신가?”
“그만두고 편지는 이리 주세요.”
“어머 이제 와서 가책을 느끼나 보죠. 아니면 지난번처럼 난민을 구제한답시고 설치다가 오라버니에게 혼날까 봐 무섭나?”
세벨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플로라가 말한 일은 중앙의 첩자로 몰렸던 일에 이어 두 번째로 디하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일이었다.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억지로 들춰졌다.
세벨리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과거 다른 귀부인들처럼 재해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려 했다. 재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도우면 북부와 디하트의 평판을 올릴 수 있다고, 그럼 그가 자신을 다시 봐줄 수 있을 거라고…….
플로라의 어머니인 그렌이 그녀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첩자라는 말을 믿지 않는단다. 너처럼 심약한 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니.] [힘든 건 알겠지만 네가 그 애의 편이 되어 줘야 해. 네가 한 일을 알게 되면 그 애도 네 진심을 깨닫게 되겠지.]그렌은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제 손을 붙잡으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란다.]아, 과거의 자신은 그 말에 얼마나 깊이 감동했는지.
그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그렌이 그녀의 결백을 믿어 준다는 소리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싶었는지.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외로움과 고독. 눈을 돌리면 어디서든 쏟아지는 경멸과 원망.
고립되어 있던 자신은 너무도 쉽게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알겠습니까!]제가 하려던 일을 알게 된 디하트는 화를 억누르며 짓씹듯 내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차가운 등, 보이지 않는 표정. 가시 돋친 목소리와 자신을 밀어내는 손.
세벨리아는 과거의 그 끔찍한 날이 반복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어리석게도, 다시 한번 배신당하고서야.
[나는 또…… 내가, 내가.]그렇게 속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그녀를 두고 그렌은 능란하게 책임을 회피했다.
[아가, 네가 너무 섣불렀나 보구나. 그러길래 여유를 가지지 그랬어. 웨든에서 그런 건 가르쳐 주지 않았니?]아, 결국 모든 건 자신이 한심해서였다.
그렇게 세벨리아는 공작부인으로서의 형식적인 업무마저 모두 빼앗겼다. 지참금이 있는 지하 금고에 다가갈 권리마저.
찌이익-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플로라의 손에 들린 편지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제발 이 이상 인버네스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요.”
“…….”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란 걸 잊었어? 오라버니 말 좀 들으라고.”
간곡한 목소리를 흉내 낸 플로라는 그대로 종이를 몇 번 더 찢었다.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난 편지는 먼지처럼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디하트의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그녀의 마음처럼.
“오라버니가 왜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겠어. 다 이런 때를 예상해 두고 한 말이겠지.”
플로라가 노래하듯 말하며 손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녀는 내심 이대로 세벨리아가 절망에 빠지기를 바랐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은 안쪽으로 더 내려앉지도, 우울감에 빠져 바스러지지도 않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황야처럼 건조하고 무심한 눈으로 플로라의 새하얀 손목을 응시하고 있을 뿐. 정확히 말하자면, 세벨리아는 플로라의 팔목에 걸린 팔찌를 보고 있었다.
‘저건 혹시.’
세벨리아는 자신을 한껏 비웃어대는 플로라의 말을 무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봐도 제가 본 게 정확했다.
‘저건 내가 결혼하며 가져온 물건이야.’
그녀의 푸른 눈이 서리가 내린 듯 차갑게 변했다. 플로라가 그녀의 지참금을 도둑질한 것이다.
* * *
머릿속이 복잡했다. 디하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활짝 열었다. 항구의 바닷바람이 들어와 집무실을 온통 휩쓸었다. 그러자 그의 뒤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돌리자 새장 안에서 날갯짓하는 금빛 깃털의 새가 보였다. 얼마 전, 시장을 거닐다 문득 눈에 띄어 구입해 버린 새였다.
[선물하실 겁니까?] [아니, 온실에 둘 거다.]라이언과의 대화를 회상한 디하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금은 저 새 외에도 신경 쓸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 이를테면 갑자기 죽어 버린 꼬리라던지, 아니면 집사에게서 방금 도착한 전보라던지.
“하…….”
집사의 연락을 떠올린 그의 속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마님이 이상행동을 보이셨습니다.]그는 세벨리아가 또다시 첩자질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급하게 전보를 보냈다. 더불어 지하 금고에는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디하트는 세벨리아가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럴 가능성조차 없지.’
그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창가에 몸을 기댔다. 세벨리아의 곁에서 모든 사람을 쳐내고 공작부인으로서의 권한을 거둬 간 게 바로 자신이다. 비록 그녀가 울며 비는 바람에 유모였다는 그 여자만은 내버려 둬야 했지만…….
“잠깐.”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머리를 스치는 의심에 자세를 바로 했다.
창틀을 움켜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래, 그녀 혼자서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못해. 하지만…….’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떠민다면? 특히나 그녀를 동정하던 그 유모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서 다른 마음을 먹게 한다면….
“설마.”
그러자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자신을 붙잡지도, 매달리지도 않던 그 모습. 그리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
그 순간, 집사의 전보와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며 새로운 의혹 하나를 낳았다.
“마지막 약속까지 저버리고 완전히 떠나려는 건가.”
따로 생활비라는 게 필요하지 않았던 세벨리아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지참금을 요구한다고?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하군.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게 실은 중앙 놈들이었던 건가.”
라쉬가 심은 의심의 씨앗이 어느새 그의 마음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과거에 이미 한 번 배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디하트의 참혹한 상처는 수상스러운 바람에도 너무 쉽게 다시금 벌건 상흔을 벌렸다.
‘세벨리아, 당신이 또.’
디하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선홍빛 입술이 찢어지며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비린내를 실은 바람이 방 안을 휩쓸었다.
“만약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용서 따위는 없을 거라고.”
디하트는 창틀을 부서트릴 듯 움켜쥐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당신이 어떻게 감히…….”
냉대와 불신. 세벨리아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그 두 단어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자초한 건 바로 그녀였다. 배신으로 인한 형벌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당신은 감히 그럴 수 없어.”
디하트가 주문을 외듯 혼잣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곁을 평생 지켜야 했다. 사랑하지는 못할지언정 떠나지는 않아야 했다. 그건 그녀의 의무였다.
그 쓰디쓴 배신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기억하는 한. 호의를 가장하고, 사랑을 입에 올리며 자신을 기만한 그녀는 응당 그래야만 했다.
[언젠가는 평범한 부부처럼 함께 잠들 날이 오겠죠, 우리?]디하트는 제게 그렇게 속삭이던 그녀가 배신을 들킨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떠올렸다.
[미안해요. 여기 있을 줄 몰랐어요.]이전까지만 해도 인버네스의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던 그녀는 순식간에 순종적으로 변했다. 마치 제 처지를 이해한 듯 입 안의 혀처럼 공손하게 굴며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괜찮다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이곳에 있어도 될까요?]작게 속삭이며 제 눈치를 보던 그 모습. 달아나지도, 다가오지도 못한 채 조심스럽게 제 곁을 맴돌기만 하는 그 나약한 얼굴.
디하트는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불이 치솟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당신은 계속 날 두려워하고 날 사랑해야 해. 평생토록 내 곁에서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고.”
디하트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힘주어 말했다. 내게 죄책감을 가져. 당신이 쉽게 입에 올린 그 사랑이라는 거짓을 이어 나가.
“그게 당신이 받아야 하는 벌이야.”
언제나처럼 옷 안쪽에 숨겨 놓은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술렁이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가 있을 저택으로 달려가야 했다. 가서 확인해야만 했다. 마지막에 떠나올 때 보았던 그녀의 그 잊지 못할 표정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던 그 눈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제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는 듯한 그 슬프고 아련한 얼굴이…….
그 순간 차가운 손으로 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작렬했다.
한참 뒤, 창백한 얼굴로 결국 그는 시인해야만 했다.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복귀해야겠군.”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고, 빌어먹게도 화가 나지만. 지금 그는 세벨리아를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술렁이는 심장이 진정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