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0)화(70/171)
협곡으로 가는 길에 디하트는 파란 새를 품에 안아 들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헛된 희망은 품지 말자.’
지겨울 만큼 되뇌었으나 몹쓸 기대는 번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미약한 희망에 모든 걸 걸고 혹시 모를 미래를 꿈꾸려 들었다.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한 놈이었나.”
디하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겨우 협곡의 입구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바람이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깎아지른 산에 바람 굴만 수십 개였다.
“쯧.”
그는 엉망진창으로 엉킨 머리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내렸다. 손안에서 잠자듯 눈을 감고 있던 새가 어느새 눈을 뜨고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짧은 순간 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이 오갔다. 디하트는 어쩐지 새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엉킨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부리에 바로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윽, 잠깐……!”
삐빅!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디하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유 모를 울분에 찬 새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리로 쪼고 발톱으로 잡아당기며 난리법석을 떨어 댔다. 결국 보다 못한 일레이가 나서서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날 걱정해서 보낸 게 아니었나?”
디하트가 심란한 얼굴로 파란 새를 내려다보았다. 일레이의 손에 잡힌 새는 연신 삑삑 소리를 내며 부루퉁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디하트의 금색 눈동자가 곤란함에 물들었다.
* * *
클로드는 숨겨 왔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가 환영술사임을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할 사실들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힐렌드 홀을, 인버네스 사람들을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어서 차마 내가 먼저 털어놓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쏟아지는 이야기에 세벨리아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잠시, 잠시만요.”
수용치를 넘어서는 정보에 그녀의 머리는 과부하 상태에 빠졌다. 세벨리아는 열이 오르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만 제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세요.”
클로드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세벨리아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가 방금 들은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디하트의 막내 숙부라고?’
기껏해야 환영술에 대한 이야기만 들을 줄 알았다. 자신이 용기를 내서 그에게 파란 새를 맡긴 순간, 그가 기다렸다는 듯 붉은 나비를 만들어 보였으니까.
‘처음부터 파란 새가 환영술로 만든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럴 수 있었겠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디서 데려온 새냐고 묻던가, 언제 길들인 거냐고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질문은 생략한 채 바로 붉은 나비를 소환했다. 그건 파란 새가 환영술로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였으며 동시에 자신이 환영술사라는 것 또한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내가 바란 건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냐는 것, 그뿐이었어.’
하지만 그런 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클로드는 그보다 더한 비밀을 폭로했다.
‘선대 공작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가문에서 이름이 지워진 막내 숙부라니.’
세벨리아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가계도를 커다란 태피스트리로 만들어 저택 한쪽 벽면을 장식한 웨든과 달리 인버네스는 그런 흉물스러운 장식물 따위는 취급하지 않았다. 대신 새끼 양의 가죽을 두른 가계도 책이 따로 있었는데, 세벨리아는 결혼식 직후 딱 한 번 그 책을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멀리서 겉표지만 겨우 보았을 뿐이지.’
세벨리아는 당연히 라쉬가 디하트의 하나뿐인 숙부인 줄로만 알았다. 클로드는 힐렌드 홀에서 이미 오래전에 지워진 존재였고, 누구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적잖게 충격적이었다.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좋은 일로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숨어 지내는 처지였으니까.
“이런… 비밀을 말씀해 주시길 바란 건 아니었어요.”
세벨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건 그녀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그녀가 쿠션을 세게 끌어안으며 신음하자, 클로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내가 벨라 양을 조카며느리, 크흠, 흠. 그렇게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쿠션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클로드의 재미없는 농담에 조금 충격이 가셨는지, 그녀가 쿠션을 내려놓으며 맥없이 말했다.
“그럼 그때 변장하신 것도 마법이 아니라 환영이었군요.”
“아, 네. 맞아요.”
“전 환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몰랐어요.”
세벨리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화제를 바꿨다. 클로드의 끔찍한 과거와 그에 얽힌 디하트의 불행에 관해서는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그와 관련하여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인버네스 가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 이상 파고든다면 그건 쓸데없는 간섭이었다.
“제게 환영술에 대해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세벨리아가 클로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은 긴장한 듯 주먹을 꼭 쥐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수업료를 드릴 형편은 되지 못해요. 그래서 말인데, 원하신다면 차용증을 써 드릴게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클로드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벨크람 제국 내에서 환영술사는 주술사보다 더 생소한 존재였다. 그 자신이 환영술사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환영술사가 다른 환영술사를 만났을 때, 얼마나 끈질기게 상대에게 매달릴 수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하아.”
언젠가 나도 업보를 치르게 될 거라더니. 클로드는 그의 스승이 비웃듯 남긴 말을 떠올리며 세벨리아를 마주 보았다.
호수처럼 푸른 눈은 자신이 거절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결연한 의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비좁은 암벽 틈 사이로 한참을 걷던 디하트는 마침내 협곡을 마주했다.
휘잉-!
“지금은 비록 이름마저 잊혀져 버린 신이라도 한때나마 세상을 지배했었다는 건가.”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깎아지른 산맥 한가운데 장엄한 협곡이 숨겨져 있었다.
위로 솟아오른 암벽은 구름 끄트머리에 닿아 있었고, 아래로 뻗은 낭떠러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로 차가운 물줄기들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소름 돋게도 쏟아진 물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역류하듯 솟아오른 짙은 안개가 어느 순간 얼어붙어 눈송이가 되어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릴 뿐. 제국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풍경에 그를 따라온 약초꾼들이 다들 감탄을 내뱉었다.
어느새 디하트의 곁으로 다가온 일레이가 눈송이를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런 곳을 여태껏 발견하지 못하다니. 정말 이상하군요.”
“서프레디에 틀어박힌 녀석들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아.”
디하트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지고 토론하거나 사람의 살갗 아래를 어떻게 하면 더 잘 파고들까만 생각하지 정작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신비스러운 광경이며 보통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서프레디였다. 잊혀진 신들의 도시이자 아직도 성역의 신비가 풀리지 않은 곳.
“하지만 그래봤자 이미 쇠락한 신이지. 다들 정신 차리고 속히 일을 시작해라.”
디하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은 빠르게 모든 것을 신의 영역으로 넘기고 디하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천막이 지어지는 동안 디하트는 천천히 협곡 주변을 살폈다. 낭떠러지와 물이 흐르는 곳을 제외하고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으니 너는 천막이 잘 지어지는지나 확인해. 가지고 온 물자들도 빠짐없는지 다시 점검하고.”
“예.”
투둑.
그의 발치에서 돌 두어 개가 굴러떨어졌다. 자세를 바꾸며 걷어차인 듯싶었다. 디하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협곡 아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방해에 그는 바로 머리를 치켜들어야 했다.
“삐이익-!”
“윽?!”
어느새 품에서 빠져나온 파란 새가 그의 머리칼을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 협곡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듯, 자그마한 발톱으로 뒤통수를 야무지게 붙잡은 게 보통이 아니었다.
“잠깐, 이번에는 왜 또…. 큭!”
세벨리아가 부탁한 새라 차마 손을 댈 수도 없어, 그는 그대로 등을 땅에 대고 누워야만 했다.
“…….”
“뺙.”
디하트가 모든 걸 포기하고 가만히 누워 있자 파란 새는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작은 새는 그의 머리 위를 몇 번 용맹하게 돌다 가슴팍에 내려앉아 짧게 울었다.
“삑!”
그 모습이 마치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온 장군처럼 용맹함을 뽐내는 듯한 기세라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비웃었다는 걸 느낀 파란 새가 몸집을 부풀리려는 찰나였다.
[혼내지 마세요. 당신이 떨어질까 걱정돼서 말리려 한 것 같으니까.]소매 안쪽에 숨어 있던 붉은 나비, 알로스가 그의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디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있는 줄도 몰랐군.’
애지중지한 파란 새와 달리 클로드가 억지로 떠맡긴 붉은 나비는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알로스는 가볍게 날아올라 파란 새의 곁에 내려앉았다. 파란 새는 어째선지 놀라 그로부터 종종걸음을 쳐 달아났다.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디하트의 머리 위라는 게 문제였지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가볍게 웃은 알로스가 날개를 맞부딪히며 말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죠.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알로스, 클로드 씨의 환영마랍니다.]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알로스의 목소리는 성별 따위는 상관없을 정도로 호소력이 짙었다.
“그 환영마라는 게 대체 뭐지?”
디하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알로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조금 즐거움을 느꼈다.
[으흠.]알로스는 그대로 미끄러지는 대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대답했다.
[환영마는 환영술사들의 가장 강한 의지, 그들의 마음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존재예요. 비슷한 말을 고르자면… 그래요,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 말을 들은 디하트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고혹적인 목소리를 가진 눈앞의 나비가 못 미더운 삼촌인 클로드의 분신이라니.
그의 거부감을 읽은 알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각자 독립적인 별개의 존재랍니다. 다만 분신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감정을 공유하죠.]“흠.”
[애초에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태어나니까요.]알로스가 디하트의 머리 위를 천천히 유영하며 말했다. 그사이 파란 새는 디하트의 옷깃을 파고들고는 자그마한 부리로 쇄골을 콕콕 쪼았다. 간지럽지도 않은 흔적들이 마치 목걸이처럼 살갗 위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