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1)화(71/171)
태양을 둘러싼 구름 두 조각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물기 어린 금빛 눈동자를 떠올리게 해 세벨리아는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렸다.
“마야.”
부드러운 솜방망이가 그녀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아마도 그녀가 환영으로 불러낸 눈송이들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차갑지 않지?”
그릉, 하는 소리와 함께 마야가 둥둥 떠다니는 눈송이들을 향해 힘차게 앞발을 날렸다. 세벨리아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리며 마야의 위로 수십 개의 눈송이를 흩뿌렸다.
세벨리아가 갑자기 눈송이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클로드 때문이었다.
[첫 번째 숙제입니다. 아주 정교하고 작은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변형시켜 보세요.]그는 환영술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세벨리아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러나 수강료만큼은 일절 거부했다. 대신 그는 세벨리아가 자신을 스승으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벨라, 당신은 대가를 주고받는 깔끔한 관계를 원하죠. 하지만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특히나 환영술사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나를 스승으로 여기는 게 싫다면 여기서 그만두도록 해요.]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환영술은 세벨리아가 역경을 뚫고 나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힘이었다. 이 힘이 없었다면 힐렌드 홀을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서프레디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앓고 있는 병이 리히스병이라고 생각한 채 허무하게 죽었을 테지.’
결국 세벨리아는 클로드의 제안대로 그와 사제관계를 맺는 대신 환영술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디하트와 그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는 사제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 자신의 걱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클로드는 먼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앞으로 나는 벨라 양을 내 제자로서만 대할 겁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따위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혹시나 하는 걱정을 모두 날려 버릴 만큼 깔끔한 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말이다.
“왜 하필이면 그런 꿈을 꿔서.”
세벨리아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녀는 오늘 호숫가에서 뱃놀이를 하는 꿈을 이어서 꾸었다.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디하트였다.
“하.”
감정에 둔감한 세벨리아는 제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겐 그저 이 상황이 혼란스럽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방도가 보이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당신에게 남은 건 원망뿐이라 생각했는데.’
세벨리아는 돌려주지 못한 은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눈앞에 있을 때는 마음이 괴롭고 원망이 차올라 보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남겨지니 그것도 아니었다.
“오늘로 일주일째인가.”
디하트가 협곡으로 떠난 게 일주일 전이건만,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모르는 척 잊고 있는 것도 이제는 무리였다. 어제는 클로드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미안해요. 나도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했어요.]‘그래,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세벨리아는 손에 턱을 괴었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확신에 찬 얼굴로 연구소를 떠나던 디하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하아.”
마야가 무슨 일이냐며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으나, 세벨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가서 놀렴.”
세벨리아는 파란 새 대신 카나리아 두어 마리를 만들어 내 마야의 머리 위로 날려 보냈다. 곧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마야는 저 멀리 사라졌다. 세벨리아는 그와 함께 디하트에 대한 생각도 떠나보내려 애썼다.
이제 다시 제 건강을 챙겨야 할 때였다. 그래, 그가 말했듯이.
[당신은 당신 건강을 챙기는 데만 집중해.]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치솟아 어찌할 줄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초저장고가 불에 타 버린 뒤 자신은 몸을 챙기는 일마저 놔 버렸으니까.
하지만 약초를 구하러 떠난 디하트는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세벨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손으로 감추며 한숨을 삼켰다.
‘이제 어떻게 한다.’
다들 협곡의 위험성에 대해 집착하느라 놓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협곡은 유리눈꽃이 자생하기 좋은 지역이지만, 그게 꼭 그곳에 유리눈꽃이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디하트는 이미 협곡으로 떠났고, 자신은 약이 필요해 그를 붙잡아 말리지도 못했다. 결국 남은 건 초조함 속에 늘어나는 기다림과 점점 떨어지는 수중의 돈뿐이었다.
‘슬슬 현실을 생각해야 해.’
디하트가 유리눈꽃을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세벨리아는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는 워츠를 설득해 그의 도움을 받아 러크우드 산 유리눈꽃을 구해 볼 생각이었다.
“최근에 문호를 개방했다니 가능성이 있을 거야.”
약재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염치없지만 클로드가 지원해 준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세벨리아는 부담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로드는 강경했다.
“인버네스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고집이 그렇게 센 건지.”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투명한 눈송이들을 붉게 물들였다. 손짓 한 번에 수십 개의 눈송이가 저마다 화려한 빛깔을 뽐내며 허공을 천천히 유영했다.
* * *
일주일 동안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는 건 디하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각만큼 빨리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그의 속에는 불만과 당황이 쌓이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데 이 빌어먹을 협곡이.”
깎아지른 암벽 사이에 숨어 있는 깊은 협곡은 지형적으로 그 어떤 마법과 주술도 허용하지 않았다. 까딱하다가는 암벽이 모두 무너져 내릴 수 있어 협곡의 바닥을 수색하는 데에만도 한세월이 걸렸다.
“이럴 바에야 내가 내려가는 게 낫겠어.”
금색 눈동자 가장자리로 섬뜩한 흰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놀란 일레이가 일지를 정리하다 말고 달려와 그를 만류했다.
“어찌 그 귀한 몸을 저리 천한 곳으로 내던지겠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차라리 인부를 더 늘리도록 하죠.”
“지금 이 상태에서 사람을 더 불러 모으자고? 내가 이곳에서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고 아예 신문에 광고를 넣지그래.”
“아, 신문광고가 있었죠. 역시 공작님이십니다. 제가 바로 서프레디로 내려가 지역신문사를 방문하겠습니다.”
일레이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의 복장 터지는 언행에 디하트는 치솟았던 화가 가라앉는 걸 느꼈다. 당연히 일레이의 말이 너무 감명 깊어서는 아니었다.
“나가.”
“신문에 실력 좋은 약초꾼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싣는 건…….”
“나가라고 했지.”
살벌한 음성이 천막 안을 울렸다. 일레이는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살기 어린 시선이 그의 목덜미를 스친 순간, 일레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삐-
일레이가 사라지자 파란 새가 기다렸다는 듯 옷깃 사이를 헤치고 나타났다. 가슴팍에 잠들어 있던 녀석은 아직도 졸린지 눈을 끔뻑이며 날개를 성의 없이 퍼덕였다.
“졸리면 자.”
자그마한 머리를 검지로 쓰다듬은 디하트가 파란 새를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갸우뚱거리던 머리는 기어코 손바닥에 쿵 하고 찧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피이?!”
놀란 걸까. 작은 날개가 빠르게 퍼덕이더니 파란 새가 손바닥 위를 몇 바퀴 돌았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는 걸 인식했는지 단추 같은 눈으로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윽!”
그리고 오늘도 물어 뜯겼다. 디하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술을 지렁이 쪼듯 쿡쿡 찔러 대는 파란 새를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잡아떼었다.
“하나같이 날 괴롭히는 데 도가 텄군.”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러나 파란 새는 아직도 더 쪼아 댈 데가 남았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잘해 준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디하트가 파란 새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새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그만해.”
손바닥에 밀려난 파란 새는 기회를 노리겠다는 듯 머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이 꼭 제게 원한을 품고 있는 듯해 디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클로드의 환영마가 속삭인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애초에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태어나니까요.]환영마란 환영술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태어나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과 사고는 아마도 환영술사들의 마음을 바탕으로 성립된다고 봐야 할 터였다.
“세벨리아의 마음이라.”
그렇다면 자신을 적대하는 파란 새의 행동과 태도 모두 그녀의 본심에서 기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그렇군.”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림자에 먹힌 태양 같은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당연한 일에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디하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익숙한 체념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하긴 모두가 인정하는 광인이니 그런 우스운 희망을 품어도 어쩔 수 없나.”
디하트는 스스로를 비하하며 비소를 흘렸다.
자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믿어 주지 않고, 말 한마디 들어주지 않고 상처받기 싫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녀가 죽음을 가장하고 도망칠 정도로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니 세벨리아가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디하트는 부러 그 사실을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역시 날 걱정해서 널 보내 준 건 아니겠구나.”
그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이렇게 해 줬겠지.
금색 눈동자 위로 회한이 스치고 책상 위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디하트는 고개를 들어 제 위를 맴돌고 있는 파란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인형처럼 자그마한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뻗어진 손은 조그마한 몸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멈췄다.
피릿.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놀라게 한 대가라는 듯, 이전보다 더욱 날 선 대응이었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손가락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 상처를 보자 살이 깊숙하게 패여 있었다. 디하트는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멍청한 생각을 알아차린 그녀가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며 벌을 준 듯한 기분이었다.
“잘했어.”
무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디하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이-. 파란 새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다 시무룩하게 손바닥만 한 방석 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