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3)화(73/171)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계곡에는 들짐승 하나 살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낭떠러지에 발을 디디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울릴 뿐.
“갈수록 해가 짧아지는군.”
점점 아침과 새벽의 경계가 흐려졌다. 디하트는 서늘한 눈을 들어 주위를 훑었다. 일레이의 고집으로 새로 들인 인부들이 반대편 천막에 옹기종기 모여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것 같던데요.”
일레이가 낭떠러지에서 올라오는 인부들 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들은 요 며칠 동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줄에 매달려 벼랑 밑으로 돌을 던졌다. 그리고 바로 오늘, 떨어진 돌이 바닥에 튕겨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한 시간만큼 물량으로 승부해야겠군. 네가 데리고 온 약초꾼들 전부 준비시켜.”
디하트가 내뱉듯 말하며 등을 돌리자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붉은 나비가 불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일레이는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광경에 몸을 움찔했다.
[놀라지 마시라니까요.]“으음…….”
[이제 슬슬 제가 활약할 때가 왔군요. 그렇지요?]“뭐, 그런가.”
일레이는 답지 않게 어색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의 뒤를 붉은 나비가 팔랑이며 뒤따랐다.
* * *
팔락, 조용한 서재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세벨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클로드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저녁노을이 하늘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디하트가 떠난 지 열흘째, 아직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내일은 간단한 시험을 칠 거예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세벨리아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책을 덮은 클로드가 뜨거운 차를 내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딴생각을 하다 들킨 세벨리아는 쭈뼛거리며 그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퍼져 나갔다.
“혹시 환영으로 변장을 하라는 건 아니시죠?”
클로드가 그동안 내준 숙제들을 떠올리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그는 세벨리아의 잠재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겠다며 여러 환영을 만들게끔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세벨리아는 자신의 실력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일지도 모른다며 내심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만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환영술의 종류에는 클로드처럼 얼굴과 골격을 완전히 새로 덧씌우는 ‘변장’이 있었는데, 세벨리아는 그 부분에서 완전히 처참한 실력을 자랑했다.
‘내가 모든 분야에 뛰어난 게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지.’
세벨리아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묻자 클로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는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아, 아뇨. 그건 벨라 양의 적성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분야의 환영술을 시도해 보게 한 것뿐이었어요. 내일 치를 시험은 기초적인 겁니다.”
“무슨 내용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요. 간단한 겁니다. 벨라 양의 환영마와…….”
말을 잇던 클로드가 갑자기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한순간 숨을 쉬지 못했다. 세벨리아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클로드 씨.”
겨우 정신을 차린 세벨리아가 그를 불렀을 때, 클로드는 정신을 차린 뒤였다.
“후우, 하아…. 젠장, 놀랐네.”
“제가 워츠 씨를 불러올게요.”
“아뇨,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클로드가 식은땀을 훔치며 심호흡했다. 세벨리아는 방을 나서려다 말고 그의 곁으로 갔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자 클로드는 사양하지 않았다.
“하아.”
“설마 클로드 씨도 지병이 있으셨던 건가요?”
그러고 보니 그가 어떻게 워츠와 알게 되었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으로 얼룩졌다. 그 얼굴을 본 클로드가 작게 웃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난 매분 매초가 건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숨을 쉬지 못하셨잖아요.”
“아, 그건 병이 아니라…. 젠장.”
클로드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이를 꽉 깨물었다. 부릅뜬 두 눈동자에서는 전에는 볼 수 없던 강렬한 감정이 불똥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전 지금 당장 협곡으로 가야겠어요.”
“네?”
클로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세벨리아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갈 것 같은 태세였다.
결국 클로드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알로스의 상태가 이상해요.”
그를 올려다보는 세벨리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알로스라면, 클로드 씨의 환영마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연결이 흔들렸어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아무래도 제가 가야겠습니다. 벨라 양은 이곳에서 기다리세요.”
쏟아 내듯 말한 클로드가 바로 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만 같은 그의 모습에 세벨리아는 기겁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클로드의 모습은 디하트가 아팠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클로드 씨, 진정하세요.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혼자 가시면 안 돼요. 협곡은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클로드 씨도 디하트가 그곳에 가시는 걸 말리셨잖아요.”
“그러니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천천히 내뱉는 말은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에 세벨리아는 숨을 삼켰다. 역광을 받은 금색 눈동자는 소름 돋을 정도로 오싹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녀석은 늘 나를 찾아오지 못했으니까, 내가 가야 해요.”
세벨리아는 떨리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 * *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요.]어둠이 하늘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 작업을 마치고 올라오는 약초꾼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디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나비는 그의 어깨 근처를 느리게 날아다니며 불꽃 같은 잔상을 허공에 흩뿌리고 있었다. 디하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알로스는 그 위에 다소곳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까 전부터 이상한 기운이 저를 흔들고 있어요. 아주 무섭고 불길한 기운이에요. 하마터면 붙잡혀서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뻔했답니다.]알로스는 살벌한 소리를 아주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그래서 무섭다는 거야, 뭐야. 디하트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다.
“뜬 소리 하지 말고 정확히 말해.”
야멸찬 그의 반응에 알로스는 상처받은 척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보석을 얇게 잘라 내어 붙인 것처럼 아름다운 날개의 빛깔이 어둠 속에서 산란했다.
[협곡 아래를 조심하세요, 공작님. 그곳에 신의 비밀이 잠들어 있습니다.]“도시에 죽치고 앉아 있는 바퀴벌레들이 제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게 확실해졌군.”
영광을 잃은 신의 도시, 서프레디. 이곳의 신비를 캐기 위해 곰팡이 핀 머리를 들고 모여든 온갖 머저리들을 떠올리며 디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보가 배배 꼬인 붉은 나비의 뜬 소리는 결국 협곡 아래에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유리눈꽃을 채취하는 데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소지가 다분했다.
‘쓸데없는 주의를 준다면 분명 역효과가 날 테지.’
쯧, 디하트가 혀를 차며 일레이를 불렀다. 멀리서 알로스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일레이가 다 죽은 얼굴을 했다.
* * *
“불렀습니까, 벨라 양.”
카나리아의 모습을 한 환영을 따라 워츠가 삼 층 복도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상황이 모두 종료된 뒤였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기절한 클로드 씨와 그 위에 올라타 있는 마야죠. 맞아요.”
“…그렇군요.”
워츠는 대충 이해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벨리아는 그런 그의 모습에 팔짱을 풀며 상황을 설명했다.
“클로드 씨가 갑자기 협곡으로 가야겠다며 고집을 부리셔서 어쩔 수 없이…….”
“마야가 그를 덮쳤습니까?”
알 만하다는 뉘앙스로 말하며 워츠가 클로드의 맥을 짚었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했어요.”
“벨라 양이요?”
워츠가 놀라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상태 그대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벨리아는 그의 시선을 받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클로드 씨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환영을 썼나 봐요.”
그녀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세벨리아는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 서프레디까지 내려가면 새벽이 될 게 뻔했다.
‘게다가 인버네스의 기사들은 의원의 조수인 ‘칼 어펜츠’를 디하트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지 않을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클로드 인버네스로서도, 칼 어펜츠로서도 협곡에 다다를 수 없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녀석을 또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그 순간의 클로드는 정말이지 디하트와 똑 닮아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형형한 금빛 눈동자, 귓속으로 찔러 들어오는 고함. 세벨리아는 아마 그래서 자신이 평정을 잃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뒤는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클로드는 그녀를 뿌리치며 계단을 향해 달렸고, 세벨리아는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제발 진정하세요, 클로드 씨. 적어도 아침이 밝은 후에…!]그의 어깨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손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클로드 또한 이상한 감각을 느낀 것 같았다. 그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화악-!
손 끄트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불꽃이 순식간에 몸을 집어삼켰다. 열기가 심장을 감쌌다. 잔잔한 호수에 격랑이 일듯, 잠자고 있던 힘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다. 그건 세벨리아의 의지가 아니었다.
해일이 두 사람을 덮치듯 거대한 환영이 세상을 바꿨다.
‘그리고 복도가 한순간 다른 공간이 되었지.’
고풍스러운 복도는 눈 깜짝할 사이 울창한 숲속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부서진 마차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비 내리는 숲.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짧은 신음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게 무슨…….]정신을 차린 세벨리아는 혼비백산하며 어쩔 줄 몰라 했고, 그때 나타난 게 마야였다. 차분하고 냉정한 마야 덕에 세벨리아는 워츠를 불러올 생각을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물리적 구타의 흔적은 없었군요.”
간단한 검진을 끝낸 워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기절입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벨라 양이 이 녀석을 말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감사 인사를 받아도 되는 걸까. 세벨리아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복도에 볼품없이 늘어진 클로드를 내려다보았다.
마야가 그의 뺨을 내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