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4)화(74/171)
“후우…….”
쿵!
낮은 숨과 함께 두꺼운 몸체가 협곡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약초꾼들이었다. 그들은 능숙하게 벽을 짚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은 야광석을 살폈다.
손바닥만 한 희미한 빛이 그들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젠장맞을, 이러다 눈알이 빠지겠구만.”
사내 한 명이 투덜거리며 장갑을 털었다. 좁은 시야 속에서도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그러자 무리를 이끄는 대장, 손스가 그를 나무랐다.
“부산스럽게 굴지 마! 이 시기에 이만큼 보수 좋은 일이 어디 있다고 불평이야, 불평은.”
성실한 약초꾼 같은 대사에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만 저렇지 손스가 뒤가 구린 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초꾼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손스가 여느 때처럼 명령을 내렸다.
“자, 삼분지 이만 남고 나머지는 나와 같이 저번에 봐 둔 동굴을 탐색한다. 그리고 드리켄, 너는 사다리 근처에 남아서 그 말하는 나비가 내려오면 상대해.”
손스가 투덜거리던 사내를 지목하며 말했다. 드리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째 같은 역할이라 지겹기는 했지만 딱히 싫지도 않았다. 이번 일만 잘되면 제게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테니까.
그의 생각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손스가 평소처럼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다들 기억해라, 유물 하나만 발견해도 손에 흙 묻히는 일은 평생 하지 않을 수 있어. 저 위에서 떵떵거리는 기사 놈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야광석의 희미한 빛 아래서 약초꾼들이 침을 삼켰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그들의 이성은 욕망 아래 다시금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손스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드리켄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 동굴을 향해 떠났다. 그런 그의 뒤를 신입 약초꾼이 따랐다.
“저 녀석이 또.”
남은 약초꾼들을 제 자리로 보내며 드리켄이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 합류한 신입 약초꾼은 사실 짐꾼으로 들어온 놈이었다. 그런데 약초꾼이 되고 싶다며 손스에게 달라붙으며 온갖 아양을 떨더니 저렇게 동굴에까지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하긴 팔다리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니 혀라도 잘 놀려야 살아남을 수 있겠지.’
드리켄은 혀를 차며 천천히 유리눈꽃을 찾는 척 야광석을 가방에서 꺼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한 발자국 앞까지만 보일 뿐이었다.
오늘도 협곡 아래는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 * *
지독한 꿈을 꿨다. 자신의 오만한 선택으로 인해 사랑하던 가족이 몰살당하는 꿈. 클로드는 그치지 않는 빗줄기 속에서 로잘린을 찾다 잠에서 깨어났다.
“윽.”
눈을 뜨니 축축하고 우울한 숲 대신 부드러운 털 뭉치가 그를 반겼다. 클로드는 자신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던 마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그의 방이었다.
“제길.”
그제야 클로드는 기절하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세벨리아와 수업을 하던 도중 알로스의 상태가 이상해졌고, 그로 인해 평정을 잃었다.
‘너무 흥분했었어.’
디하트의 소식을 받지 못해 초조해하던 찰나 닥친 이상 신호는 그의 이성을 무참히 끊어 놓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일어나셨군요.”
“벨라 양.”
클로드는 수치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세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양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세벨리아는 그런 그를 지친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단 클로드 씨에게 멋대로 환영을 쓴 것에 대해서 사과할게요.”
“아뇨,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제가 클로드 씨에게 함부로 군 건 사실인걸요.”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클로드는 오히려 세벨리아의 행동에 감사해했다. 그때의 자신은 확실히 이성이 나가 있었다며, 말려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세벨리아는 잠시 눈매를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마치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튀어 나가셨으니까요.”
서늘한 음성과 함께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클로드를 내려다보았다. 세벨리아가 너무 순순하게 그의 만류를 받아들이자 클로드는 어색함을 느꼈다.
본래의 세벨리아였다면 끝까지 그에게 사과하며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지금의 그녀에게선 왠지 모를 당당함이 느껴졌다.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대하는 선생님 같은 기운이었다.
“그거 아세요? 클로드 씨는 디하트와 비슷한 면이 참 많아요.”
“그, 그런가요?”
“네, 특히 갑자기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는 점이요.”
“…….”
“혈육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지더군요.”
클로드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툭 하고 고개를 떨궜다. 세벨리아는 디하트와 처음으로 언쟁을 벌인 날을 떠올리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당신이 걱정한 게 나인지, 아니면 나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미래의 당신인지!]그렇게 큰 소리를 낸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하여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심정을 쏘아붙인 것도 처음이었고.
‘내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사실 세벨리아는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짓을 했다며 자신도 모르게 자책했다. 하지만 그 뒤, 정신을 차린 듯한 디하트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내는 것도 생각만큼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그래서 세벨리아는 기절한 클로드를 돌보며 그를 억지로 잡아 두게 된 것 또한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평소에는 차분하나 특정 사안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갑자기 제멋대로 폭주해 버리는 남자들은 일단 그 기세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게 어떤 방법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클로드 씨.”
한풀 꺾인 클로드가 시무룩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벨리아가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협곡에 가지 않길 원한 게 아니었어요. 클로드 씨는 제 스승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아무 준비 없이 위험한 곳으로 달려갔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
클로드가 작게 입을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세벨리아는 차분하게 그에게 현실적인 제약을 조목조목 짚어 주었다. 혈기에 휩싸여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이었다.
“게다가 기사들이 아무 이유 없이 ‘칼 어펜츠’를 협곡 안으로 들여보내 줄까요? 아니면 클로드 인버네스로서 들어가실 생각이셨어요? 아니잖아요. 클로드 씨도 사실은 둘 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세벨리아의 담담한 말에 클로드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그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세벨리아가 협탁 위에 있던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워츠 씨에게 부탁해 의원으로서 유리눈꽃 채취 현장을 견학하게 해 달라고 기사들에게 연락했어요.”
“뭐,라고요?”
클로드가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헝클어진 고동색 머리가 놀라움에 물결쳤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마야가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세벨리아는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사냥하려는 마야를 끌어안으며 침착하게 그의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클로드 씨가 기절해 있는 동안 워츠 씨와 제가 당사자로서 진척 상황을 알아야 한다며 밀어붙였죠. 이건 그 답장이에요.”
“세상에. 벨라 양, 나는.”
클로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녀와 편지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조막만 한 종이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파고들듯 한 글자 한 글자를 탐독했다.
“정말이군요.”
고개를 든 클로드는 감동을 넘어 감격한 얼굴이었다. 세벨리아는 아직도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어 몸부림치는 마야를 토닥이며 말했다.
“같이 가요, 클로드 씨. 그리고 더는 벨라 양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냥 벨라면 충분해요. 클로드 씨는 이제 제 스승님이시잖아요.”
반질반질한 금빛 눈동자 위로 물기가 어렸다. 세벨리아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 집안 남자들은 하는 짓이 똑같았다.
* * *
“이걸 지금 진척 상황이랍시고 보고를 올린 건가? 내 밑에 있는 놈들은 죄다 눈깔이 거꾸로 달려서 숫자도 거꾸로 읽는 거냐고.”
디하트가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서류를 내던졌다. 하긴 오래 참긴 했다. 일레이는 나풀대며 떨어지는 서류를 눈송이처럼 감상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님, 0은 거꾸로 읽어도…….”
“입 다물어.”
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듯 노려보며 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좁은 암벽을 뚫고 숨겨진 협곡에 들어온 지도 오늘로 보름이 넘었다. 더 이상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내려간다.”
“안 됩니다!”
돌로 눌러둔 것처럼 꾹 다물렸던 입술이 쉽게도 움직였다. 디하트의 살벌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일레이는 꿋꿋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실력 좋은 약초꾼들조차 그곳에서는 하루에 몇십 걸음도 겨우 내딛고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작님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까마득한 곳에서는.”
파직.
그 순간, 천막 안에 수백 개의 하얀 불꽃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어올랐다. 일레이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급히 둘러보았다가 디하트를 붙잡았다.
“안 됩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신데…!”
“지금 내 몸이 중요해 보이나?”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디하트가 제 소매를 붙잡은 일레이를 뿌리쳐 떨궈 냈다. 일레이가 망연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쯤 하면 됐어. 어차피 나는 그렇게 말을 잘 들어 먹는 놈도 아니었지. 이제껏 버틴 게 용한 거야.”
디하트의 금안에 세로로 하얀 줄이 죽죽 그어졌다. 태양에 내리꽂히는 벼락처럼 금빛 눈동자가 조금씩 흰 빛으로 물들어 갔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었으니까.”
쩌적, 천막 안이 점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귓불에 박힌 붉은 보석의 표면이 갈라졌다.
툭, 하고 마침내 두 동강이 난 제어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일레이의 시선이 덩달아 아래로 내려갔다. 고개를 숙인 그를 스쳐 지나며 디하트가 냉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내려가 있는 약초꾼들을 전부 올려 보내. 다음 교대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은 대기시켜, 그리고 지금까지 아래에서 도대체 뭘 했길래 이따위로 밖에 일을 못 했는지 한 명씩 데려다…….”
디하트는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말을 멈춰야 했다. 방석 안에서 숨죽인 채 자고 있던 파란 새가 갑자기 날아올라 그의 가슴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
“공작님?”
일레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디하트는 이를 꽉 깨문 채 허공을 노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심문을 시작해라. 도구는 쓰지 말고, 말로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디하트가 천막을 나갔다. 파란 새가 다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날개를 퍼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