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7)화(77/171)
저벅, 저벅.
붉은 불꽃을 뒤집어쓴 디하트는 천천히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청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기사들은 경이에, 약초꾼들은 두려움에 질려 입을 벌렸다.
곧 노호와도 같은 목소리가 사람들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뭘 멍청히 쳐다보고 있지. 네 동료가 저 아래에서 깔려 뒤지기라도 바라는 건가? 당장 안 움직여?!”
으름장이 협곡을 휩쓸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사람들이 튀어 올랐다.
“한심한 것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그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눈으로도 모자라 뇌까지 흘리고 다니는 놈들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
낭떠러지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먼지,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저녁노을. 그 모든 걸 등진 채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디하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다.
“공, 작님.”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이 기사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디하트의 명에 따랐다. 재빨리 여분의 사다리를 낭떠러지 아래로 던지며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일레이, 내 목소리가 들리나?”
디하트는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점점 옅어지는 붉은 불꽃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알로스의 잔해였다.
[위험해요……!]협곡이 무너져 내린 순간, 알로스는 마지막 말과 함께 보호막을 펼치고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던 붉은 나비를 떠올리며 디하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제기랄.”
그는 셔츠의 앞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는 입 안의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파란 새는 알로스가 사라진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들어 한데 뭉쳐 있는 약초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에 닿은 약초꾼들이 숨을 삼켰다.
“로셸.”
“예, 공작님.”
기사들은 이제 그가 공작이라는 걸 더는 숨기지 않았다. 협곡 안쪽에 무정하게 울려 퍼지는 공작이라는 외침에 암벽에 달라붙어 있던 약초꾼들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무어라 속삭였다. 약초꾼과 짐꾼, 그리고 헨킷이라는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명부와 지금까지 심문한 내용을 가져와.”
기사 한 명이 디하트가 요구한 것들을 가져왔다. 서늘한 눈이 명부와 약초꾼들의 얼굴을 한 차례씩 훑었다. 명부는 오래가지 않아 디하트의 손을 떠났다.
“약초꾼 명단에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뿐이야. 짐꾼으로 섞여 들어왔던 거군.”
디하트의 입가에 차디찬 비소가 걸렸다. 로셸이라는 기사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헨킷은 얼굴과 이름을 속이고 짐꾼으로 들어왔다. 협곡에 상주하는 약초꾼과 달리 짐꾼은 도시와 협곡을 오갈 뿐이기에 별다른 검증 없이 고용한 게 실책이었다.
‘설마 짐꾼으로 들어와 약초꾼 무리에 섞여 들 줄이야.’
로셸은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디하트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흙먼지와 피가 뒤섞인 덩어리들이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대충 머리를 정리한 디하트는 협곡 입구 가까이 몰려 있는 약초꾼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타닥, 타닥.
내딛는 발걸음마다 샛노란 전류가 꽃봉오리처럼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약초꾼들의 머리로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벼락을 내리는 공작, 저주받은 인버네스.
“허억……!”
“마, 말도 안 돼.”
그제야 약초꾼 무리는 디하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대상이건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이목구비는 더없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점점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인버네스 공작이었다고? 제기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유리눈꽃을 못 찾았다고 둘러대고 다른 짓을 꾸미지 않았을 텐데.
약초꾼 무리의 대장 격이었던 손스가 가장 먼저 사색이 되었다. 그는 몰래 캐낸 약초를 숨긴 자리를 저도 모르게 눈으로 찾았다. 그것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스는 디하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약초꾼 무리가 모두 멀찍이 물러난 뒤였다.
“네가 이 쓰레기들의 대장이란 말이지.”
역광을 등진 금빛 눈동자가 짐승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선명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스는 덜컥 겁을 먹었다.
“고, 공작님. 제가 미처 몰라뵈어서.”
“그래, 이 주 넘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멍텅구리들을 데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나와 같군. 비록 그 멍청한 짓을 명령한 게 너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야.”
디하트가 손스의 말을 무참히 자르며 말을 이었다. 사나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있어. 나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놈들은 내 밑으로 들이지 않거든. 덕분에 내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어. 이 병신같은 도시에서 거지 같은 마지막을 맞이할 뻔했다 이 말이지.”
살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어깨를 짓누르고 폐부까지 짓쳐들어오는 기운에 손스가 컥컥대며 몸을 숙였다.
“게다가 유리눈꽃을 발견하고도 채취를 미루라 했다고?”
디하트는 방금 전 읽은 드리켄이라는 자의 심문 내용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무리의 대장인 손스가 유물을 안전히 빼돌리기 위해 채취를 미루며 시간을 지연시키자고 명령한 정황이 적혀 있었다.
“제, 제가. 저는…….”
손스는 후회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디하트를 비롯한 기사들을 우습게 여겼다. 자신들에게 돈이며 야광석이며 모두 맡기고는 하염없이 절벽 아래를 바라보는 것밖에 못 한다며 비웃었다.
약초꾼 무리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헛된 꿈에 부푼 이들이 제멋대로 현실을 재단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너 같은 쓰레기의 손에 그녀의 목숨이 달려 있었단 말이지.”
콰광!
벼락 한 줄기가 손스의 뺨을 스치고 발아래에 내리꽂혔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도 전에 뺨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손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전부 다 캐오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져온 것들도 모두…….”
“필요 없어.”
상냥하게 대답한 디하트의 손에는 유리눈꽃 두 송이가 상처 하나 없이 곱게 들려 있었다. 영롱하고 고결하기까지 한 하얀 꽃 두 송이가 그의 손 위에서 가냘프게 떨렸다.
“앞으로는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을 거니까.”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사내는 겨우 붙잡아 낸 희망을 두 손에 쥐고 서늘하게 웃었다. 가느다랗게 접힌 그의 눈매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를 뿜어냈다.
“저, 저는.”
손스는 그제야 상대가 그들을 상대로 거금을 흩뿌릴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가진 사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야광석을 협곡 아래에 박아 넣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유리눈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적막을 울렸다. 새파랗게 질린 손스를 향해 디하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쾅-!
멀리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세벨리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윽.”
땅을 짚고 일어나자 싸한 수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풀꽃이 일어나려는 발목을 잡아챘다.
세벨리아는 발목에 얽힌 수풀을 치워 내고 다시 산을 걸어 올랐다. 제법 속도를 낸 것 같은데, 아직도 클로드는 보이지 않았다.
“큰일인데…….”
클로드는 야광석 램프도 내팽개치고 달려가 버렸다. 겨우 한 치 앞을 비출 뿐인 램프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유일한 길잡이였다.
‘아직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서는 길이 엇갈렸을지도 몰라.’
세벨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등성이 위에서부터 흙먼지 섞인 바람이 내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뭉친 소음은 순식간에 세벨리아의 스산한 마음을 꿰뚫었다.
“……!”
어두운 숲 저 너머, 부서져 내린 암벽 틈 사이로 붉은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좁디좁은 길목 사이에서 쏟아져 내린 소음이 그녀의 상념을 쓸어 냈다.
“길이 뚫렸다. 어서 내려가서 연락을 취해 치료사들을 데려와라!”
“이 빌어먹을 새끼들. 많이도 숨겨 놨군. 너희들이 도둑놈이지 약초꾼이야?”
“심문하고 있는 녀석들 빼고 다 이리로 모여. 사다리가 모자라, 밧줄이든 뭐든 가져와서 아래로 던져!”
고함이 하늘을 찌르고 협곡을 울렸다. 쭈뼛 소름 돋은 목을 느끼며 세벨리아는 숨을 크게 삼켰다. 곧 그림자 속에 묻혀 있던 그녀의 모습이 저녁노을 아래 드러났다.
자박.
무너져 내린 돌 더미 사이로 빠져나온 기사들이 그녀를 발견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고함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협곡이 일순간 침묵에 잠겼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옷자락을 꽉 쥐었다. 고민은 한순간이었다.
“여섯 번째 길의 의원소에서 온 사람이에요. 실례할게요.”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협곡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든 상관없었다. 세벨리아는 움츠러들 것 같은 어깨를 억지로 펴고 턱을 세웠다.
“의원님은 뒤따라오실 거예요.”
“그, 그렇군요. 지나가십시오.”
기세에 밀린 기사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길을 터 주었다. 세벨리아는 상냥한 웃음과 함께 그들을 지나쳤다.
“고마워요.”
미소를 받은 기사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나 세벨리아는 보지 못했다. 협곡 안으로 향하는 길이 워낙 비좁아 다른 곳을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휘잉-!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할퀴었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었다. 세벨리아는 무너진 암벽 사이를 손으로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려야 할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실선처럼 가느다란 빛이 옆으로 잡아 뜯듯 넓게 펼쳐졌다. 넓어진 시야 사이로 정신없이 오가는 기사들의 모습과 수십 개의 천막이 보였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방을 검은 천으로 두른 높은 천막. 디하트의 것이 분명한 검은 천막은 낭떠러지 가장 가까이, 세벨리아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숨겨 놓았던 것 전부 의원소로 가져갈 수 있도록 정리해 놔라. 그리고…….”
“공작님, 제발 치료부터 받으십시오.”
“협곡 아래를 다시 구경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다물어.”
그리고 그 아래, 디하트가 있었다. 돌 부스러기를 가득 뒤집어쓰고 목덜미에는 핏물이 말라붙은 채 쉬지 않고 명령을 내리는 그가. 세벨리아의 푸른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