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8)화(78/171)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건 한순간이었다. 세벨리아는 침묵했다.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는 바람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툭 떨구며 세벨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쉴 새 없이 고함을 내지르던 디하트의 분위기가 일변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님, 저분은.”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일레이였다. 약초꾼들이 숨겨 놓은 약재를 한 아름 들고 오던 그가 놀란 얼굴로 세벨리아를 응시했다.
“그… 분이 맞습니까? 그러니까, 그. 돌아가신. 아니, 근데 함정이 아니라면 너무 똑같이 생기셨는데요.”
“…….”
“혹시 쌍둥이셨던 겁니까?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아, 그러고 보니 무섭게 뒤쫓은 것에 대한 사과는 하셨는지.”
일레이는 제가 말해 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디하트가 떨궜던 고개를 들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입 닥쳐.’
디하트가 소리 없이 일레이에게 경고하는 사이, 세벨리아는 디하트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먼지와 땀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흘러내려 가슴께까지 말라붙은 핏자국. 그리고 생명줄 마냥 한 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유리눈꽃까지.
“후우…….”
가볍지 않은 한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하트는 그 나지막한 한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꽈악, 약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디하트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금빛 눈동자 또한 어느새인가 고집스러운 빛을 담았다. 그는 일레이로부터 시선을 빗겨 세벨리아를 응시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떳떳하고 오만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세벨리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곧 그녀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당연히 디하트였다.
“어, 공작님. 이리로 오시는데요.”
호들갑 떠는 일레이를 옆으로 밀어 버린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맞이했다. 말없이 내리꽂히는 시선에 세벨리아는 고개를 떨어트리는 대신 턱을 치켜들었다.
“처음 뵙네요. 의원님과 함께 현장 시찰 차 오게 되었어요. 벨라라고 해요.”
세벨리아는 디하트를 바라보며 일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디하트는 입술을 꾹 다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일레이는 우왕좌왕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잡고 기사의 예를 취했다.
“공작님을 보좌하는 일레이 허스필드라고 합니다.”
귀족이 아닌 아가씨에게 취하기엔 너무 정중한 자세였다. 그러나 일레이는 내심 속셈이 있었다. 디하트의 말대로 세벨리아가 그를 무너트리기 위한 계책으로서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라면… 그녀를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평민이니 결혼까지는 안 되지만, 그냥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텐데.’
적당히 몇 년 정도 곁에 두었다가 평생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쥐여 보낸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깔끔하고 이득이 되는 결말일 터이다. 그래서 일레이는 세벨리아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세벨리아와 디하트 두 사람이 안다면 둘 다 불같이 화를 낼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에게는 독심술이 없었다.
“반가워요, 일레이 경.”
디하트를 노려보던 시선을 틀어 일레이를 가볍게 훑은 세벨리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일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귀족적인 우아함이 일순간 풍겨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일레이는 심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공작님.”
세벨리아의 손이 그의 셔츠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가슴팍 위를 가만히 쓸어내리는 그녀의 작은 손에 디하트의 눈은 한계까지 커졌다. 그러나 그의 착각은 얼마 안 가 산산이 깨졌다.
“분명 잘 돌봐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섬세한 손가락은 디하트의 가슴 위를 더듬는 대신 셔츠 주머니를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주머니 안쪽, 축 늘어진 작은 몸은 가엾기 짝이 없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디하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하시지 않았나요?”
“나는.”
“지금 제게 필요한 건 변명이 아니에요.”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더없이 서늘했다. 디하트는 숨을 삼켰다. 셔츠 주머니에서 파란 새를 꺼낸 세벨리아가 다른 쪽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싼 셔츠를 매만졌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숲의 냄새, 가슴팍에 닿은 손가락 끄트머리.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요한 호수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가만히 있어요.’
가지런한 입술은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디하트는 그녀가 말하는 바를 온몸으로 느꼈다.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가운 눈이 디하트의 온 신경을 사로잡았다.
“역시.”
짧지만 길었던 매혹스러운 순간이 끝났다. 미련 없이 디하트로부터 몸을 떼어 낸 세벨리아의 손에는 붉은 조각이 들려 있었다. 알로스의 잔해였다.
“그 아이가 당신을 지키다 부스러졌군요.”
디하트의 꽉 다물린 턱에 힘이 들어갔다. 금빛 눈동자 위로 그림자가 얼룩졌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혀끝에서 말려 들어갔다.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세벨리아가 그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남겨진 말 부스러기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천막 입구를 가려 둔 천이 펄럭이며 휘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디하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뒤 천막의 입구를 걷었다.
파직.
일레이는 뒤에서 ‘힘내세요’라고 속삭이다 작은 벼락을 맞은 뒤 바로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디하트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세벨리아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 * *
세벨리아는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튼튼한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나무와 두꺼운 천을 두른 천막은 집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이 안에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면 분명 협곡을 뒤흔든 충격에도 상처 하나 없이 안전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지.’
세벨리아는 움켜쥐고 있던 알로스의 잔해를 공기 중으로 흘려보내고 방석 위에 파란 새를 올려놓았다. 이어 디하트가 그녀를 뒤따라 들어왔다. 두꺼운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탁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단단한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몇 번 입을 달싹였으나 끝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는 못했다. 세벨리아는 결국 그를 대신해 입을 열어야 했다.
“디하트.”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처는 어쩌다 생겼죠?”
“…….”
“손등의 상처는 뭐고, 말라붙은 피는 또 왜 그런 거예요?”
디하트는 답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는 당신의 주제를, 하. 그래. 주제를 잘 알고 있다며 약속했잖아요.”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세벨리아는 그를 힐난했다.
“이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알로스가 당신을 감싸고 역소환되었다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겠죠. 이를테면, 당신의 신변에 위협이 될만한 일.”
“…….”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을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날 위한답시고 약초를 찾도록 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디하트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빌어먹을 잡것들이 그녀의 목숨줄을 놓고 제 욕심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디하트는 다시 한번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오고 팔다리가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그 개자식들의 멱살을 쥐고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고 싶다는 충동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세벨리아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몰랐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게 내 최선이었어.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것뿐이야.”
짓씹듯 내뱉은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세벨리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디하트의 눈이 짧은 순간 그녀와 작은 새를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이 어린 건 일순간이었다.
다시 세벨리아를 향해 고개를 튼 그의 얼굴은 예전과 똑같았다.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강렬하며 거침없었다.
“너는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 죽어 가는데. 그 빌어먹을 병이 시시각각 네 몸을 갉아먹는데, 나는 여기 처박혀서 쓰레기 같은 새끼들한테 돈을 쥐여 줘 가며 제발 널 살릴 약초를 찾아 달라 빌고 있었어야 했나?”
거친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강세를 더해 벼락처럼 내리쳤다. 세벨리아는 한숨을 삼키고 그를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디하트, 일단…….”
“너는 죽어 가는데, 나는 그 녀석들의 비위나 맞추며 이 안락한 천막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냐고. 하!”
디하트의 입가에 지독한 비소가 걸렸다. 금빛 눈동자의 아름다운 빛이 깨져 나가며 그 안에 고인 독이 흘러나왔다.
“하루, 이틀. 그래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 하지만 열흘이 넘었어!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이 숨 막히는 곳에 틀어박혀 혹여라도 오늘 당신이 쓰러진 게 아닐까 매일 걱정해야 했어. 그 대체 약이라는 게 효과를 잃는 건 아닐까, 오늘 아침이 되면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까 봐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절절 끓는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세벨리아의 심장까지 흘러내렸다.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온도에 그녀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래도 참았어. 그래, 당신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참았다고. 그 버러지 새끼들이 멍청한 얼굴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소리를 매번 지껄여도!”
그는 마치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금빛 눈동자 위로 하얀 벼락이 실금처럼 그어져 내렸다.
“하지만 천성은 변하지 않더군. 어쩔 수 없지. 이 성격이 어딜 가겠어. 그래서 그랬어. 소중한 약속 따위는 보란 듯이 내팽개쳤지. 당신 목숨을 그런 쓰레기들에게 맡길 수 없어서.”
디하트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은 그녀를 빗겨 그 뒤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약속을 깨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세벨리아는 제 품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를 보고 말을 잃었다. 부드러운 천 위에 가지런히 놓인 건 분명 유리눈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놈이라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밖에 없군.”
“…….”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디하트는 등을 돌렸다. 세벨리아가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