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7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79)화(79/171)
처음에 그가 울분을 쏟아 내는 걸 보았을 때, 세벨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속을 깨 놓고 보란 듯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걸 봤을 때는 없던 화까지 생길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봐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참았어. 그래, 당신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참았다고. 그 버러지 새끼들이 멍청한 얼굴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소리를 매번 지껄여도!]입으로는 거친 말을 토해 내면서 두 눈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연약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금색 눈동자는 자꾸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 남자, 설마.’
그래서 세벨리아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 등을 돌리는 남자를 잡아챘다. 결코 그의 기다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다려요.”
다급히 손을 뻗은 탓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넘어질 뻔한 세벨리아를 받아 든 건 당연히 디하트였다.
“조심해.”
그는 물기 어린 눈을 보이기 싫은 듯, 고개를 홱 꺾은 채 세벨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다시 천막을 걷어 밖으로 나가 버리려 했다. 세벨리아는 또 그를 붙잡아야 했다.
“디하트, 어딜 가는 거예요.”
세벨리아는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디하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잡은 세벨리아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떼어 놓고 입구를 가린 천을 걷으려 했다.
텅 빈 두 손을 바라보는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나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자기는 제멋대로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쏟아 내고서, 내 말은 하나도 듣고 싶지 않다고?
세벨리아는 그 순간, 클로드를 통해 얻었던 교훈을 되새겼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인버네스의 남자들은 일단 제 생각에 몰입하면 눈과 귀를 꽉 막아 버리고는 했다. 그러니 그 몰입을 깨 버려야 했다.
그게 어떤 방법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세벨리아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 중 가장 낮고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동시에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환영을 펼쳤다.
화아악-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져 있던 천막 안은 순식간에 광활한 평원이 되었다. 높은 하늘이 그들 머리 위에 있었고, 탁 트인 시야 저 멀리 눈 덮인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리고 꽃들. 지독하리만치 향긋한 꽃내음이 발밑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디하트가 눈을 감았다 뜨자 웃자란 장미 덤불이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이 모든 게 일시에 일어났다.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에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지독한 이질감이 그의 몸을 감쌌다.
“설마…….”
“디하트 클레이턴 인버네스.”
당황스러움에 멈칫했던 디하트는 갑자기 들린 자신의 풀네임에 몸을 크게 떨었다. 시선을 내리자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서늘한 빛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한 건가?”
디하트가 어느새 자신을 에워싼 덤불을 둘러보며 말했다. 붉고 하얀 장미들이 그를 감싸듯 피어나 있었다.
“그래요.”
“무엇 하러.”
디하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창백한 두 뺨과 꾹 다물린 입술이 고집스러웠다. 그러나 눈꺼풀 아래 잠긴 눈동자는 아직도 툭하면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난 원래 이런 놈이었어. 당신과 한 약속은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거였다고.”
장미 덤불로 둘러싸인 남자가 날카로운 웃음을 내보였다. 독을 바른 가시처럼 비참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 아름답고 처연했다.
“미친 새끼와 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잖아.”
자조 섞인 목소리가 발밑에 고였다. 세벨리아는 그를 바라보다 문득 온실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성인의 후광처럼 그의 뒤편으로 피어난 붉은 장미가 그 시간을 불러왔다.
숨 막히는 장미 향기와 사방을 둘러싼 높다란 유리, 그 위로 쏟아지듯 내려온 강렬한 햇빛과 그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디하트. 증오와 경계심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조금이라도 다가서면 가시를 세우던 그때의 그가 지금 이 순간과 겹쳐졌다.
그래서였을까. 세벨리아는 가슴 속을 채우던 불길 같은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건 성난 어린아이가 울부짖다 눈물을 흘리는 걸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어리숙하네.’
당신도, 나도 말이야.
세벨리아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오늘 일로 확실해졌다. 역시 자신은 그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사실 힐렌드 홀을 떠날 때도 그랬었다.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고 울부짖기를 바랐으나, 그로 인해 삶의 의지를 잃고 죽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냥, 그가 자신만큼 아프기를 바랐을 뿐이다.
‘내가 겪은 고통만큼, 그 슬픔과 울분을 당신도 겪어 보길 원했을 뿐이야.’
세벨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아직도 그를 향한 원망은 남아 있었다. 그가 보였던 냉대와 무시, 그것에 동조해 자신을 괴롭혔던 힐렌드 홀 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가슴 깊이 뿌리내린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걸 느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흔들리는 디하트의 모습을 보면서.
수치스러울 만큼 이기적인 방식이었으나 동시에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세벨리아는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다만 받아들이기 힘겨워 무시했을 뿐. 하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외면하는 동안, 디하트는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그건 안 돼.’
당신은 이렇게 멋대로 상처를 입어서도, 죽을 위기에 처해서도 안 된다고.
‘내 안의 원망이 모두 풀릴 때까지.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세벨리아 인버네스의 삶에 발목 잡히지 않을 때까지…당신은 상처 하나 입어서는 안 돼.’
어떻게 보면 섬뜩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그리 잘못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만약 제 안의 응어리가 모두 풀리는 때가 온다면 세벨리아는 비로소 벨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 그를 향한 모든 분노와 원망 따위는 한 줌도 남지 않은 채로.
‘그러면 나도 당신도 비로소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
생각을 정리한 세벨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디하트의 몸이 움찔 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세벨리아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그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생각을 바꾸게 할 필요가 있었다.
“내 눈 똑바로 봐요. 손 놓으려 하지 말고.”
“…….”
“그리고 미쳤다는 말로 상황을 회피하지도 말아요.”
디하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이건 그의 예상 밖이었다. 세벨리아는 그를 붙잡아 두고 이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주 말을 못 섞을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라서. 한바탕 쏟아 내고 나니 이제야 정신이 드나 봐요. 주위 풍경이 바뀐 것도 알아차리고.”
혼란스러운 그를 향해 따끔한 질책이 가해졌다.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을 가장했다.
“…이 정도로 바뀌면 누구든 알아차릴 거야.”
나름대로 자존심을 세운 것이었으나 세벨리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풍경은 알아차렸지만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봐요.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건가.”
“그건.”
디하트가 허를 찔린 듯 말을 더듬었다. 광인처럼 폭주하던 그의 기세는 어느새 한풀 꺾여 있었다. 그걸 확인한 세벨리아가 살짝 어조를 누그러트렸다.
“당신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퍼붓고 자리를 떠나려 하면 안 되죠. 내가 아닌 그 누구를 상대로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에요.”
“…….”
“혹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인버네스 공작이 아니라, 몸만 큰 어린애인가요?”
서늘한 목소리는 정확히 디하트가 잘못한 점만 지적했다. 사감 하나 섞이지 않은 사무적인 어조에 흥분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디하트의 가슴이 가라앉았다.
“주제 파악을 하겠다는 게 이런 의미인 줄은 몰랐어요. 멋대로 약속을 깨 놓고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당신이 말하는 자신의 위치라니. 내가 뭘 몰랐네요.”
디하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방금 전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그런 게 아니야.”
디하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세벨리아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깜빡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가지런한 입술이 몇 번이나 서로 맞부딪히고, 이내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언이었어. 당신을 보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당신을 몰아붙이다니, 그런 일을 내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슬픔에 짓눌린 눈꺼풀 아래, 금빛 눈동자에 다시 한번 물기가 어렸다.
“내가 감히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점점 내려앉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디하트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꽃향기로 가득했던 평원이 다시 평범한 천막으로 돌아왔다. 기적 같은 변화에 디하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벨리아는 그가 정신 팔린 사이, 침대 쪽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래요.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이리 와요.”
역시 인버네스의 남자들은 일단 기를 꺾어 놔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편협한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불어넣을 수가 없었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죠. 나도 아픈 사람 상대로 심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으니까.”
손등에 난 생채기도 치료하지 않고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세벨리아는 혀를 차며 대충 놓여 있던 구급상자를 열었다. 디하트는 젖은 눈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다 그 옆에 시무룩하게 앉았다.
“고마워.”
그러더니 순순히 손을 내놓았다. 어쩐지 조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세벨리아는 제 착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윽!”
손등 위로 들이부어지는 소독약에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처치에 비해서는 별거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요.”
세벨리아는 워츠에게서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핀셋을 들었다. 잘 보니 손등뿐만 아니라 팔다리 곳곳에 생채기가 있었다. 문제는 상처 안에 정체 모를 파편이 박혀 피가 멎지 않는다는 것.
“이런 꼴로 잘도 소리를 질렀군요.”
핀셋이 가차 없이 상처 속을 헤집었다. 디하트는 신음 한 번 흘리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통을 견뎠다. 방금 전까지 천막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 댄 것에 비해서는 초라한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