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화(8/171)
한편, 세벨리아는 디하트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제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플로라의 팔찌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목록으로만 기억하고 있지,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확실해.’
세벨리아는 확신했다. 보석과 금으로 과실과 이파리를 엮어낸 팔찌. 그건 인버네스와 혼담이 오갈 무렵, 최신 유행을 좇던 넬리아가 고른 물건이었다. 더불어 순식간에 유행이 지나서 소식이 느린 북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기도 했고.
그런 액세서리를 플로라가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오기 전부터 심한 사치 때문에 디하트에게 여러 번 혼났으니까.
‘왜 갑자기 이 구석진 방까지 찾아와서 횡포를 부리나 했더니.’
세벨리아는 팔찌를 보고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가져온 재산에 손을 댔구나.’
그래서 공작부인만이 출입 가능한 지하 금고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세벨리아의 머리는 기민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는 데니사를 통해 디하트에게 편지를 보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물건이 거기 없을 텐데, 부탁해서 들어가 봤자 뭐 하겠는가. 세벨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참금이 플로라의 손에 들어갔다는 걸 확인한 이상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흥. 이제 할 말이 다 떨어졌나 보지.”
그사이, 플로라는 기운이 붙었는지 갑자기 기세등등해졌다. 그녀는 주위를 흘긋 돌아보더니 열려 있는 커튼을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 감히 자신과 시선을 맞추지도 못하는 세벨리아를 향해 속삭였다.
“여태껏 하던 대로 해요, 응? 죽은 듯이 처박혀만 있으라고.”
“…….”
“자기가 나서면 일이 어그러지기만 한다는 걸 언제쯤 깨달을는지, 참.”
플로라의 손가락이 세벨리아의 뺨을 길게 쓸어내렸다.
‘그때 확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플로라는 아쉬움에 찬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디하트와 잡종 사생아와의 결혼이 확정된 날. 그와의 장밋빛 미래가 산산조각이 난 그 끔찍한 날. 창자를 불태우는 쓰디쓴 고통에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가.
[왜, 도대체 왜? 오라버니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에 희생되어야 하는데요!]그녀는 선대 공작이 정한 바보 같은 조약 따위 지킬 필요 없다며 날뛰었다. 어머니 또한 제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디하트는 냉정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의무에 이유를 묻다니. 정말 어리구나, 플로라.]그렇게 말하는 디하트 또한 제대로 된 꼴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일으킬 것만 같은 얼굴. 초췌하다 못해 엉망인 꼴. 그럼에도 그는 중앙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름밖에 모르는 그의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지를 이어받기 위해서.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그는 자신의 예상대로 무지한 얼굴을 한 여자 하나를 데려왔다. 그 둥그런 눈과 입술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크게 갈겨 놓은 듯한 역겨운 사생아를.
[오라버…….]플로라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그에게 반가이 인사하려 했다. 그 사생아를 향한 오라버니의 눈빛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부인, 그렇게 넋을 놓아서야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습니까?]자신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눈빛이었다. 여동생을 향한 배려가 아닌, 가족을 대하는 무심함이 아닌. 피어오르는 호감과 강렬한 경계심 사이에서 불똥처럼 튀어나오는 그 끔찍한 불꽃.
그녀는 그것을 보고야 만 것이다.
* * *
“하아.”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플로라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였다.
세벨리아의 발칙한 배신이 밝혀진 이후로 오라버니는 그녀를 다시는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가족을 대하는 무심함도, 혈육을 향한 배려심도 없는 그 싸늘한 눈이라니!
플로라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누르며 세벨리아의 두 어깨를 잡아 쥐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할게요, 세벨리아.”
‘이쯤 하면 경고가 됐겠지.’
플로라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세벨리아의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승리감을 맛보며 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플로라.”
세벨리아가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일어나리라 생각조차 못 해 본 일이었다. 그 나른한 음색에 플로라는 머리끝까지 불쾌감이 치솟았다.
“지금 날 부른 거예요?”
플로라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세벨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오신 김에 저와 잠깐 대화라도 나누고 가시죠.”
세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비굴함 하나 없이.
‘감히…….’
플로라의 연한 금빛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대화를 하자고. 하, 대화라. 믿을 수가 없네.”
“…….”
“그런 건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나 할 수 있는 사교활동이죠. 당신과 내가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플로라가 손가락으로 세벨리아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는 뒤돌아 소리 높여 비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자기가 진짜 제대로 된 공작부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
세벨리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분노나 억울함 같은 감정 따위는 한 줌도 담기지 않은 서늘한 눈은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다 곧 수면 아래로 깊게 가라앉았다.
잠시 뒤, 세벨리아는 방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한 채 지나치는 하인들을 뒤로하고 긴 회랑으로 내려갔다.
회랑 한쪽 벽면에 줄지어 걸려 있는 역대 공작과 공작부인의 초상화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군요.”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 회랑 가장 안쪽, 가장 거대한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긴 흑발을 아름답게 늘어트린 여인과 그녀의 등 뒤를 지키듯 서 있는 한 남자의 초상화. 그건 바로 초대 인버네스 공작과 그 부인의 초상화였다.
“저주받은 공작부인….”
신비로운 미소를 띤, 초대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세벨리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벨리타 인버네스.
당대 살아 있는 공작부인을 저주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끔찍한 존재.
그녀가 바로 제게 빼앗긴 지참금을 돌려줄 존재이자, 플로라의 겁 없는 성격을 혼내 줄 천사였다.
“잘 부탁드려요, 벨리타.”
세벨리아의 손끝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 * *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지 한나절 만에 디하트는 라이언과 단둘이 항구도시를 빠져나와 북부로 향했다.
“공작님, 마리아가 지친 것 같습니다.”
라이언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삐를 잡아 쥐었다.
“근방에서 하루 이틀 정도 머물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간이 없어.”
“이대로 강행했다간 마리아와 세스틴 모두 죽을 겁니다.”
라이언이 혀를 빼물기 시작한 디하트의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빌어먹을.”
디하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라이언의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타고 온 말은 이미 탈진 직전이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만 해도 충분히 수고를 다한 셈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오른쪽으로 튼다.”
한숨과 함께 디하트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의 뒤로 라이언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삼십 여분이 지나 디하트는 떠들썩한 중소 교역 도시에 다다를 수 있었다.
“행운이 함께하시길.”
위장 신분패로 대충 관문을 통과한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먼저 여관에 들어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싸구려 술을 들이켜다 기가 막힌 말을 듣게 되었다.
“거 북부 공작부인 아랫도리 한 번 보려는 놈들이 줄을 서 있다며?”
“아서라, 귀부인 눈에 너 같은 놈이 찰 성싶냐. 기사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그 방 앞을 둘러싸고 있다더만.”
더러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놈들의 발치에는 읽다 버린 일간지가 놓여 있었다.
린 포스트.
그 가증스러운 이름을 확인한 디하트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주인님.”
라이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기다려라.’
디하트는 라이언에게 눈짓했다.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은 새벽 느지막이 문을 나섰다.
검은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 * *
방으로 돌아온 플로라는 여느 때처럼 보석함을 열어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는 아직도 그 지하에 갇혀 있었을 거야.”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듯 꿀이 떨어지는 얼굴로 반짝이는 보석과 장신구들을 응시했다.
이 귀여운 아이들이 그 사생아 때문에 햇빛 한 번 못 보고 지하에 갇혀 있을 때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아팠다.
‘난 이 아이들을 구해 준 은인이나 다름없어.’
플로라는 벅찬 마음으로 차고 있던 팔찌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기가 순식간에 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뭐야. 누가 난방을….”
이어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먹먹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우우우-
“이게 무슨 소리야?”
플로라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굳게 닫힌 문틈으로 하얀 손가락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그 손은 끝에서부터 조금씩 형체를 불리더니 마침내 피 흘리는 여인이 되어 플로라의 앞에 나타났다.
“꺄아악!”
의자가 나동그라지고, 색색의 보석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유령이 플로라를 향해 손을 뻗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전하, 공작……전하. 왜 저를…….아아. 나를, 왜……?]“……!”
플로라는 입을 틀어막은 채 뒷걸음질 쳤다.
‘저주받은 공작부인!’
그녀는 반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리가.’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초대 살인귀 공작에게 목이 잘려 죽은 공작부인. 그건 인버네스가 저주받은 공작가라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새로운 공작부인이 나타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저주를 퍼부었다. 인버네스 공작은 자신의 것이며, 이 저택의 모든 것 또한 자신의 소유라고 외치면서.
‘그런데 왜 날? 나는 진짜 공작부인도 아닌데……!’
플로라가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는 순간이었다.
[너구나. 새,로운 공작……부인. 내 자리를 빼앗은-.]피 흘리는 공작부인의 유령이 갑자기 플로라의 눈앞으로 이동하더니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정확히 팔찌가 있는 자리였다.
[내 물건. 감히…… 내, 것을 탐…내다니……!]“꺄아아악!”
비명이 천장을 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