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1)화(81/171)
“일행 중에 귀족 가의 여식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설마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요?”
리시아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는 평민인 세벨리아가 디하트와 함께 공관에 머무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려 말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렸다고는 하나,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업신여김을 디하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알 만하군.’
디하트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타 도시와 교류가 적고 이렇다 할 이득이 없어 다른 귀족들로부터 영지가 노려진 적도 없는 귀족들은 대부분 지극히 보수적이고 낡은 사고관을 가지고는 한다.
이를테면 평민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거로도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종류의 사고관으로, 중앙이나 북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생각들.
‘그런 종류의 귀족이라는 건가. 허허실실 대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인물이군.’
리시아의 서늘한 녹색 눈이 세벨리아를 향하는 걸 본 디하트가 입매를 굳혔다. 그녀가 어떤 인물이든, 무슨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오만한 태도가 세벨리아를 향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쪽은 벨라라고 하네. 웬만한 귀족 가의 여식들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 소중한 일행이지.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없으면 좋겠군.”
디하트는 세벨리아를 에스코트하듯 일부러 그녀의 허리 뒤쪽에 팔을 뻗었다. 몸이 닿지는 않았으나 그가 그녀를 평범한 평민처럼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은 리시아뿐만 아니라 공관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에게도 한눈에 들어왔다.
‘공작가의 일원이 아닌 한낱 의원 일행이 함께 머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세벨리아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리시아의 무감정한 녹색 눈에 한순간이나마 짜증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세벨리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요.”
금세 무심하고 도도한 얼굴로 돌아온 리시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리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장갑을 낀 손을 그대로 내밀었다.
“반갑군요. 나는 이곳 서프레디를 대대로 다스려 온 서프레디 남작의 장녀이자 그분의 후계자인 리시아. 부를 때는 그저 아가씨로도 충분해요.”
말하는 어투와 품새가 몹시 오만했다. 마치 이번 한 번만은 자신이 참고 넘어가 준다는 듯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중앙에서는 아무리 귀족이라 하더라도 평민에게 이리 무례하게 굴지 않았는데.’
귀족이 손대지 않는 영역을 채우는 게 바로 평민으로 구성된 전문인력들이었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웬만한 지방 귀족들보다 막대한 재산을 구축한 경우도 있어, 귀족들은 그들을 내심 무시하더라도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그녀는 잠시 리시아를 바라보다 답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오만함이 제게 해가 되는 종류만 아니라면 딱히 상관없었으니까.
“벨라라고 합니다. 머무를 곳을 내어주신 데에 감사드려요.”
“그래요.”
세벨리아의 인사를 짧게 넘긴 리시아는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가 찰랑거리도록 고개를 휙 틀어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에 고혹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그나저나 때맞춰 공작님을 뵙게 되다니 참 운이 좋군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공작님과 급히 의견을 나누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물론 동행해 주시겠지요?”
“나와? 웬만한 일이라면 이미 의견 교환이 끝난 거로 아는데.”
디하트가 귀찮다는 듯 말하자 리시아가 아미를 좁혔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우아한 외모와 어울려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긴급한 일이에요. 협곡 아래에서 발견된 약초들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어쩔 수 없군. 빨리 끝내도록 하지. 오늘 안으로 돌아올 테니 함께 저녁을 들죠, 벨라.”
약초와 관련된 일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세벨리아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니. 디하트가 한숨을 삼키며 공관 안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불러 세벨리아를 방까지 안내하도록 했다.
“마차를 대기시켜 놨어요.”
리시아가 사뿐하게 걸음을 옮기며 디하트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그들을 응시했다.
디하트가 리시아와 함께 공관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제 손으로 문을 열어 주며 리시아를 앞서가게 했고, 그녀는 감사 인사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친절하시네요.”
리시아는 디하트에게 살짝 몸을 기대며 읊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리시아가 디하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틀었다.
진득한 늪처럼 짙은 녹색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리시아는 세벨리아를 위아래로 훑고는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돌렸다.
“아하.”
세벨리아는 그제야 리시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이유에 평민이라는 제 신분 외에도 다른 게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에서 찬웃음이 흘러나왔다.
‘일이 귀찮게 됐네.’
세벨리아는 디하트가 사라진 자리를 서늘한 눈으로 한 번 훑고 기사의 안내에 따라 홀을 떠났다.
* * *
밤이 오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디하트는 공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서 묵고 오는 것 같던데요.”
“그래요?”
“며칠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던 것 같았어요.”
클로드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당신은 또 섣부르게 행동하네.’
디하트가 협곡 아래의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세벨리아를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은 단순히 성유물을 잘못 건드린 탓에 사고가 일어났다 알고 있었다.
헨킷이 사고의 주원인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는 세벨리아는 그의 무신경함에 미간을 좁혔다. 디하트는 아직 상처 안에 남아 있는 미세한 파편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제 그냥 붙잡아 놨어야 했어.’
뒤늦게 혀를 차며 세벨리아가 클로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어째선지 워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워츠 씨는 어디 계세요?”
“아,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기사들이 약초꾼들이 숨겨 놓은 약초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데려가더군요.”
“그런 일도 있었군요.”
세벨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쩐지 협곡에서 기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약초꾼들을 대하고 있다 했다. 푸른 눈을 몇 번 깜빡인 세벨리아는 곧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왔다.
“…….”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공관의 사용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몇 차례 마주쳤다. 그들은 서프레디 남작 저택에서 온 이들로, 비어 있던 공관을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리시아가 직접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세벨리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에 이유 모를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때마침 맞닥뜨린 어린 하녀 한 명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아침 바람이 차가운데 방으로 돌아가시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활짝 웃으며 건네는 말에 명백한 빈정거림이 실려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아, 혹시 공작님을 기다리시는 거라면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리시아 아가씨께서 그분을 극진히 모시고 계실 테니까요.”
입꼬리를 올려 웃은 여자가 빨래 더미를 가득 안고서 세벨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기시감이 든 세벨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시아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평민 주제에 감히.”
사용인이 낮게 속삭이며 세벨리아를 의기양양하게 스쳐 지나갔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했다.
“하.”
회랑에 홀로 남겨진 세벨리아가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설레설레 내젓는 고갯짓에 어처구니없는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리시아 영애의 짓이로군.’
이렇게 티 나는 견제와 비웃음이라니. 화도 나지 않았다. 세벨리아는 사용인이 사라진 곳을 흘긋 바라보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꺄악!”
그러자 자그마한 쥐 떼가 회랑 저 너머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빨간 눈을 번뜩이는 회색 쥐들이 기다란 꼬리를 흔들며 사용인의 발치를 뛰어다녔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무언가를 내던지는 소리와 함께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세벨리아는 작은 한숨과 함께 손을 작게 휘저었다. 버려진 빨래 더미를 파고들던 쥐들이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세벨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하녀가 도망친 쪽을 바라보다 중앙 정원으로 나왔다. 어쩐지 예전과 달리 제 성격이 좀 흉포해진 것 같았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곧 자신의 성격이 변하게 된 이유를 찾았다. 클로드와 디하트 때문이었다. 고집불통을 하나도 아닌 둘이나 상대하다 보니 제 성정이 거칠어진 것 같았다.
“언제 돌아오려나.”
중앙 정원으로 연결된 회랑은 홀까지 뻗어 있어, 이곳에 있으면 누가 공관을 드나드는지 한눈에 보였다. 리시아가 이곳에서 디하트를 기다린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일단 돌아오면 상처부터 치료하게 하고…….’
디하트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가며 정원을 걷던 세벨리아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하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평민 주제에 감히.]그래, 연구소가 아닌 이곳에서 ‘벨라’는 한낱 평민이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능력도 없는 고만고만한 평민 여자.
‘과거의 나였다면 같은 상황임에도 무시당하지 않았겠지.’
차가운 비소가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흠잡을 곳 없는 가문 태생의 여식이었으니까.’
원해서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무시하지 못할 가문의 이름들이 따라붙었다. 중앙의 명문가 웨든. 그다음은 북부를 호령하는 공작가 인버네스.
그래서일까. 집안에서는 언제나 천덕꾸러기에 짐덩이 취급을 받은 세벨리아일지라도,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새삼스럽네.”
자신을 옥죄고 있던 족쇄가 자신을 다른 이로부터 막아 주는 방패로도 기능했다니. 세벨리아는 그 불쾌한 모순에 감탄을 터트렸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딱히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허무함을 느낀 세벨리아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정원에서부터 쭉 뻗어 나간 회랑 너머, 널따란 홀 저편의 묵직한 문이 활짝 열렸다. 역광과 함께 긴 그림자가 홀의 바닥을 장식하고, 곧이어 거침없는 발걸음 소리가 텅 빈 회랑을 울렸다.
디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