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2)화(82/171)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홀을 가로지르던 디하트는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쯧.”
그렇지 않아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서프레디 남작가의 사람들을 떨쳐 내느라 한껏 짜증 나 있던 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하며 머리를 누르던 손을 떨어트렸다.
“벨라.”
당황한 듯 떨리는 입술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갔다. 회랑 너머, 한 아름 피어난 꽃들 사이에 서 있던 세벨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왔다.
“늦으셨네요.”
담담한 목소리는 타박하는 어조도, 책망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더 디하트의 가슴을 선뜩하게 만들었다. 차분한 눈빛은 그로부터 단편적인 사실들을 바라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렇게까지 늦은 이유와 안색은 왜 이 모양인지 하는 것들.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자던 약속을 기억은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젠장.’
디하트는 세벨리아에게 티가 나지 않도록 입 안쪽의 이를 사리물었다. 제 입으로 저녁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말해 놓고 약속을 깨다니. 수치심과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면.”
디하트가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떼고 별 볼 일 없는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순간이었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푸른 눈이 미련 없이 방향을 달리했다.
세벨리아가 몸을 돌리며 산뜻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홀을 울렸다.
“아침이 돼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길래 남작님의 저택에서 묵고 오시는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바쁘셨을 텐데 올라가서 쉬세요.”
담백하기까지 한 태도에 디하트는 당황했다.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얼어붙어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이윽고 세벨리아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렇지 않아. 묵고 왔다니, 남작의 저택에 있는 침구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어.”
“그러셨군요.”
“왜 믿지 않지? 정말로 베개에 머리 한 번 대지 않았어. 물론 저녁 약속은…….”
세벨리아의 뒤를 졸졸 쫓으며 변명을 주워섬기던 디하트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일레이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세벨리아의 소매를 아주 살짝, 정말 살짝 붙잡았다.
“앗.”
갑자기 팔이 붙잡힌 세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았다. 그녀가 무심코 디하트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였다.
“이야!”
두 사람을 발견한 일레이가 활짝 웃으며 복도를 뛰어 달려왔다. 퀭한 눈과 거칠어진 뺨이 밤새도록 서프레디 남작과 리시아에게 시달린 디하트 못지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벨라 양. 그리고 공작님. 세상에, 정말 일찍 돌아오셨군요. 저희가 밤새 숙소에 있던 짐과 서류들을 옮기고 정리한 뒤에 말입니다!”
“…….”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일레이가 일부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제가 공작님의 집무실을 제대로 정리했는지 확인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밤을 꼴딱 새운 사람 특유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본 디하트가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가 비뚤어진 미소와 함께 일레이를 쫓아내려던 때였다.
“일레이 경.”
세벨리아가 그의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일레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피로에 찌든 회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이자 세벨리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공작님은 저와 선약이 있으셔서요. 아무래도 집무실을 둘러보시는 건 나중으로 미루셔야 할 것 같아요.”
나지막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일레이의 귓가에 감미롭게 흘러들었다.
“집무실을 둘러보는 건 일레이 경이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에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주방에서 밤을 새운 기사분들을 위해 버터를 얹은 새끼 양 구이를 하는 것 같던데… 일레이 경께서는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요?”
부족한 잠으로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였던 그는 세벨리아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렇지 않아도 미친 듯한 허기가 그를 괴롭히던 참이었다.
“새끼 양 구이요? 세상에…….”
“다른 분들은 이미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가시는 게 좋으실 것 같네요.”
때마침 운 좋게 바람이 한차례 복도를 휩쓸었다. 덕분에 오븐에서 지글거리는 고기 냄새가 그들의 코끝을 스쳤다.
“이 자식들이 나만 빼놓고…! 정말 고맙습니다. 벨라 양. 공작님, 그러면 잠시 후에 뵙죠!”
입맛을 다신 일레이는 겨우 인사를 건네고는 힘차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디하트는 자신의 기사가 세벨리아에게 손쉽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말을 잃었다. 그런 그를 돌아보며 세벨리아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요.”
“…….”
“어제저녁에 당신에게 건네주려 한 게 있었거든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맞물었다. 어째선지 자꾸만 심장이 밑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 *
세벨리아는 뒤따라오는 디하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일레이가 이용한 계단을 이용해 바로 올라가면 될 것을 일부러 복도 끝에 위치한 계단으로 갔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사용인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디하트가 목줄 풀린 대형견처럼 세벨리아의 뒤를 쫓으며 안달 난 목소리로 물었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없는 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지 한번 말씀해 보세요. 들어보고 판단하죠.”
“남작의 집에서…….”
“그 이야기라면 됐어요. 궁금하지 않으니까.”
“벨라.”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세벨리아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디하트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세벨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공작님.”
“응.”
“지금 이 순간이 참 신기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안개처럼 희미했다. 푸른 눈이 그를 들여다보듯 응시했다.
“뭐?”
“잘 들리지 않나 봐요. 그럼 고개를 숙여야죠.”
집중해서 듣지 않고서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어째선지 디하트에게만은 정확히 들렸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그가 벙찐 채 멍하니 있자 세벨리아가 한 걸음 다가오며 그의 옷깃을 손에 쥐었다. 힘을 하나도 주지 않은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디하트는 그녀의 뜻대로 허리를 숙였다.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푸른 눈. 그리고 해사하게 웃는 아름다운 미소까지. 정오의 복도에서 디하트는 묘한 부유감을 느꼈다.
분명 복도를 지나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시야 바깥을 스쳐 지나가는데, 감각은 오직 그녀와 자신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자신만이 진짜라며 두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유리시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그녀와 자신만이 진짜였다. 그 외에는 모두 덧없는 먼지였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벨, 라.”
디하트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눈웃음을 머금고 있던 푸른 눈 위로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
파삭,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던 부드럽고 달콤한 공기가 깨져 나갔다.
“난 정말 당신이 신기해요, 디하트.”
피식 웃음을 흘린 도톰한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비수가 튀어나왔다.
“나는 당신에게 내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 달라 무릎 꿇고 빌어야 했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뒤를 쫓아다니며 뻔뻔스럽게 당신의 변명을 늘어놓잖아.”
“……!”
“내가 굳이 당신이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 내게 도움이 되니 어쩔 수 없네요.”
세벨리아가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그의 옷깃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툭툭 먼지라도 묻은 것처럼 두 손을 털어낸 세벨리아가 웃으며 속삭였다.
“좋아요, 당신의 변명을 들어 보도록 할게요.”
“벨라.”
목이 막히는 듯한 음성으로 디하트가 그녀를 불렀다. 세벨리아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더없이 상냥하고 달콤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 말이 ‘내 시간을 방해할 만큼 가치 있는 용건이길 바라죠.’”
나지막이 속삭인 목소리는 멀리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디하트의 심장을 꿰뚫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내 시간을 방해할 만큼 가치 있는 용건이길 바라죠.]“아.”
그의 업보가 돌아와 다시 한번 그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창백한 날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은 누구의 것인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벨, 라.”
당신도 이렇게 아팠나.
그러나 고통에 빠져 있을 시간은 잠깐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디하트는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두고 자리를 떠나 버린 세벨리아의 뒤를 쫓으며 수치스러운 고통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발을 질질 끄는 듯한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세벨리아는 푸른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역시 단순한 죄책감만은 아니야.’
그랬다면 저렇게 심장이 쥐어뜯긴 것처럼 고통스러운 눈빛을 하지는 않겠지. 세벨리아는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손을 말아 쥐었다.
협곡에서 다친 그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 그녀는 그의 절망과 후회의 뿌리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자신에게 휘둘리는 것인지, 아니면 한때나마 곁을 채웠던 존재가 사라졌을 때 느낀 상실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우습게도 당신이 나를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