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3)화(83/171)
그녀는 경험이 적고 스스로의 감정에도 둔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게 눈치가 없고 멍청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세벨리아는 은연중에 제게 매달리는 디하트의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지독한 절망과 후회를 두 눈에 담고 있으면서도 결코 제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집념을, 목숨이 위험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죽는 모습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그 광기에 가까운 고집을.
그리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는 세벨리아를 ‘잃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을 말이다.
‘내 착각이 아니었어.’
연구소에서 자신은 기억을 잃은 적 없다며 매달리던 디하트. 자신은 그에게 ‘주제넘지 말라’는 말을 받았던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 뒤 보인 그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듯한 처절한 얼굴. 그걸 본 순간 세벨리아는 끔찍한 전율과 함께 저열한 고통을 느꼈다.
‘이제 와서 왜…….’
하지만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은 연심이 아니라 공작으로서의 책임감,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였다.
[물론 그 말이 ‘내 시간을 방해할 만큼 가치 있는 용건이길 바라죠.’]디하트의 귓가에 그가 제게 내뱉은 말을 불어넣은 건. 그가 어떤 방식으로 흔들리는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의 집념과 죄책감 아래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세벨리아는 한때 자신의 가슴을 난도질했던 그 단어들을 서슴없이 입에 올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예상대로인 것 같았다.
끔찍하게 일그러지는 태양 같은 눈동자, 불안하게 흔들리는 호흡. 불길처럼 뜨거웠던 체온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고, 그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공기는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하아.”
세벨리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떴다.
그래, 그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건 치가 떨리는 연정이었다. 너무 늦게 싹을 틔워 한 줌의 빗방울조차 받을 수 없는 불행한 새싹이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구나. 그래서 나를 잃은 뒤 절망했고, 더 이상 내 죽음을 견딜 수가 없는 거였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에게서 더 이상 알아낼 건 없었다. 세벨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창문을 훑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그의 얼굴이 창에 비쳐 보였다.
태양처럼 빛나던 두 눈동자는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그 위로 조금씩 하늘을 덮기 시작한 먹구름이 보였다.
“아.”
세벨리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원의 흙 위로 비가 떨어져 내렸다.
* * *
“비가 들이칩니다.”
젊은 집사 한 명이 창문을 닫으며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한창 편지를 쓰는데 골몰하고 있던 그는 뒤늦게 고개를 치켜올리며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이거 종이가 다 젖을 뻔했군. 고맙네. 빗소리가 거친 걸 보니 폭풍우인가 보군.”
라이언은 인상을 찡그리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급한 마음에 휘갈긴 글씨의 마지막 단어마다 잉크가 지저분하게 튀었다.
“서두르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셔도 되지 않을까요.”
젊은 집사가 퀭한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플로라 아가씨, 아니. 플로라 양까지 탑에 억류된 데다 림스 후작께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힐렌드 홀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고 계시니…….”
바로 어제, 플로라가 주최하는 연회가 열렸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과 잔마다 넘실거리는 샴페인의 반짝임.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아쉬움과 질투심을 삼키며 언덕 위의 저택을 바라보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비단과 보석을 몸에 두른 채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라이언은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급습했다. 연회장은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경악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게 무슨…!] [출입구를 봉쇄하고 아가씨를 모셔라.]묵직한 저음이 연회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무거운 연회장의 문을 닫고 플로라를 에워쌌다.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대화하던 귀족들이 놀란 낯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플로라 로에날 인버네스. 힐렌드 홀의 주인이자 북부의 호령자 인버네스 공작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간부터 그대를 탑에 구금한다. 혐의는 사리사욕을 위해 가문의 재산을 은닉, 횡령하여 착복한 죄이다.]플로라는 감히 도망칠 수도 없었다. 기사들에게 붙잡힌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플로라는 습관처럼 림스를 찾았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라이언과 디하트의 덫에 걸려 암시장으로 떠났다.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타인의 권력에 기대 힘을 휘둘러 왔던 플로라는 그 누구보다 무력했다.
‘우스운 얼굴이었지.’
집사와 같은 장면을 떠올린 라이언은 편지 봉투 위로 녹인 밀랍을 떨어트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림스 후작은 곧 돌아올 거다.”
커튼을 치던 집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라이언은 그 기척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녹인 밀랍 위로 힐렌드 홀의 인장을 찍은 라이언은 먹색 가루를 한 움큼 쥐어 들었다. 미색의 봉투 위로 흩뿌려진 가루가 반짝이며 산화했다. 태평한 모습에 젊은 집사가 안달 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라이언 경, 그리되면 큰일 아닙니까?”
“그래. 큰일이지.”
라이언이 무심하게 말하며 집사를 응시했다.
“공작님께서 미치도록 좋아하실 만한.”
쾅! 굉음과 함께 벼락이 내려쳤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집사는 라이언이 건네준 편지를 들고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 * *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가끔 하늘을 찢는 듯한 요란한 소음과 함께 산맥 저 너머로 벼락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그때마다 세벨리아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디하트를 뒤돌아보았고, 그는 억울한 얼굴을 했다.
집무실과 디하트의 방에서 가장 먼 꼭대기 층, 그곳이 세벨리아를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소였다. 세벨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와요.”
디하트는 그래도 되냐고 물으려다 입술을 말았다. 세벨리아의 말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허튼소리로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언제나 거침없이 제 생각만 하며 거친 언사를 내뱉던 디하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시무룩한 눈으로 디하트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곧 세벨리아가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받아요.”
세벨리아가 손 끄트머리로 상자를 밀며 말했다. 탁자 위를 미끄러지는 상자를 바라보며 디하트가 두 눈을 깜빡였다.
“가져가지 않을 거예요?”
“아니.”
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 받을 거야. 뒷말을 삼킨 디하트가 손을 뻗어 자그마한 상자를 움켜쥐었다. 연약한 종이 상자는 쉽게 우그러졌고,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은 십자가 목걸이가 뭉툭한 끝을 드러냈다.
“…….”
디하트의 눈동자 위로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벨리아가 수면 위의 잔잔한 물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야가 또 당신 걸 훔쳐 왔더군요. 그대로 두면 위험해서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
디하트는 우그러진 상자 사이로 튀어나온 목걸이를 손에 얹은 채 침묵했다. 그러자 세벨리아가 손을 뻗어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잃어버리고서도 모를 정도라면 그냥 버리는 건 어때요?”
“안 돼.”
힘줄이 돋아난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목걸이를 잡아챘다. 차르륵, 은 줄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목걸이의 끄트머리를 잡고 서로를 응시했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선명하게 그를 담아 냈다. 절박함에 흔들리는 태양 같은 두 눈동자를 응시하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장난감으로 던져 줄 정도라면 그냥 버려요.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디하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린 채 숨을 컥 하고 삼켰다. 연약한 목걸이의 줄 끄트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다니,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거짓말할 필요 없어요.”
“정말이야, 세벨리아. 그리고 장난감으로 던져 줬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나는 당신이 준 걸 그렇게 함부로 취급한 적 없어.”
격한 외침 뒤로 싸늘한 읊조림이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랬어요?”
격랑에 흔들리던 금빛 눈동자가 서슬 퍼런 기세에 얼어붙었다.
“난 그때 일을 똑똑히 기억해요. 정원에서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였죠. 당신 생일을 앞두고 산 목걸이를 보고 당신은 뭐라 했었죠?”
“나, 나는.”
“당신 취향이 아니라고 똑똑히 말했죠. 더불어 성직자가 되지 않는 이상 착용할 일도 없다고 했고. 그런데 어떻게 당신 입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해요? 어떻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말과 행동이 다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목소리는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차갑고 막힘없었으나, 그녀의 푸른 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불타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고 내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어.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내 앞에서 진실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담담한 목소리로 짚어 내는 과거의 만행 앞에 디하트는 말을 잃었다. 돌이킬 수 없는 업보를 깨달은 그의 얼굴이 새카맣게 죽었다.
“그런 당신이 이제 와서 내게 매달리며 용서를 청한들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세벨리아.”
“심지어 당신은 날 벨라라고 부르라는 말마저 이렇듯 지키지 않고 있는데.”
디하트가 황급히 제 입을 가리며 침음을 흘렸다. 과거를 되짚는 동안 어느새인가 현실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가 질끈 눈을 감자 세벨리아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툭 하고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내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조차 없어요.”
“뭐?”
놀란 디하트가 저도 모르게 되물은 순간이었다.
“기억을 잃은 척해서 미안하다고 말한 것 외에, 당신이 무슨 이유로 왜 내게 미안한지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나요?”
푸른 눈이 경멸을 머금고 그를 응시했다. 그 순간 디하트는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 한 번도.
세벨리아와 마주친 이래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