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4)화(84/171)
“공작님!”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일레이가 있었다.
‘세벨리아는?’
디하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틀 내내 음식을 먹지 않은 몸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조심하십시오!”
일레이가 놀라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디하트가 멍한 얼굴로 그를 손으로 짚고 밀어냈다.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양탄자 바닥 위를 뒹구는 목걸이에 디하트는 그제야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머리를 싸맨 그가 신음을 흘렸다. 그래, 세벨리아로부터 목걸이를 돌려받은 지 이틀이 흘렀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나 있냐는 그녀의 말에 자신은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기억이 끊겼고, 정신을 차리니 일레이와 워츠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젠장.”
그 이후로 이틀이 지나도록 디하트는 세벨리아를 보지 못했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속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이리도 이기적이고 멍청한가.’
애매한 사과로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착각했다. 무엇을 잘못했고, 어떤 행동으로 내내 그녀를 상처입히고 기만했는지 따위는 무시한 채 그저 기분에 취해, 시류에 몸을 맡겨 뭉뚱그린 사과를 내던지고 자신을 받아들여 주길 바랐다.
‘어쩐지 너무 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했지.’
기억상실이라는 거짓을 고해바치며 덤으로 얹은 사과. 그건 그 자체로 세벨리아를 또다시 기만하고 업신여기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
날카로운 가시를 삼킨 기분이었다. 염치도 모르고 고통을 느끼는 몸에 디하트는 조소를 입에 물었다. 스스로를 향한 차디찬 비웃음은 공허하게 흘러내렸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자신에게 향하는 그녀의 분노를 감히 걱정이라 착각했다. 노기를 띤 푸른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야릇한 감정에 취해 헛된 꿈을 꾸었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디하트가 겨우 카우치에 드러누웠을 때였다. 집무실로 들어온 기사 한 명이 급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눈도 뜨지 못하는 디하트 대신 일레이가 기사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한 통에 몰아 쓰면 될 것을… 이런.”
편지 봉투를 살피던 일레이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하나는 오늘로부터 닷새 전, 하나는 이틀 전이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후자에는 속달 우편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급하게 속달 우편을 보낼 만큼 급한 처리가 필요한 일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공작님,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
“라이언 경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아무래도 림스 경과 플로라 아가씨의 일이 마무리되어 보내신 듯합니다만.”
“내놔.”
한팔로 몸을 일으킨 디하트가 손을 뻗었다. 일레이는 편지를 건네려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워낙 살벌했기 때문이다.
디하트는 봉투 두 개를 쥐어뜯듯이 한 번에 열었다. 첫 번째 편지는 제법 길었으나 예상했던 내용이기에 대충 훑고 넘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속달 우편이라는 도장이 찍힌 봉투에서 꺼낸 서신은 짤막했다. 겨우 몇 줄밖에 되지 않는 글이었건만 디하트는 서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차례 정독했다.
이윽고 섬뜩한 눈빛과 함께 그가 짓씹듯 읊조렸다.
“…사일러스 웨든.”
낯설지 않은 이름을 내뱉은 입술이 굳게 맞물리더니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일레이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사일러스 웨든이라면, 돌아가신 공작부인의 부친 아닙니까. 그가 라이언 경이 보낸 편지에 왜 언급되어 있는 겁니까?”
“직접 봐라.”
디하트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편지를 집어던졌다. 허공에 내던져진 편지를 재빨리 낚아챈 일레이가 내용을 읽었다. 회갈색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이게 무슨 개소리랍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돌보는 이 하나 남지 않은 공작부인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힐렌드 홀에 남겠다니… 이 작자는 도대체 뭔 생각인 건지.”
손수 공들여 만든 만찬 테이블에 누가 제멋대로 끼어든 기분이었다. 계획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뭐, 림스 후작이 무력으로 탑을 탈취하고 라쉬 일가를 빼냈다는 불법적인 정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 줄 수는 있겠군요.”
일레이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말했다. 디하트는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림스를 덫에 빠트리고 그사이 플로라를 구금하는 양동작전. 그건 눈에 보이는 대로 순진하게 림스를 쫓아내고 플로라를 가두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어차피 라쉬 일가를 계속 잡아 두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일레이의 말에 디하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디하트가 라쉬와 그렌을 구금한 명목은 바로 세벨리아에 대한 암살 의혹.
하지만 보내지 않은 암살 의뢰서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에 가문 안팎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쌓이고 있었다. 그래서 디하트와 라이언은 한 가지 계책을 짜냈다.
‘림스의 오만한 성격을 이용해 그로 하여금 절차를 무시하고 라쉬 일가를 빼내게 할 것.’
아무리 가주가 억지스러운 이유로 그들을 가두었다고는 하나 외견상으로는 상식적인 절차를 밟은 일이었다. 하지만 림스는 그런 것 따위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봉쇄한 힐렌드 홀을 억지로 뚫고 들어온 것부터 그의 오만하고 앞뒤 모르는 기질은 뻔히 드러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림스 경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영지로 방향을 틀었다 합니다. 아마도 힐렌드 홀을 무력화시키고 라쉬 일가를 빼내 올 전력을 데려오려는 거겠죠. 저희는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아마 암시장에서 유물을 얻고 희희낙락했던 림스는 라이언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불같이 분노했으리라.
“웨든 후작은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답장을 보낼까요, 공작님?”
일레이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디하트를 향해 물었다.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별안간 번뜩 눈을 떴다. 우묵한 눈썹뼈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금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스스로를 태우는 불꽃처럼 뜨겁고 격렬한 빛이었다.
“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
“공작님?”
뜬금없는 혼잣말에 편지지를 고르던 일레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디하트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가 허공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녀는 처음부터 그에게 가지 않은 거지?”
“저, 공작님……?”
슬슬 오한이 들기 시작한 일레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서려던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 힘없이 늘어져 있던 게 무색하리만치 엄청난 기세로 디하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레이 허스필드.”
“예, 옙!”
“지금 당장 중앙으로 사람을 파견해 웨든 후작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그러모아라. 기간은 지난 삼십 년으로 한정하되 하녀들부터 후작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소한 행적과 관계, 소문과 가십 할 것 없이 전부 가져와.”
“예?”
가면 갈수록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디하트의 기사이자 그의 가신이었다. 몇 번 입술을 붙였다 떼며 침음을 흘리던 그는 명징하게 빛나는 디하트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광증으로 인해 튀어나온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특히… 세벨리아가 저택 안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알아 오라고 해.”
일레이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순순히 명령에 응했다.
‘아직 완전히 미련을 버리신 건 아니었나.’
집무실을 나온 일레이는 혀를 찼다. 그녀와 닮은 벨라를 옆에 둔 이후로 죽은 공작부인에 대한 헛소리가 줄었길래 잊었나 싶었는데. 아직 완전히 잊은 건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더 이상 그녀가 억울하게 타살당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으시니 다행이야.’
이 정도까지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일레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앙에 보낼 첩자로 누구를 보낼까 머릿속으로 이름을 떠올렸다.
한편, 집무실에 남은 디하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눈으로 떨어진 은 십자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아니어야 해.”
목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고 거칠었다. 한숨도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이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끔찍한 망상 때문이었다.
‘왜, 왜 당신은 죽음을 가장하면서까지 도망쳤으면서 가족에게 가지 않았지?’
세벨리아 웨든은 웨든 후작가의 사랑받는 막내였다. 너무도 귀해 밖으로도 내돌리지 않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험한 세상의 풍파에 그 여린 뺨이 노출되지 않도록 꼭꼭 숨겨 키운 딸이었다.
그게 세상이 아는 세벨리아 웨든이었으며, 그가 알고 있는 세벨리아라는 사람의 유일한 과거였다. 비록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배신한 뒤 그와의 연락이 끊겼으나, 스무 해가 넘도록 사랑 속에 커 온 그녀라면 북부를 벗어난 뒤 당연히 제 핏줄을 찾아갔어야만 했다.
그게 웨든 후작이 되었든, 아니면 그녀의 형제자매가 되었든. 그것도 아니면 먼 친척이 되었든… 희귀병을 앓고 있는 몸을 이끌고 홀로 이 자그마한 도시로 숨어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 벨라. 제발……!”
그러나 그녀는 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홀로 제국을 횡단했다. 마치 가족이란 존재는 그녀의 머릿속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의 힘에만 의지했다.
그리고 그건 디하트가 여태껏 고수해 오던 생각을 무참히 깨트리는 아주 끔찍한 현실이었다.
[이건, 이건 모함이에요. 저는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요.]세벨리아는 정말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걸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던 걸지도…….
[제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요. 디하트, 한 번 더 생각해 봐요. 내가 당신에게 그럴 리 없잖아요.]그대로 비명 같은 절규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 디하트는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뚝뚝, 새빨간 피가 움켜쥔 십자가 위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