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6)화(86/171)
고작 편지 한 장일 뿐인데 마음속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얼시크에서 온 편지로군요.”
편지봉투 구석에 찍힌 푸른 새 인장을 본 세벨리아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그녀는 자그마한 편지가 보석이라도 되는 것마냥 조심스러운 손길로 챙겼다.
“이건 내가 들죠.”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소포 두 개를 클로드가 챙기며 말했다. 세벨리아가 앞장서 우편국을 나왔다. 산에서부터 불어온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하아.”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흥분으로 달아오른 몸이 조금 식었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제가 데니사의 연락으로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그러고 보니 아까는 클로드를 힘으로 끌고 가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금 얼굴에 열이 확 돌았다. 입술을 깨문 세벨리아는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멈췄다.
“벨라?”
클로드가 왜 그러냐는 듯 묻자, 세벨리아가 몸을 틀어 겸연쩍은 얼굴로 사과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제가 어린애처럼 굴어서 당황하셨죠. 변명이라기엔 뭣하지만… 사실 내심 답장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 봐요.”
세벨리아가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겨우 말을 꺼냈다.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클로드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충분히 이해하니까. 기다렸던 사람에게서 온 소식이죠?”
“네.”
세벨리아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잘되었다는 듯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관 건물이 슬슬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세벨리아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 데니사의 편지를 뜯고 싶은 마음에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걸 알아챈 클로드가 웃으며 보조를 맞춰 주었다.
구름 위를 날 듯 거침없이 나아가던 발이 멈추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 때문이었다.
“서프레디 남작에게 사두마차가 있었던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을 텐데, 하고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공관 앞의 대로를 가득 메우다시피 한 건 거대한 마차였다. 네 마리 말이 호화스러운 하얀 마차 앞에 매인 채 포석을 탕탕 내리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달라붙겠다 이건가.’
클로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칼 어펜츠 행세를 하느라 디하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그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소박하게나마 영지를 잘 꾸려 나가는 데 만족하는 서프레디 남작과 이렇게 눈에 띄는 일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야망으로 불타는 그의 딸인 리시아의 짓이리라.
그의 추측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마부가 뛰어내려 마차 문을 열자 리시아 영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 하얀 목선을 드러낸 리시아는 한 송이 백합처럼 아름답고 고아했다. 몸을 부드럽게 감싼 은백색의 드레스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예스러웠다.
“조심하세요, 아가씨.”
하녀의 에스코트를 받아 땅에 발을 디딘 리시아의 눈이 세벨리아와 마주쳤다.
“어머.”
싱긋 웃은 리시아는 세벨리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곧 공관 관리인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그렇지 않아도 방금 휴식에 들어가셨다 합니다.”
“때를 잘 맞췄구나.”
리시아는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공관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가족을 반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들어가죠, 벨라.”
클로드의 말에 세벨리아는 제가 멍하니 리시아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편지가 든 가방을 움켜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죠.”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들뜬 공기가 그녀를 반겼다. 저편에서부터 들리는 속삭임이 모두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리시아와 디하트가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계단 난간을 쥔 그녀의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 * *
세벨리아의 예상은 적중했다. 리시아의 지시하에 파견된 서프레디 남작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그녀와 디하트의 염문을 바라고 있었다.
“인버네스와 인연을 맺는다면 서프레디가 살아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때야말로 리시아 아가씨의 시대가 오는 거지.”
가문과 영지의 부흥. 서프레디 남작가의 중앙 진출. 리시아의 소망과 다름없는 그것을 사용인들은 자신의 염원처럼 받아들이고 이루어지길 원했다.
디하트의 정체와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 밖으로 퍼지지 않은 것도 사실은 그 덕이었다. 그를 독점하길 원하는 리시아가 사용인들의 입을 엄하게 단속했으니까.
그와 더불어 세벨리아를 향한 죄책감에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디하트의 모습은 사용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같잖은 우월함에 불을 지폈다.
‘리시아 아가씨의 은혜를 입은 북부 출신의 귀족.’
머나먼 북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폐쇄적인 서프레디 사람들은 기어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리시아를 위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넘기고 말았다.
“공작님께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이번엔 당연히 아가씨를 만나 주시겠지요?”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문을 열라는 공관의 관리인과 리시아 영애.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겁니까? 예?”
절망과 자기비하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디하트를 겨우 달래고 집무실을 나온 일레이로서는 정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미치겠군.’
중앙으로 보낸 첩자가 보내온 소식을 받은 뒤, 디하트는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쌓인 감정을 밖으로 터트리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디하트는 죄악을 저지른 사제처럼 그저 조용히 썩어들어갈 뿐이었다.
방금 전에도 디하트는 갑자기 폭주를 일으킬 뻔했다. 전조 증상 없는 폭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일레이는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다.
“후우…….”
일레이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지금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 이 귀족 영애를 상대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공작님께서 무슨 수행 사제도 아니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만나서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성인군자라도 되는 줄 아시나 봅니다. 만나길 원하신다면 다시 연락을 넣으시고…….”
“수행 사제라 생각했다면 공관을 빌려 드릴 일조차 없었겠지요.”
리시아가 웃는 얼굴로 일레이의 말을 잘랐다. 메마른 세수를 하던 일레이의 손이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의 회갈색 눈동자가 미묘한 빛을 띠고 리시아를 응시했다.
“머무는 곳을 빌려 드린 입장에서 거주민의 안위를 챙기는 일조차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데, 저야말로 일레이 경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
“비켜 서세요, 경.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한 책임을 그대에게 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상냥한 어조였으나 일레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 경고라는 듯 살풋 웃어 보인 리시아가 관리인을 향해 손짓했다.
“하…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으실 텐데요.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지금 공작님을 뵈지 못하는 게 제게는 더 큰 후회가 될 거랍니다.”
싱긋 웃은 리시아가 관리인에게 계속하라며 턱짓했다. 곧 무거운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끼익, 열리는 문을 뒤로하고 일레이는 말없이 팔짱을 꼈다. 그는 앞을 보고 선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제 입장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공작님께서는 대단한 충신을 두셨군요.”
물러서지도, 비켜서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리시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후욱-!
그리고 곧 폭풍 같은 힘이 그녀를 덮쳤다. 활짝 열린 문의 경첩이 삐걱거리고, 숨 막히는 공기가 리시아의 폐부를 짓눌렀다.
“…컥!”
저절로 허리가 굽었다. 손으로 땅을 짚지 않고서는 버티고 설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차마 입을 뗄 수도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를 바닥으로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끼이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겨우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에 문틈으로 사라지는 일레이의 얼굴이 보였다.
‘전 분명 말렸습니다.’
달싹이는 입술이 전하는 말을 읽은 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그리고 곧,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는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리시아는 몸을 떨었다. 창백한 얼굴 한가운데 형형한 금색 눈동자가 소름 끼치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왜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파직. 허공에 수백 개의 빛이 산란했다. 눈을 멀게 하고 고막을 터트리는 듯한 작은 폭발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디하트의 얼굴에 새카맣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상체 전부가 피범벅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를 그제야 인식한 리시아의 눈이 공포로 떨렸다.
메마른 목소리가 고개 숙인 리시아의 위로 두서없이 떨어져 내렸다.
“영애,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용서를 바란 적 있습니까? 오만함에 취해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당당하게 사과를 건넨 적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 공작님. 제가 때를 잘못 맞추고… 죄, 죄송해요. 당장이라도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도 날 이런 기분으로 바라본 걸까요.”
리시아를 멍하니 응시하던 디하트가 자조하듯 읊조렸다. 퍽!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흐윽…….”
“이렇게 짓이기고 싶었을까. 하찮고 귀찮고 당장이라도 짓눌러 터트려 버리고 싶으면서도 기어코 내 발아래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제야 리시아는 디하트의 이름 앞에 붙던 별명을 기억해 냈다.
그래, 그는 저주받은 공작이었다. 제 손으로 가족들을 탑에 감금하고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찾겠다며 제국을 뒤집어 놓던, 미쳐 버린 인버네스 공작.
“당신도 날 죽이고 싶었을까…….”
서늘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 *
갑자기 공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지른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방 안에 틀어박혀 데니사에게 보낼 답장을 쓰고 있던 세벨리아는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침 그녀와 함께 있던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보고 올게요.”
잠시 뒤 돌아온 클로드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세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드는 그런 그녀를 응시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별일 아니에요. 리시아 영애가 돌아가느라 다들 수선을 피우는 거였더군요.”
“…그래요?”
뭔가 찜찜했으나 직접 나가서 살펴볼 의향은 들지 않았다. 세벨리아는 다시 펜을 들었다. 클로드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