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7)화(87/171)
“흠…….”
“클로드 씨?”
“아, 미안해요.”
자꾸만 새어 나오는 근심 섞인 소리에 세벨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클로드는 제 실책을 인정하고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취했다.
“앞으로는 조용히 하겠습니다.”
세벨리아가 찌푸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 신용이 가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미덥지 않은 상대여도 일단은 그녀의 스승이었으니까.
“부탁드릴게요.”
한숨을 내쉰 세벨리아는 데니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클로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 입을 딱 닫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리시아 영애의 일도 큰일 없이 무사히 넘겼고… 다행히 내가 개입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사실 클로드는 요사이 디하트의 심기가 최악이라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어구를 들고 다녀야겠군.’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한때 인버네스의 천재라 불렸던 몸이었다. 열심히 집중하면 혈족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파동쯤이야 감지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감지한 디하트는 넘쳐흐르기 직전의 물잔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힘을 제어하고 있으나 수면 아래가 문제였다. 요동치는 마음을 수습할 수 없어 그의 힘까지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바깥이 아닌 내면을 향하고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삐죽 솟은 가시를 둘러치는 게 아니라, 안을 향해 날카로운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클로드가 그를 찾아가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십 년도 전에 진작 겪었어야 할 일이었는데.’
인버네스의 핏줄 중에서도 벼락의 힘을 강하게 타고 태어난 이들은 어렸을 적 힘을 감당하지 못해 여러 번 폭주하고는 한다. 보통 그런 폭주는 힘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데 그건 사실 수습하기 쉬운 종류였다.
그렇게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작은 폭주를 여러 번 겪고 수습하며 동시에 정신적인 성장을 함께 겪는다. 절제하지 못한 힘, 힘에 기반한 오만함이 가족을 상처입히고 주변인을 괴롭게 만드는 걸 보며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성장통이자 인버네스 특유의 성인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하트는 그 과정을 겪지 못했고 강함이 곧 진리라 부채질까지 당했다. 오만함은 끝도 없이 불어났고, 그를 저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그는 원체 사람을 믿지 않아 사람들이 괴로워하며 그를 떠나갈 때 코웃음 치며 그럴 줄 알았다 외치기까지 했다고, 클로드는 며칠 전 인버네스의 기사들에게 전해 들었다.
그로 인해 디하트는 결국 사랑하는 이를 소중히 하지 못했고 이제 와서 후회와 자책 속에서 뒤늦은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어리석고 씁쓸한 결말이었다.
“나 때문에…….”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에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일순간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형님이 살아만 있었어도.’
내가 그렇게 멍청한 짓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디하트는 평범하게 자랐을 텐데. 그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차가운 숨을 삼켰다.
‘그래도 이젠 걱정할 필요 없겠군.’
점점 잦아드는 힘의 파동을 느끼며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시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를 내쫓은 뒤 거칠게 소용돌이치던 힘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했다.
‘도대체 무엇이 네 오만함을 깨트린 걸까.’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다시 만난 순간에도 한사코 스스로를 향한 적 없던 힘인데. 무슨 일이 생겼길래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든 걸까.
도대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길래 네 작고 편협한 세계가 깨지고 만 걸까.
클로드는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창밖을 응시했다. 중정을 가운데 두고 둘러싼 건물 맞은편에 디하트의 집무실이 보였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옆모습이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녁때가 되었다. 클로드는 일찌감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세벨리아는 내일 부칠 편지를 만지작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디하트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예정인 것 같았다. 창밖을 흘끗 바라본 세벨리아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맞닥뜨렸다.
“워츠 씨?”
“아,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벨라 양을 만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워츠였다. 예정보다 이른 그의 방문에 세벨리아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자 그가 차분한 어조로 사정을 설명했다.
“약이 생각보다 일찍 만들어진 김에 벨라 양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일찍 내려왔습니다. 혹 저녁 약속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잠시 제게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따로 약속이 있지는 않아요. 식사는 언제든 다시 요청하면 될 테고… 음, 일단 들어오세요. 계속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으니까요.”
복도 모퉁이에서 이쪽을 흘끗대는 시선을 발견한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공관의 사용인 중 한 명이리라.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건지 훔쳐보던 이는 흠칫 놀라 몸을 숨겼다.
“들어오세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잠시 뒤, 복도 모퉁이 그림자 속에서 하녀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일전에 세벨리아의 환영에 한 번 당한 적 있던 하녀였다.
* * *
“일단 약부터 드리죠.”
무덤덤한 말과 함께 세벨리아의 손에 얹어진 약병은 작고 가벼웠다. 차가운 약병을 손에 쥔 세벨리아의 가슴을 묘한 감정이 적셨다.
‘이게 내 목숨의 무게인가.’
차륵, 병을 흔들자 알약이 저들끼리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 타인의 눈에는 분명 한 줌 거리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약 더미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세벨리아에게는 미래를 열어 주는 열쇠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세벨리아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약병을 쥔 손에 이마를 기댔다. 알게 모르게 몸을 조이던 긴장이 탁 풀리며 머리가 어질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워츠 씨의 의사가 아니었잖아요.”
세벨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새 어깨 위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이 그에 따라 물결쳤다.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어 둬요, 우리. 이제 다 끝났으니까…….”
벅찬 감정에 세벨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의 우여곡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후우, 죄송해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괜찮으면 제가 차를 우려도 될까요?”
“네. 필요한 건 저쪽에 있어요.”
세벨리아가 힘겹게 가리킨 곳에는 발열 마법이 걸린 석판을 이용해 만든 간단한 조리기구가 있었다. 워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벨리아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렸다. 펄펄 끓어오른 수증기가 방 안 가득 퍼지고 워츠가 그녀의 앞에 잔을 놓을 때가 되어서야 세벨리아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연구소에서 매번 하던 일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세벨리아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기분 좋은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뜨거운 온기와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기분에 세벨리아가 낮은 침음을 흘리던 순간이었다. 워츠가 그의 두 번째 목적을 꺼내 들었다. 부러 날짜를 앞당겨 연구소를 내려온 이유였다.
“약이 완성되었으니 이전에 우리가 나눴던 약속에 대해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약속이라뇨?”
“협곡에서 유리눈꽃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한 약속 말입니다.”
“아.”
찻잔을 감싼 채로 세벨리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성을 잃은 클로드를 따라 협곡까지 오고, 그 뒤에는 디하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러크우드와의 교역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맞아요, 그랬죠. 유리눈꽃을 확보하기 위해 워츠 씨의 능력을 빌려 달라고 제가 부탁드렸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부탁이 아니라 제 미숙한 책임감에 대한 대가였죠.”
“자신을 너무 야박하게 평가하시네요.”
“그럴 만했으니까요.”
“과거 일은 이제 묻어 두기로 했잖아요, 워츠 씨.”
세벨리아가 찻잔을 거머쥔 손을 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두 손을 깍지끼며 넌지시 말했다.
“괜찮다면 그 건에 관해서는 잠시 생각을 해 봐도 될까요?”
“치료 약이 완성되었는데도 유리눈꽃을 들여오고 싶으신 겁니까?”
예상 밖의 말에 워츠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세벨리아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다만… 음. 이렇게 직접 말씀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벨라 양?”
“제 병이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사실 그때부터 그곳에 제 친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러크우드와의 교역도 단순히 약재를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아.”
워츠는 그제야 세벨리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치료 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녀에게 중요한 건 유리눈꽃이 아니었다.
‘러크우드와의 교역’에서 방점이 찍힌 건 이제 러크우드 그 자체였다. 이름조차 모르는 어머니의 고향.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척들이 살고 있을 땅.
“이제 교역은 핑곗거리가 될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크우드의 문을 열고 싶어요. 혹시 모를 가족을 찾고 싶어요.”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으신 겁니까?”
“아, 이런.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세벨리아가 단호한 태도로 워츠의 말을 부정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 생각했던 워츠의 입이 벌어졌다. 그 모습에 세벨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가 자신을 실제보다 더 여리게 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틀렸다.
“그런 감상적인 이유는 아니에요. 무엇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절 찾아오지 않은 어머니를 찾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전 단지… 제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 세상을 떴는지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에요.”
나지막이 읊조린 세벨리아가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워츠 씨의 말처럼 병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가족력이죠. 전 이제 아무런 준비 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협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요.”
세벨리아의 시선이 워츠를 빗겨 나가 그의 뒤에 놓인 협탁을 향했다. 협탁의 서랍 안에는 데니사에게 보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제 유일한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