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8)화(88/171)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라이언은 디하트를 보필하며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공작님에게 라쉬 일가와 림스 후작은 진정으로 가족이었을까.’
그분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라이언은 하나둘씩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바라보며 그렇지 않았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디하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가족이라 여겼다는 거니까.
“슬슬 위치로 가도록 해라.”
라이언이 짧은 한숨을 뱉으며 기사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어제 그는 림스 후작이 병력을 이끌고 힐렌드 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전, 순찰 중이던 기사가 돌아오지 않는 걸 발견했다. 라이언은 곧 직감했다. 바로 오늘이 림스 후작이 힐렌드 홀을 급습하는 날이었다.
그토록 기다린 날이었으나, 가슴을 가득 채우는 씁쓸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림스의 과한 행동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명백했으니까.
‘공작님보다 라쉬 일가가 더 중요하다는 거겠지.’
라이언은 한숨을 내쉬는 대신 검집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곧 기사 한 명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편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긴장된 공기로 술렁이는 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저편에 림스 후작과 그의 기사들이 숨어 있었다.
파삭, 누군가 수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팽팽한 긴장이 깨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림스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탑을 탈환해라!”
탈환이라, 그다운 언사였다. 라이언은 차갑게 웃으며 횃불을 치켜들었다.
“쥐새끼들이 죄인들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해라!”
“뭐, 이…!”
요란한 밤이 시작되었다. 힐렌드 홀을 구석구석 비추는 횃불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얼굴이 비쳤다 사라졌다.
“뒤를 쫓아라! 탑을 지키는 이들에게 연락을 넣어!”
라이언은 보란 듯이 소리를 지르고는 림스 후작의 뒤를 대충 쫓았다. 검을 든 그의 손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림스 후작의 기사들을 휘몰아쳤으나 그뿐이었다.
‘자, 어서 가서 라쉬 일가를 데리고 도망치라고.’
그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 * *
요란스러운 힐렌드 홀의 밤과 달리 서프레디의 밤은 고요하고 침울했다.
‘오늘도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구나.’
디하트는 끝끝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워츠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걸 차치하고서라도, 제게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으려 피해 다닌 건 변명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하아…….”
머릿속이 복잡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걸까. 결국 그에게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바라서는 안 되었던 걸까.
‘당신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 건가.’
밤은 깊어지고, 잠은 오지 않았다. 세벨리아는 뒤척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끓였다.
치익-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에 세벨리아는 찬장에서 차를 꺼냈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차는 일전에 클로드와 함께 시장에 들렀다 구입한 것이었다.
물을 붓고, 차가 우리길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은 세벨리아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놀라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듯 조심스럽게 울린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똑, 똑. 시간을 두고 울리는 소리에 세벨리아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용하고 긴장된 숨결, 그러나 어딘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한숨이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세벨리아는 어깨를 떨었다.
“누구시죠.”
그건 물음이 아닌 확인이었다. 그러자 문 너머의 숨이 멎었다. 세벨리아는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확신했다. 디하트가 틀림없었다. 푸른 눈에 냉기가 돌고, 억울함과 분노에 달아올랐던 가슴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마침내 그가 온 것이다. 세벨리아는 문 저편의 디하트가 안달이 나도록 오랜 시간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누구신지 말씀하세요.”
“…나예요.”
깨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예요, 벨라.”
디하트가 굳게 닫힌 문 위로 손을 얹었다. 창백한 손 끄트머리가 고동색 나무를 파고들듯 할퀴었다. 그러나 문 너머의 세벨리아는 대답 대신 침묵을 되돌려 주었다.
그래서 디하트는 뒤엉킨 목소리를 다시 한번 끌어 올려야 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눈앞의 괴로움을 벗어나려 멍청한 사과를 해댔던 남자.”
“…….”
“괜찮다면… 문을 열어 줄 수 있나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에 잠긴 복도에 우두커니 선 그의 옆얼굴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는 문득 고개를 틀어 제 주위를 살폈다. 적막한 복도, 차가운 공기,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멍청한 남자. 모든 게 끔찍하리만치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걸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목을 매달고 싶었다. 하지만 디하트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문 너머에 그녀가 있으니까.
“벨라.”
이젠 제게 미궁과도 같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디하트는 속눈썹을 떨었다. 이 문 너머에는 벨라가 있었다. 세벨리아 웨든도, 세벨리아 인버네스도 아닌 벨라.
하지만 그런 구분이 무슨 소용일까.
‘난 단 한 순간도 진짜 당신을 안 적이 없는데.’
알기 위해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데. 부부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당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모든 걸 망쳐 버렸는데.
“있잖아요, 나는…….”
나는 변명을 하고 싶은 건가? 끔찍한 깨달음이 그의 심장을 두 갈래로 쪼갰다.
침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디하트는 다물린 턱에 힘을 줬다. 당장이라도 배 속을 달구는 불덩이가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디하트는 중앙으로 보낸 첩자의 보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 적혀 있던 세벨리아라는 사람의 일생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격통이 그의 속을 뒤집었다.
‘빌어먹을.’
과거 그가 알던 ‘세벨리아 웨든’은 웨든 후작가의 사랑받는 막내였다. 사생아임에도 너무 소중해 저택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딸이었고, 마지막까지 인버네스에 넘겨주고 싶지 않은 보물이었다.
‘세벨리아 인버네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것 없이 자라다 공작부인이 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귀족.
세벨리아와 친밀해지고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 한들, 그녀에 대한 인상은 그 틀 안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리석은 머리로 뒷공작을 벌이다 제게 들킨 날, 디하트는 차라리 해방감마저 느꼈다.
이제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쉽게 그녀를 옭아맬 수 있겠다는 생각에 화가 나면서도 내심 판이 제게 유리하게 굴러간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눈앞의 그녀가 고통받는 건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녀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라 지레짐작하고서 제멋대로 그녀를 평가하고 재단하고 그에 따라 재량껏 처분을 내렸다.
‘당신이 나와의 결혼을 탈출구처럼 여겼다는 것도 모르고.’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진심인 줄도 모르고, 알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그녀를 밀어냈다. 고립시키고 죄책감에 마음이 멍들도록 만들어 조금씩 숨이 멎게 만들었다.
‘내가.’
다름 아닌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온 그녀의 숨통을 다시 틀어막았다. 겨우 용기 낸 말 한마디조차 차갑게 내치며 모멸감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윽…….”
그리고 그 모든 게 대가가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다. 디하트는 어느새 제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손바닥 안쪽으로 파고든 손톱에 선혈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가슴을 텅 비게 만들었다.
‘내가 감히 그녀에게 문을 열어 달라 해도 되는 걸까?’
무슨 이유로 왜 미안한지, 그에 대해서 알아 오라는 건 사실 제 처지를 깨닫고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디하트는 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느꼈다. 그래, 왜 몰랐을까. 그는 제 멍청한 행동을 비웃었다. 자신이 그녀라면 제 얼굴 따위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미안, 미안해요.”
바싹 말라비틀어진 입술이 거칠게 움직였다.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부어오른 목 틈새를 비집고 겨우 새어 나왔다.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는 남자는 축축한 목소리를 내어놓으면서도 그게 부끄러워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그의 고막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기다려요.”
기름칠하지 않은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쓸쓸한 그림자와 온기 없는 달빛뿐이었던 복도에 부드럽고 따스한 빛 한 움큼이 흩뿌려졌다.
“디하트.”
그리고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머리카락이 다시 금빛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깨를 살짝 넘어선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은 조금씩 물이 빠지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처럼 숨길 수 없는 빛깔이었다. 움트는 새싹처럼 찬란한 금빛이 부드러운 갈색 아래로 비쳐 보였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듯 떨리는 음성이 디하트의 귓가를 적셨다.
“당신… 왜 울고 있는 거예요?”
이건 눈물이었구나. 디하트는 일렁이는 수면 위에 반짝이는 빛무리가 세벨리아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눈물 때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비참함이 밑바닥에서부터 튀어 올라 머리를 띵하고 울렸다.
“벨라, 나는. 나는.”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둑이 무너진 호수처럼, 깨져 버린 물잔처럼 한계까지 차 있던 마음이 슬픔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비척비척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염치없이 감히 입을 열고 말았다.
“나는 알지 못했어요.”
“…….”
“하지만 그것마저 내 잘못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이 남자의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던 걸까. 문을 걸어 잠그고 뒤를 돈 세벨리아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그를 아연한 눈으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