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8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89)화(89/171)
그는 차마 눈물을 훔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그마한 눈물샘 틈바구니를 경쟁하듯 제치고 나온 혼탁한 감정들은 그대로 발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요. 이런 헛된 말들로 당신이 받은 상처와 억울함을 보상해 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미안해요. 이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벨라, 제발.”
무겁고 숨 막히는 감정들. 차마 말로 구체화할 수 없는, 그러기에는 너무 뻔뻔하고 수치스러운 현실들. 디하트는 제가 입을 열면 열수록, 더 많은 변명을 내뱉을수록 비참함만 커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감히 들어 달라 청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빌게.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내가 당신 앞에서 말할 수 있도록 해 줘요.”
그는 가만히 세벨리아 앞에 무릎 꿇었다. 너무 세게 움켜쥐어 피가 흐르던 손을 펴 바닥을 짚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물과 핏물이 동시에 바닥을 적셨다.
“당신은 단 한 순간도 나를 배신한 적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언제나 내게 진심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아니, 실은 다 변명이에요. 나는, 사실은. 그 소중한 마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어.”
디하트는 두 눈을 꽉 감았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애정을 담은 손길을, 헤어질 때마다 내뱉은 아쉬움 담긴 한숨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는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그녀의 애정을 믿을 수가 없어서, 믿어 보고자 용기를 낼 수가 없어서 두려움에 외면하고 무시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너무도 달랐으니까. 비명과 상실로 얼룩진 유년기가 아닌,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름다운 신부였으니까.
디하트는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했고, 결과가 이것이었다.
“당신이 나 같은 녀석을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디하트는 제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 어리석고 용기 없고 뒤틀리고 무지해서 어렵게 잡은 기회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말았다.
“미안해요.”
용기를 냈더라면, 조금만 더 그녀를 믿었더라면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어린 시절 꿈꾸었던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이란 걸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부족해서, 당신이라는 사람이 날 사랑한다고, 내게 진심일 거라고 믿을 수 없었어. 그래서 당신을 외면했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어.”
툭, 툭.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삐걱대는 나무판자와 낡은 카펫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짙은 물기였다.
“그래서였어. 나처럼 멍청한 녀석은 당신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넘어갈 테니까. 당신의 그 달콤한 거짓에, 부드러운 속삭임에 정말로 당신이 날 사랑하는 거라 믿고 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밀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너무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으나 그때의 디하트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그대로 소리 없이 그는 눈물을 흘렸다.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와 그대로 심장이 말라붙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한참을 울었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무 바닥의 색이 점점 진해지는 만큼 그의 슬픔 또한 짙어지고 있었다. 디하트는 눈먼 자처럼 바닥을 기어가며 소리 없이 울었다.
궤적이 그려졌다. 보이지 않는 구원을 갈구하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남자가 남긴 눈물의 궤적. 그 위로 새벽빛이 흩뿌려졌다. 고개를 돌려 디하트를 내려다보자 소금기가 말라붙은 뺨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연신 신음 같은 이름이 새어 나왔다.
“벨라.”
그는 이제 더는 세벨리아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다리를 굽혔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든 디하트의 눈이 울긋불긋했다.
“응.”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세벨리아는 푸르게 멍든 디하트의 입술을 쓸었다. 피 내음 가득한 입술 사이로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세벨리아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창가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 * *
새벽이 물러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누군가에겐 얼룩진 눈물로 기억될 새벽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승리의 기쁨으로 새겨질 새벽이 끝났다.
“라쉬 일가는 무사히 림스 후작의 손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잘됐군.”
라이언은 부상병들을 둘러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적절한 방어와 대응 덕에 치명상을 입은 이들은 없었다.
“따로 소문을 낼 필요는 없겠지.”
라이언이 오늘 아침이 되자마자 거리에 흩뿌려진 호외를 펼치며 말했다. 계획대로 림스 후작은 아주 쉽게 탑을 점거하고 라쉬 일가를 빼냈다.
그 성과에 어찌나 자신감이 붙었던 건지, 라쉬는 힐렌드 홀을 빠져나가며 제 승리를 목청 높여 이야기했고 그 결과가 새벽에 급히 만들어져서 뿌려진 호외였다.
[조카에게 칼을 든 림스 후작의 저의는?: 인버네스 내부의 권력 다툼] [그는 정말 무고한 피해자인가? 라쉬 인버네스에 대하여]조용하게 침입한 림스 후작을 요란스럽게 맞이한 성과가 있었다. 어제저녁 조용히 시작된 림스의 무력항쟁은 덕분에 오늘 아침이 될 때까지 아주 요란스럽게 거행되었다.
그 덕에 이렇게 멋들어진 호외가 거리 곳곳에 나뒹굴게 되었다.
“가서 사용인들에게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힐렌드 홀 주변 별장에 기거하는 귀족들에게 전달할 사과 카드도 써야겠군. 집안일 때문에 새벽을 어지럽혀서 죄송하다고 해야겠어.”
라이언이 입꼬리를 올리며 등을 돌렸다. 귀족들에게 사과 카드를 돌리는 행동은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집어넣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저녁쯤이 되면 살롱마다 림스 후작의 이야기로 넘쳐나겠지.’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방향은 당연하게도 디하트와 라이언이 바라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한시름 놓은 라이언이 사과 카드에 어떤 문구를 쓸까 머리를 굴리던 도중이었다.
“라이언 경…!”
“무슨 일인가.”
기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와 라이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를 아득 문 그가 집무실이 아닌 라투르 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둘씩 잠에서 깬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소리가 공관을 울렸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얇은 카펫 위에는 디하트가 누워 있었다.
“당신 부관이 당신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세벨리아의 손끝이 디하트의 뺨을 느리게 쓸었다.
“그러길래 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요.”
모든 걸 알게 된 뒤 홀로 괴로워하지 말고, 내게 달려오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 혼자 절절하게 쏟아 내고 기절할 정도로 울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또 세벨리아의 시야 밖에서 혼자 다쳐서 왔다.
“참 끝까지 오만하고 지독히도 이기적이라니까.”
세벨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은 디하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사일러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세벨리아는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그는 결국 웨든 후작가가 기어코 숨겨 온 추악한 비밀을 알고야 만 것이다.
웨든 후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딸은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경멸받았던 더러운 사생아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일러스가 그 쓸모없는 사생아를 손에 쥐고 북부의 정보를 빼돌리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네. 웨든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아버지 못지않게 다들 속이 시커먼 사람들인데 말이야.’
푸르게 돋아난 디하트의 수염을 건드리던 세벨리아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내 말이 충격이긴 했나 보죠.”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제 말이 정말 크게 와닿기는 한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줄은 몰랐지만.’
그가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나간 일에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그를 뒤흔들고, 그의 괴로움을 통해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자 했지만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제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어. 그 비참한 전율조차 느끼지 못했어. 원망이 풀리기는커녕 나는, 나는…….’
완전히 망가져 눈물 흘리는 그를 보며 지독히 슬펐다. 그와 자신 둘 다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서. 우리에겐 처음부터 행복한 결말 따위는 없었겠구나, 하는 걸 알아 버려서 우습게도 그랬다.
‘차라리 당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좋았을까.’
세벨리아가 그림자 진 눈으로 디하트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그의 발치에 제 모든 걸 올려놓은 적 있었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에게서는 한 번도 애정을 받아 본 적 없기에, 새롭게 생긴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모든 걸 바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자락 애정조차 받지 못할 걸 알기에. 자신처럼 가치 없는 사람의 전부를 가져도 그처럼 대단한 사람의 관심 한 줌에는 모자라는 걸 알기에.
하지만 그의 발치에 올려놓은 진심은 결국 그의 발밑에 짓이겨졌다.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
세벨리아는 무릎 위에 턱을 댄 채 두 다리를 감싸 안았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경험이 일천해 그렇게 하면 될 줄 알았지. 내 스스로를 아래에 놓고 당신을 경배하고 사랑하면 사랑받을 줄 알았지.’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아버지의 말에 따라 복종하면 아주 짧은 눈길 한 번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세벨리아에게 가족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방법이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받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를 관계의 밑바닥에 놓는 일일 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이 관계 자체를 뒤틀어 놓는 일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한 시작이었어. 그래, 우린 서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야.’
아버지의 일이 없었더라도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세벨리아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와 자신 모두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바보 같았다.
“으…….”
그때, 디하트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했다. 얇은 카펫 위에 드러누운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세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위에 두툼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새액, 색. 고른 숨을 내쉬는 디하트의 얼굴이 핼쑥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 여러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그녀의 눈에 드리워진 감정의 색채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금빛 두 눈동자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그것도 모르고 디하트는 대충 정신을 차리자마자 세벨리아부터 찾았다.
“…벨, 라?”
세벨리아는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지금 당장은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요.”
멍한 얼굴의 디하트를 내버려 두고 세벨리아는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뒤집어쓴 이불 위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