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화(9/171)
초대 공작부인의 유령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진 뒤, 저택은 점점 우울한 공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반대로 세벨리아에 대한 대접은 점차 나아졌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하녀가 손수 제게 가져다준 식사를 떠올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어.”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고기를 맛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다들 저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겠지.”
초대 공작부인 벨리타. 그녀는 솔직히 말하면 세벨리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원혼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에 의해 목이 잘린 벨리타 인버네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남편에 대한 증오와 죽어서도 놓지 못한 애정으로 인해 뒤틀린 악귀가 되었다. 그렇게 저택에 기생하는 원혼이 된 벨리타는 세대를 건너뛰어 나타나 무고한 이들을 저주하고 죽였다.
똑똑.
“마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아. 들어와요.”
“……예.”
아직 마음속의 미움을 다 지우지 못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의 하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회한이 드는 듯 중간중간 멈칫거렸으나 결국 제 소임을 끝마쳤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느새 작은 탁자 위는 화려한 티타임을 위한 성찬으로 가득 찼다.
테두리를 금으로 장식한 접시와 예쁘고 자그마한 다과들. 그리고 향긋한 향이 풍기는 찻주전자.
확연히 바뀐 대접 앞에서 세벨리아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을 느꼈다.
“공포는 미움을 이기는구나.”
벨리타의 저주를 받아 죽은 공작부인은 때때로 그녀의 영향을 받아 또 다른 원혼이 되고는 했다.
결국 하인들은 자신이 죽어 또 다른 악귀가 되어 그들을 끌고 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공작부인보다 죽은 공작부인이 더 영향력 있다니.”
실소를 흘리던 세벨리아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이 좋네.”
저택에서 눈엣가시 취급을 받는 그녀에게 때를 맞춘 티타임이란 사치나 다름없었다. 며칠 전까지 차를 우려 달라 부탁하려면 눈치를 봐야 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만큼 초대 공작부인이란 두려운 존재라는 거겠지.’
그녀는 복도에 걸려 있는 벨리타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밤하늘 같은 긴 검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어깨 위에 올려진 남편의 손을 잡은 채 정면을 보며 웃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자신에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도 모른 채. 그래도 그녀는 자신보다 처지가 나았다.
‘그녀는 한때나마 사랑받았으니까.’
오해로 인해 비극으로 끝난 사랑이지만, 어찌 되었든 사랑이기는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어.’
사랑의 형태를 그려 보기도 전에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빼앗겼다.
[이제 당신이라는 사람을 믿을 일은 없어.]오만한 금빛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내에 의해.
[어째서인지는 당신 스스로가 제일 잘 알겠지. 그러니……, 허황된 꿈은 이만 버려.] [디하트, 제발…….] [평범한 부부처럼 함께 잠들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야.]무감한 눈으로 자신을 떨쳐내던 남자를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찻잔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말라붙은 찻잎들이 그녀의 불우한 인생을 비웃는 것 같았다.
* * *
“누가 저런 쓰레기 같은 내용이 실리도록 힘을 썼는지 알아봐야겠어.”
안락의자에 기대듯 앉은 디하트가 라이언을 향해 말했다.
“저렇게 멍청할 정도로 도발적인 내용을 아무 생각 없이 실을 리 없지.”
디하트가 차갑게 비웃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몇몇 귀족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수건으로 얼굴을 수차례 닦았다.
말라붙은 핏물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라이언은 한숨을 쉬고 얼굴에 직접 물을 끼얹었다.
“물이 튀잖나.”
“죄송합니다.”
디하트의 짜증에 라이언이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그리 젠체를 하는 이들치고 참으로 저급한 수군요.”
“그놈들은 원래 그래.”
디하트가 시가를 자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중앙 놈들이 왜 향수에 그리 목을 매겠나. 온몸에서 썩은 내가 풍기기 때문이지.”
여유롭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독을 품은 늪 같았다.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디하트가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돌아보았다. 마침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를 깨우고 있었다.
“이런.”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 금빛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접혔다.
“이쯤 되면 그 쓰레기들도 발견되었겠지. 가서 확인해 보고 와라.”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비웠다. 디하트는 신문을 펼쳐 들다 말고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이름 없는 새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초록색 눈동자와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언이 돌아왔다.
“주인님.”
“오, 디하트.”
“……숙부님.”
예상치 못한 손님과 함께 말이다.
* * *
이런 곳에서 라쉬를 만나리라 생각지 못한 디하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반면 라쉬는 주름진 얼굴에 걱정을 가득 담고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이 먼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갱생 불가 종자들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라쉬 경께서 저를 먼저 발견하셨습니다.”
“너와 함께 간 라이언이 홀로 있길래 네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왔단다. 혹시나 했는데…….”
라쉬가 방금 전 거리에서 본 광경을 떠올린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일순간 그에게서 삼촌으로서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는 곧 디하트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자리를 바꾸자꾸나. 이런 허름한 곳에 널 혼자 둘 수는 없지. 지금 바로 이동해도 괜찮겠지?”
디하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금빛 눈동자로 라쉬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라쉬는 그저 그가 걱정되어 미치겠다는 눈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후…….”
한숨을 쉰 디하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세요. 주소는 라이언에게 일러두십시오.”
“지금 같이 가자꾸나.”
“짐을 챙겨야 해서 말입니다.”
“짐 같은 건 나중에 내가 하인을 보내서 챙길 테니.”
“아뇨, 제가 직접 챙기죠.”
한 자 한 자 끊어내듯 말한 디하트가 어깨에서 라쉬의 손을 치워내며 거리를 벌렸다.
“제가 제 것에 다른 사람 손 타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까.”
아연한 얼굴의 라쉬를 밖으로 쫓아낸 디하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가녀린 노랫소리가 그의 신경을 잡아챘다.
“…….”
닫힌 눈 틈 사이가 벌어지며 금빛 눈동자가 이름 없는 새를 향했다.
그러자 새는 보란 듯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노래를 불렀다.
‘빌어먹을 새 같으니라고.’
제가 값을 치른 게 언제인데 이제서야 소리를 들려준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저런 가느다란 선율이라니. 마치 새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색만 비슷한가 했더니 정말 닮았군.’
제 마음에 드는 일 하나 할 줄 모르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디하트는 새장을 들어 올렸다.
* * *
“저택에서 유령이 나왔다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플로라를 곁에 두고, 그렌이 물었다. 그녀는 라쉬가 벌인 일의 뒤처리를 위해 떠났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하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그, 초대 공작부인의 유령이 나왔다고.”
“헛것을 본 거겠지.”
그렌이 단칼에 일축했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 낑낑거리던 플로라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 거예요?”
“오, 플로라.”
그렌이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천방지축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원래 열이 오르면 사람은 이상한 걸 듣고, 보지 못할 걸 보곤 한단다.”
“열병 때문에 환각을 본 게 아니에요!”
플로라가 이마에 대고 있던 물수건을 내던지며 외쳤다.
“정말로 벨리타의 유령이었어요. 그리고 너, 왜 그 뒷이야기는 말을 안 해? 그 후로도 몇 번 더 나왔잖아.”
“플로라의 이야기가 사실이냐?”
그렌이 힐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하녀는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도 두 어 차례 유령을 본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 보세요, 어머니.”
저 말고도 목격자를 찾아낸 플로라가 턱을 올리며 말했다.
“그 사생아한테 겁먹은 게 아니라니까요.”
“흐응…….”
그렌의 초록색 눈이 하녀와 플로라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기엔 너무 시기가 좋구나.”
세벨리아의 소행이라 의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대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벨리타의 유령.
그 유령이 갑자기 세벨리아의 앞에 나타난 거로도 모자라, 영향력까지 행사하다니.
결국 겁먹은 딸 때문에 그들은 금고 문을 열어 주고, 그녀가 빼돌린 세벨리아의 지참금을 채워 놔야 했다.
거기까지라면 직접 나설 일도 없었을 텐데….
‘사용인들이 겁에 질려 그 사생아의 편이 되도록 해서는 안 돼.’
지금까지 세벨리아를 내버려 둔 이유는 그녀가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령이 나타난 뒤, 사용인들은 자발적으로 그녀를 ‘공작부인’으로서 대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 일련의 흐름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남편을 괜히 멀리 보내 놨군, 쯧. 한 명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나.’
어차피 그가 있었다 한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항상 제게 중요한 일을 맡기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 덕에 자신이 수월하게 공작가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만나 봐야 할 것 같구나.”
“유령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는 아니시겠죠.”
플로라가 시큰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렌이 쾌활하게 답했다.
“가는 김에 만나면 좋을 것 같긴 하구나. 항상 궁금했거든.”
“어머니!”
플로라가 진저리를 치자 그렌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마렴.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그깟 사생아 하나 상대하러 가는 어미를 걱정하는 거니? 귀여워라.”
그렌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보다 이번 기회에 멀리 보내 버려야겠구나.”
언제나 자신을 구원자마냥 간절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떠올리며.
“어서 오세요, 그렌.”
그러나 다음 날이 되어 실제로 만난 그녀는 기억 속과 달랐다.
“오랜만에 뵙네요. 플로라는 괜찮은가요?”
무감한 눈동자, 형식적인 인사.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무심한 태도에 그렌은 가까스로 당혹스러움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