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0)화(90/171)
마구간과 하인들의 숙소까지 뒤진 일레이가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으며 세벨리아의 방을 두드렸을 때, 디하트는 잠든 세벨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그녀가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디하트는 이전까지는 느껴 보지도 못했던 양심의 통증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수려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금빛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다. 똑똑, 일레이가 밖에서 한 차례 더 문을 두드렸으나 디하트는 무시했다. 그의 머릿속에 한 시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벨, 라?] [자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요.]실신하다시피 잠들었던 자신이 카펫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세벨리아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침대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는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나는 눈을 뜨면서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는데.’
그는 자신이 언제 기절했는지도 모르는 채 눈을 뜨자마자 세벨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장 제가 어떤 꼴인지 알아차렸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사과를 늘어놓았던 일과 어린애처럼 엉엉 울다 못해 바닥을 기다시피 했던 일. 그 모든 게 무릎을 접은 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세벨리아의 얼굴과 겹쳐져 참혹한 심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을 두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마치 정신을 잃은 자신을 지금껏 지키느라 힘들었다는 듯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디하트는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할 만큼 행복했다. 사형 집행이 유예된 사형수처럼 언젠가 비극이 도래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든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이때만큼은 어찌할 도리 없이 기뻤다.
똑똑똑.
“하…….”
그 이후로는 딱히 설명할 필요 없이 보는 그대로였다. 디하트는 고통과 감동이 어린 눈으로 잠든 세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동화 속 존재를 보는 것처럼 끓어오르는 심장을 부여잡고서 그녀를 응시했다.
똑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거세졌다. 디하트는 한 귀로 흘리며 침대 가까이 드리워진 커튼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햇빛이 세벨리아의 뺨에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때, 세벨리아가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뒤척이며 신음했다. 디하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그의 몸이 허공에서 굳었다.
“미안해.”
물기 어린 사과가 입술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미안, 미안해.”
그 외에는 어떤 말도 허용되지 않은 노예처럼 그는 잠든 세벨리아의 귓가에 계속 사과의 말을 흘려 넣었다. 마치 고장 난 축음기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속삭였을까. 디하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부관 녀석이 문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아서였다.
‘이러다 깨겠어.’
이를 악문 디하트는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손바닥 한 뼘도 안 되는 문틈에 대고 일레이가 속삭였다.
“공작님!”
“입 닥쳐, 숨 쉬지 마. 손도 올리지 말고. 그대로 뒤돌아서 꺼져.”
“…….”
예민한 모양새에 일레이는 신속하게 명령을 따랐다. 물론 마지막 명령은 알아서 걸러 들었지만.
디하트가 진정한 듯 보이자 일레이는 문틈 사이로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바싹 긴장해있던 그의 입매가 누그러졌다. 다행히도 그의 상관은 벨라와 하룻밤을 보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어제와 달리 디하트의 몸을 뒤덮던 음울한 안개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폭주의 흔적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아무래도 벨라 양이 도와준 모양인 것 같군. 이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어쩐다. 라이언한테 연락이라도 넣어 봐야 하나?’
호탕한 청년으로만 보이는 일레이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라온 귀족이었다. 그는 전 공작부인과 닮은 벨라가 디하트의 치료제가 되는 건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 깊은 관계가 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평민과 귀족 간의 경계가 흐려졌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그리 쉽게 평민의 손에 떨어져도 되는 자리가 아니니까.
“돌아가시죠, 공작님. 힐렌드 홀에서 온 서신들이 공작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디하트는 아무 말 없이 일레이에게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을 본 일레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어, 음. 혹시 시장하십니까? 아, 그게 아니라면 아직 잠이 덜 깨셔서…….”
“꺼져.”
일레이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쥔 디하트가 그를 가뿐하게 들어 올려 복도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내던져질 줄 알았던 일레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디하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디하트는 일레이의 감상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다. 그는 다만 문을 닫으려다 무심코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더할 뿐이었다.
“삼 층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막아. 내가 따로 종을 울리면 아침 식사를 올리고. 서신이나 서류 따위는 오늘 내로 처리해 줄 테니 또다시 네 얼굴을 들이밀면…….”
이어지던 말은 등 뒤에서 울리는 작은 잠꼬대에 뚝 멎었다. 뒤를 돌아본 디하트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네 유일한 장점인 큰 키를 반으로 부러뜨려 줄 테니 각오해.”
척추를 반으로 접어 주겠다는 소리에 일레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곧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명 받들겠습니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일레이가 뒤를 돌았다. 복도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하아.”
‘라이언에게 뭐라고 편지를 보낸담.’
일레이는 골머리를 썩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한데 이 층까지 오는 와중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일레이는 슬쩍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명령대로 사용인들은 전부 일 층에 모여 감사를 받고 있었다.
“주인님께 충성한 게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저희는 어디까지나 서프레디 남작님의 사용인입니다. 그러니 리시아 영애께 충성하는 것도 저희의 직분…….”
“그 직분이라는 것이 공작님의 안전을 해치는 거라면 충분히 문제지.”
“안전을 해치다니요! 오히려 다치신 분은 저희 아가씨입니다!”
사실 디하트는 삼 층에 사람이 오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디하트가 벨라의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뒤, 일레이는 일찌감치 사용인들을 일 층으로 집합시켰다. 명분은 리시아 영애에게 공작의 일정을 팔아 치운 자들의 색출이고 실상은 디하트가 새벽에 벨라의 방을 찾아간 걸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리시아 영애를 그렇게 박대한 뒤야. 추문이 생기는 건 막아야지.’
그건 디하트뿐만 아니라 평민인 벨라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한낱 소시민에 불과한 그녀가 북부의 명문가인 인버네스 공작과 이루어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 * *
문을 닫고 돌아온 디하트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도 방 전체에 깔린 낡은 카펫이 그의 무거운 몸을 부드럽게 받아 주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며 그가 침대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이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던 세벨리아가 어느 순간 두 눈꺼풀을 반짝 떴다. 얼떨결에 시선이 마주친 디하트는 그대로 심장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
아직 잠이 덜 깬 듯 반쯤 감긴 푸른 눈이 그를 응시했다. 호수처럼 일렁이는 아름다운 눈동자에 비친 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디하트는 손을 말아쥐었다.
온몸의 피가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심장이 고막에 달라붙어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낯설고도 두려운 심정으로 디하트는 침대 옆에 무릎 꿇었다.
그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세벨리아를 응시했다.
이리도 무방비한 아침, 온화한 햇살로 가득 찬 사랑스러운 공기 속에서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대를 마주한 기분은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디하트가 굳은 입술을 움직여 다시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세벨리아가 먼저 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
“…….”
“눈이 부었네요.”
망설임 없이 다가온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눈 밑을 쓸었다. 아, 디하트는 그제야 제 눈가가 짓물렀음을 깨달았다. 새벽 내내 흘린 눈물 덕이었다.
“그, 그런가. 미안. 보기 안 좋은 모양이죠? 내가 정신이 없어 못 볼 꼴을 보였어요.”
습관처럼 사과하며 디하트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디하트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을 좀 빌릴게요.”
디하트는 목 끝까지 치솟는 수치심에 미칠 것 같았다. 그제야 제 몰골이 얼마나 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얼굴을 가린 채 뒷걸음질 치자 세벨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벽을 짚은 채 멀어져 가는 그를 보던 세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디하트.”
“으, 응.”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한쪽 손은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은 얼굴을 가린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퍽 어색해 보였다. 세벨리아가 한숨을 삼키며 이불을 걷어 냈다.
“소파에 앉아 있어요.”
몇 시간 전 울다가 실신까지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침구라고 할 수도 없는 얄팍한 카펫 위에서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으니 몸 상태가 성할 리 없지.
세벨리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환자를 대하듯 그를 소파까지 이끌었다. 그때까지도 디하트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손 치워 봐요.”
“…….”
“얼굴은 닦아야 할 것 아니에요.”
욕실에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온 세벨리아가 그의 곁에 앉아 말했다. 그러나 디하트는 한사코 거부했다. 오히려 자유로운 한쪽 손을 엉거주춤 뻗은 채 수건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 꼴을 하면서까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세벨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앉아 있던 디하트의 어깨가 높이 튀어 올랐다.
“미, 미안.”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하아.”
세벨리아는 한숨을 쉬며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완전히 부어오른 눈가에 차가운 물수건을 갖다 대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진정하고, 내려가서 배부터 채워요. 밀린 일도 끝마치고… 그런 뒤에 이야기해요.”
“무슨, 이야기를.”
메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 디하트가 물었다. 부어오른 눈매 사이로 미친 듯이 흔들리는 그의 눈이 보였다. 세벨리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의 악연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