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1)화(91/171)
세벨리아의 방을 나서며 디하트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 이대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목이 꺾여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깨끗이 씻은 뒤 밥을 먹고 몸단장을 한 뒤에 돌아오라고 했으니까. 돌아온 다음에는…….
[우리의 악연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요.]“윽.”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집무실로 들어선 디하트는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차가운 손이 심장을 콱 틀어쥔 것처럼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찔했다.
“악연.”
독을 품은 가시처럼 날카로운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악연, 악역이라.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연구소에서부터 내내 자신과의 악연을 어떻게 정리할까, 그것만을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디하트의 잇새로 고통스러운 숨이 새어 나갔다. 그래, 그녀와 자신의 관계는 결코 행복한 단어로 치장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러니 악연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일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한사코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혼 생활 동안 자신이 행한 그 머저리 같은 일들, 한심하기 짝이 없는 판단들. 그로 인해 오롯이 고통받아야만 했던 세벨리아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악연이라 칭해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니 사과를 받은 뒤 이 질긴 인연을 정리하자고 청해도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내게 그녀의 청을 거절할 자격이 있긴 한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던 디하트는 차가운 비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하고 한심한 자신에게 쏘아 보내는 한탄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덧없는 조소를 흘리던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핑하고 도는 시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이 더러운 몰골을 어떻게든 정리하자. 그 뒤에 배를 채우고, 그녀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단장을 하고…….
그 뒤에는?
안녕, 우리 이렇게 악연을 정리합시다. 하고서 자신은 북부로 가고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영원토록 옷깃 한 번 스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건가?
‘난 그 삶을 버텨 낼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피식, 메마른 웃음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마땅히 그에 복종해야지. 이 모든 걸 멍청하게 망가트린 게 나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그게 날 죽이는 길이라 해도 별도리 없지.
욕실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우두커니 선 디하트에게서 울적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발밑에 고인 좌절감은 지옥처럼 그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때였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처음에는 일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들어 보니 그보다 더 짜증 나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클로드.”
얼굴을 싸맨 그가 침음을 흘렸다. 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지금은 세벨리아 외에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공작…님!”
클로드의 목소리가 재차 높아진 시점이었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아, 일레이 경. 실례했습니다. 공작님께 급히 전해 드려야 할 소식을 접한지라.”
항상 타이밍을 못 맞추던 일레이가 웬일로 나타나 클로드를 저지했다. 디하트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떨어트리고 텅 빈 눈으로 문가를 돌아보았다. 투닥거리는 소리가 문틈 새로 들렸다.
“어펜츠 씨, 급한 소식이 있다면 집무실로 찾아오시는 게 아니라 절 찾아오셨어야죠. 자꾸 이런 식으로 공작님을 친구분 대하듯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친구라니, 그러려던 게 아니오.”
“그래요? 그럼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자, 전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클로드가 질질 끌려 나가는 소리를 듣던 디하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클로드는 과거의 이름과 그에 따른 악연을 버리고 칼 어펜츠로서 자신의 곁에 있었다. 악연을 정리한 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자신과 새 인연을 쌓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는 세벨리아와 달리 반강제적으로 클로드 인버네스라는 이름을 버려야 했지만 어찌 되었든 세벨리아와 사정이 비슷한 건 마찬가지였다.
“악연…….”
디하트가 생각하기에 세벨리아가 정리하자고 한 ‘악연’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뜻했다. 웨든 가의 막내딸로 자신의 아내가 되어 결국 인버네스의 배신자로서 끝난 그 세월. 그 시간만큼의 잘못된 인연 말이다.
그걸 정리한다는 것은 결국 과거를 청산하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세벨리아 웨든과 디하트 인버네스의 악연을 정리하고 나면 남은 건 ‘벨라’와 자신의 인연뿐이지 않을까?
‘클로드가 칼 어펜츠로서 내 곁에 머무는 것만큼을 바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거를 버린 당신에게, 새로운 삶을 찾은 당신에게 나도… 새로운 인연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죽은 공작부인인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쫓아온 미치광이 공작과 얼떨결에 휘말린 시한부 환자. 우스꽝스러운 그 인연은 정리하지 않고 남겨 주지 않을까.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지만 디하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끝까지 제게 모질지 못한 세벨리아의 마음 한 자락에 기댄 그의 염치없는 소망이었다.
“그것뿐이라도 좋아.”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본심이 흘러나왔다. 그것뿐이라도 좋았다. 실은 충분할 만큼 차고 넘쳤다.
“그렇게라도, 아주 작은 구실이라도 있다면…….”
감히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벨라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 그녀의 앞길을 막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바라는 대로 그 악연이라는 걸 정리하고 나면, 비로소 그녀가 자신을 끔찍한 전남편으로만 보지 않게 된다면.
‘가끔 당신을 먼발치에서나마 봐도 되지 않을까. 작은 인연조차 남기지 않고 나를 완전히 버리더라도 괜찮아. 그러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이 될 테니까.’
당신과 아무 사이도 아닌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멸시하고 고통 속에 몰아넣은 남편이 아닐 테니까. 그러니 머쓱해 하며 몇 번 눈을 마주쳐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스쳐 지나가고 자신도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다시 갈 길을 가고. 그런 식으로라도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적어도 다시 힐렌드 홀이 자신과 함께 통째로 불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 정말 그러면 좋겠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만큼 상냥하니까, 아마도 작은 인연쯤은 내버려 둬 줄 것이다. 그녀와의 모든 인연을 잃은 자신이 미쳐 날뛰다 죽지 않게끔 숨 쉴 구멍 하나쯤은 남겨 둬 줄 것이다.
“그것만이라도 충분해.”
가슴이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찔한 희망 한 자락을 움켜쥐고서 차가운 물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치켜든 디하트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울긋불긋한 눈가와 거칠어진 피부, 움푹 팬 뺨이 꼴 보기 싫었다. 그는 무심코 입술을 짓씹으려다 멈췄다.
‘자그마한 인연이라도 남겨 놓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좋은 인상을 줘야겠지.’
디하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입매를 굳혔다.
그는 힐렌드 홀에 있을 적 그녀의 취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렸다. 사치를 그리 즐기지는 않았고, 딱히 선호하는 스타일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취향을 짐작할 만한 게 있었다.
푸른 보석이 박힌 십자가 목걸이. 자신의 생일 선물로 준비했다는 그 목걸이는 저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어울려 보였던 게 분명했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그런 걸 좋아하는 건가.’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품었다. 수건을 집어 들어 물기를 닦는 그의 얼굴에 어떠한 결의가 새겨졌다.
* * *
“오래 걸리네.”
어느새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고개를 틀어 중정을 흘끗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인들 때문인가…….”
디하트를 보낸 뒤에도 한동안 시끄러웠던 1층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건너 듣기로는 리시아 영애에게 디하트의 일정을 넘긴 것 때문에 소집한 것 같던데,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날 피하는 동안 업무도 미뤄 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디하트는 저녁 전에 다시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세벨리아는 마냥 그를 기다리지 않고 우편국에 들러 데니사에게 답장을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리 할 말을 정리해 둘까.’
세벨리아는 빈 종이를 꺼내 디하트와 나눌 대화 주제들을 하나둘씩 적어 내려갔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 시간대별로 작성된 단어들은 그녀가 품고 있었던 원망이자 디하트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들이었다.
“흐음.”
목록을 내려다보는 세벨리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사실 디하트의 추측과 달리 그녀는 디하트와의 인연을 완전히 정리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말 그대로 두 사람의 악연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 ‘정리’해 보고 싶었다.
웨든에서의 기억도, 인버네스 시절의 삶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였다. 과거는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디하트와 여러 번 부딪히며 깨달았다.
그런 맥락에서 악연을 정리하자는 세벨리아의 말은 ‘우리 이제 아는 척하지 말자’가 아니라 ‘과거의 우리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이렇게 됐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자’에 가까웠다.
물론 그 사실을 디하트가 알 리 없지만.
‘아프게만 해서는 소용이 없어.’
단순히 디하트를 쥐고 흔들며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원망이 다 풀릴 거라 예측했지만 그건 단편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무너지다 못해 실신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세벨리아가 느낀 건 쾌감이 아니라 허무함이었으며 그보다 깊은 슬픔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했던 거야.”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기회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간 쌓였던 오해와 말하지 못했던 진심들을 털어놓고 차분하게 과거를 정리해야 했다. 과거를 온전히 수용한 뒤에야 비로소 다음 날을 꿈꿀 수 있게 되니까.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디하트를 기다리던 세벨리아는 곧 미친 듯한 속도로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디하트를 맞이했다.
“지금… 뭘 입고 있는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서프레디에 하나뿐인 고위 사제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제례복을 빼앗아 입고 온 디하트는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