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2)화(92/171)
검은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하얀 제례복을 입은 남자는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성직자도 그처럼 유혹적이지는 않을 터였다.
“별로인 모양이로군요.”
평소보다 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세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때마침 그의 등 뒤에서 햇살이 후광처럼 비쳤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비둘기 깃털처럼 하얀 제례복을 목 끝까지 단정히 입은 남자가 두 손을 모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눈썹 아래 그림자 진 금빛 눈동자는 슬픔을 담은 채 그녀를 응시했고, 맵시 좋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다시 다물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정말 외모만 그럴듯해서……!’
세벨리아는 디하트의 외모가 주는 엄청난 위력에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을 뻔했다. 그녀는 일단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다행히도 디하트의 무시무시한 마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벨라?”
“가서, 빨리 가서…. 아니,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가서 얼른 갈아입고 와요.”
세벨리아는 눈을 감은 그대로 손을 뻗어 디하트를 한 바퀴 돌렸다. 부드러운 제례복 아래로 단단한 몸이 느껴지자 세벨리아의 귓가가 붉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 옷도 주인에게 돌려주고요, 알았어요?”
다그치는 목소리에 디하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삼켰다.
‘실패인 모양이군.’
금욕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디하트는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울면 더욱 상황이 안 좋아질 뿐이다.
“하아…….”
세벨리아의 방을 나선 디하트는 목 끝까지 채운 옷깃을 내려 일부러 걸고 온 십자가 목걸이를 꾹 감싸 쥐었다. 잠시 뒤 돌아온 그는 평소처럼 헐렁한 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휴.”
익숙한 차림새에 세벨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반응에 디하트의 얼굴이 더욱 시커멓게 죽은 것도 모르고, 세벨리아는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자.’
디하트는 소파에 앉으며 의지를 다졌다. 그녀의 취향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점수를 따는 건 글렀으니 일단 무슨 말이 나오든 빌 생각이었다. 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이 없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디하트는 무릎에 손을 얹으며 여차하면 다시 한번 바닥에 무릎 꿇을 기세로 세벨리아를 기다렸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천진하게 방을 울렸다. 세벨리아는 상냥하게도 자신 같은 인간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디하트는 어쩐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미리 물을 끓여 뒀어야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 줘요.”
“이대로 밤을 새워도 좋으니 느긋하게 해요.”
“…네?”
“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본심에 디하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연구소에서부터 줄곧 이 모양이었다. 다시 만난 세벨리아 앞에서는 자꾸만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뜨거우니 조금 식혔다 마셔요.”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다과와 차가 놓였다. 허브를 우렸는지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기가 수증기를 따라 둥실 퍼졌다.
“…고마워요.”
디하트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거면서 굳이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일부러 세벨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적셨다.
“뜨거울 텐데.”
“괘, 괜찮아요.”
세벨리아의 말대로 허브티는 용암처럼 뜨거웠으나 디하트는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대로 우리 악수 한 번 하고 인연을 정리합시다, 라고 말할까 봐 속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차라리 선수를 칠까?’
뜨거운 차가 뇌를 익혀 버린 걸까, 아니면 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린 걸까. 죄책감 속에 숨어 있던 못된 성격이 슬금슬금 발을 뻗었다.
‘악연을 정리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보다 더 끔찍한 악연들이 여럿 있으니, 그들부터 정리해 주겠다고 하면…….’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눈 같았던 그의 양심 위로 검은 발자국이 콕콕 새겨질 뻔한 순간이었다. 세벨리아가 감았던 눈을 반짝 뜨며 입을 열었다.
“디하트.”
“으, 응. 아니, 예, 벨라. 말씀하세요.”
디하트는 놀라 찻잔을 꽉 붙들었다가 그대로 지문을 잃을 뻔했다. 어찌나 뜨거웠던지 그대로 손가락이 익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가 고통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세벨리아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래요.”
디하트가 뻣뻣해진 목을 겨우 수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두 손은 바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잘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이제는 당신도 깨닫고 있겠죠?”
“…….”
“단순히 중앙과 북부의 정치적 사정을 위해 억지로 강행한 계약 결혼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처음부터 우리 둘은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었어요.”
세벨리아가 가라앉은 눈으로 디하트를 응시했다. 창백하게 굳은 그는 식은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못한 채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딱딱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당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어느새 고개를 치켜든 디하트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으로 세벨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한테는, 정말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
“디하트, 당신도 이제는 알잖아요. 웨든은 나를 사랑받는 막내딸이라고 속여 왔어요. 그래서…….”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디하트가 금방이라도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가 세벨리아의 손을 잡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웨든 후작가에서 당신을 학대해 놓고 겉으로는 애정을 퍼붓는 척 사람들을 기만한 게 왜 당신의 책임이고 잘못이지? 당신은 어린아이였고, 무력했어. 나와의 결혼을 탈출구로 여길 만큼 당신은 궁지에 몰려 있는 피해자였다고……!”
“…….”
“왜, 왜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당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디하트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연을 정리하자고 하길래 나는 당연히 내 잘못을 돌이켜 짚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어. 멍청하고 어리석은 내 생각과 판단으로 어쩌면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던 우리의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었다고, 당신의 질책을 들을 줄 알았다고.”
세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디하트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
디하트의 입에서 비릿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상냥한 게 아니었다, 자신 같은 개자식이 죄를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 줄 만큼 배려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 또한 이 거지 같은 상황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이름을 버리고, 과거까지 버리고서 시한부의 몸을 이끌고 혼자 도망쳤으면서. 그토록 고통받고, 그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 한 번 받아 본 적 없으면서 끝까지 자신을 온전한 피해자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디하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군가 제 목구멍 안쪽으로 화약을 밀어 넣고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이대로 세상이 다 터져 나갔으면 싶었다. 당장에라도 힐렌드 홀로 달려가 사일러스의 사지를 잡아 뜯어 버리고 싶었다.
“후우…….”
디하트는 눈을 질끈 감고 끓어오르는 혈기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세벨리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디하트는 제 얼굴에 와닿는 시선에 겨우 두 눈을 떴다.
“하지만, 디하트. 내게도 책임이 있어요. 그때라도 난 내가 웨든에서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했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첩자라는 오해도 풀렸겠…….”
“내가, 내가 듣지 않았겠죠!”
“…….”
“그때의 나는 당신의 고백마저 변명이라고 치부했겠죠. 그 어떤 증거를 들이밀어도 거짓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거야. 그러니 제발, 제발 그만 해요.”
그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분노와 절망을 짓씹어 삼키며 세벨리아를 설득하려 애썼다.
“이건 아니야, 벨라. 이런 식으로는 아니라고요. 당신이 말하는 우리의 ‘악연’에 당신의 책임은 없어. 이런 식이라면… 나는 당신과의 악연을 정리하는 데 동의할 수 없어.”
뜨거운 숨을 삼키며 디하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차라리 내게 복수를 해요.”
“디하트!”
세벨리아가 새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예요?”
그녀가 무섭도록 얼굴을 굳히며 디하트에게 잡힌 손을 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디하트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탁자 위로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세벨리아를 덮쳤다. 푸른 눈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디하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 나로는 부족하지. 당신을 괴롭게 만든 모든 이에게 복수합시다. 당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렇게 할 겁니다. 당신의 그 상냥하고 착한 눈앞에 그 개자식들의 본성을 까발려 보여 주죠.”
낮은 목소리가 차갑게 식은 찻잔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요동치는 푸른 눈동자를 사로잡았다.
“당신을 이렇게까지 만든 사람들. 어린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한 줌의 희망조차 손에서 빼앗아 결국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을 진창에 빠트린 뒤에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역겨운 말을 듣고 나면…….”
넋이 나간 얼굴로 세벨리아는 디하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역광 속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억지로 겪어야 했던 그 지옥에 당신 또한 책임이 있다는 그런 멍청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겠지.”
타닥, 타닥. 디하트의 등 뒤로 하얀 불꽃이 터져 나갔다. 폭주의 전조였다.
“아.”
금빛 눈동자가 어느새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 순간, 디하트가 아직도 미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