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3)화(93/171)
“아.”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디하트가 언제 자리를 떠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세벨리아는 차갑게 식은 차를 개수대에 버리고 멍하니 서 있다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하나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할 때는 부득이하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뿐이었다. 세벨리아는 결국 침대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차라리 내게 복수해요.]“바보 같은 소리를.”
멍청한 남자. 세벨리아는 디하트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은 이미 그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그를 감정적으로 뒤흔들고 그의 마음을 쥐어뜯고 눈물 흘리게 만듦으로써 원망을 해소했다.
물론 어제 그가 제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그 계획은 잠정적으로 보류하기로 했지만…….
[내가 도와줄게요.]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는 제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자신에게 하는 복수를 도와주겠다니. 그런 정신 나간 말을 어떻게 그리 선뜻 내뱉을 수가 있는 거지?
디하트를 이해할 수 없다가도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제안에 화가 날 때쯤이면 눈물을 흘리며 실신하던 그의 모습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하긴 미쳤으니 당연한 건가…….’
하얗게 빛나던 그의 눈을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신음을 흘렸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미친 사람의 헛소리는 그대로 흘려 버리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문제였다.
“하.”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세벨리아는 베개를 부여잡은 채 신음했다. 참으로 우습게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혼란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한 짓들은 복수가 아니었나.’
나름대로 복수랍시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 짓이 그에게는 복수로 다가오지도 않았었던 걸까. 그래도 그렇게 눈물 흘리며 사죄한 걸 보면 타격이 없던 건 아닌데.
[아니, 나로는 부족하지. 당신을 괴롭게 만든 모든 이에게 복수합시다.]세벨리아는 불타오르는 눈으로 복수를 요구하던 디하트를 떠올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 디하트뿐만 아니라 그녀를 괴롭힌 모든 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자는 그 속삭임.
그게 바로 그녀가 디하트의 말을 흘리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자, 그녀의 마음을 들쑤시는 자괴감의 원인이었다.
“나는 아직도…….”
베개 틈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한기가 몸을 덮쳤다. 분노보다도 허탈함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디하트에게는 잘도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그 복수란 것도 참 하찮기 그지없는 주제에…….’
나라는 사람은 왜 아버지를 상대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실질적인 복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웨든 후작을 무너트릴 계책과 그 실현 가능성을 점치지 못해서 억울한 게 아니었다. 단지.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어.”
동굴에서 태어나 갇혀 자란 아이가 태양이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세벨리아는 감히 아버지를 상대로 한 복수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게 몹시 분하고 원망스러워 세벨리아는 베개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 * *
“하…!”
밭은 숨과 함께 거친 탄성이 터져 나갔다. 기가 찬다는 듯,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튀어나온 짧은 음절이 복도를 시끄럽게 울렸다.
쾅!
집무실 문을 발로 차 열어젖힌 디하트가 그대로 책상을 휩쓸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일레이가 겨우 정리해 놓은 집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벨라, 벨라. 벨라…….”
아니, 세벨리아. 차갑게 웃은 디하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던 세벨리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책상을 짚은 손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부었어야 해.”
그 부드러운 입술을 열어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칼을 들어 그들의 목을 베고 웃으며 그들의 술잔에 독을 탔어야 했다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 책임 따위를 운운하는 게 아니라……!’
어둑한 집무실 안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두 눈동자만이 흉흉하게 빛났다.
“멍청하기 그지없어.”
스스로의 한심함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상냥함? 배려? 세벨리아는 마음이 넓고 천성이 다정해서 제게 아량을 베푼 게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그녀의 어딘가 어긋난 책임론을 배려라 착각하고 그에 기대려 했었다.
“하!”
속을 불사르는 불꽃이 목구멍까지 넘실댔다. 이 뜨거운 감정을 그대로 토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하면 세벨리아 또한 다칠 것을 알기에, 그는 날카로운 힘을 제 안으로 욱여넣어야만 했다.
거지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공관을 무너트리고 초목을 불태우는 대신 제 속을 무너트리기로 작정한 남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삼켰다.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으나 불꽃이 그림자 진 곳을 밝히는 일은 없었다.
투둑. 혈관이 불거지다 못해 터져 나가는 소리가 고막을 선연히 울릴 무렵, 누군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레이의 기척이었다. 디하트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움직였다.
“무슨 용건이지.”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하얗고 작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 사그라들길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그 불꽃에 일레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하! 마침 잘 됐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난 디하트의 목덜미에 굵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일어난 핏줄은 손만 갖다 대도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꿀꺽, 일레이는 침을 삼켰다. 디하트가 집무실로 갔다는 보고를 듣고 급하게 달려온 게 살짝 후회되었다. 지금 이 순간, 디하트는 마치 걸어 다니는 화약고처럼 느껴졌으니까.
‘차라리 대놓고 난동을 부리시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방 안을 짓누르는 위압감도, 허공을 별처럼 수놓는 폭발도 없었다. 그러나 고요함 속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디하트는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욱 섬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레이는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긴장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디하트였다.
스슥, 꺼내든 편지에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긴 디하트가 종이를 봉투 안에 대강 구겨 넣더니 일레이를 향해 던졌다.
툭.
“공작님, 이건.”
“속달로 힐렌드 홀에 보내. 그리고 기사들에게 이야기해 짐을 챙겨라. 북부로 돌아간다.”
일레이의 얼굴에 미약한 화색이 도는 순간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해. 그리고… 그래, 의원 일행도 이번 북부행에 함께한다. 벨라 양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해 둬.”
“예?”
일레이의 새된 목소리는 무시한 채 디하트가 이어 말했다.
“더하여 북부 경계지역 도시들에 일시적인 봉쇄령을 내려라. 교역을 끊을 필요는 없지만 오고 가는 이들에 대한 검증 절차를 강화해. 특히, 중앙 출신 귀족들을 상대로.”
“중앙 출신에 한정해서 말입니까?”
“그래. 들어오는 건 상관없지만… 내 허락 없이 북부를 나가지 못하게 해.”
“잡음이 생길 텐데요. 자칫하다간 황실에서 나설 겁니다.”
“미치광이를 상대로 그들이 진지한 태도를 내보이지는 않을 거다. 그리했다간 자신들도 똑같은 수준이라는 걸 알리는 꼴이니. 적당히 지켜보다 말리는 시늉만 하겠지.”
피식, 웃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책상을 짚은 채 고개만 들어 일레이를 바라보는 디하트의 눈동자는 하얗게 표백되어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일레이는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똑똑.
긴장감을 깨트리는 평범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레이는 책상을 짚은 디하트의 손등 위로 한 줄기 불꽃이 튀어 오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
“무슨 일이지?”
디하트 대신 문을 연 일레이가 한 통의 편지를 건네받았다. 발신인을 본 그의 뺨이 굳었다. 망설이는 기색을 알아차린 디하트가 굽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가져와.”
일레이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지금 이 소식을 그에게 전하는 게 득이 될 것인가 실이 될 것인가. 그러나 그의 고민은 처음부터 쓸모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소리 없이 일레이의 등 뒤로 다가온 디하트가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텅 빈 손을 노려보던 일레이는 한숨을 삼켰다.
등 뒤에서 봉투를 잡아 뜯는 소리가 선연히 울려 퍼졌다. 쫘악. 길게 찢어진 봉투가 먹색 가루와 함께 나풀대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차라리 한바탕 소동이라도 일어났으면 할 정도로 짙고 어두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일레이는 당장이라도 문고리를 잡고 집무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으며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한발 늦었군.”
묵직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여 부디 상심치 말고 들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돌아가신 공작부인의 시신이 누군가에 의해 탈취된 듯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라이언이 보낸 편지에는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 * *
며칠 전의 일이었다.
“후작에게 붙인 감시가 몇 명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림스 후작의 의기양양한 행진을 떠나보내고 모든 일이 마무리될 줄 알았던 라이언은 갑자기 사라진 웨든 후작의 행방에 머리를 싸맸다.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온 라투르 관에는 그가 붙인 감시역들이 모두 기절해 쓰러져 있었다.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것이.”
우물쭈물하던 기사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타다 만 부적 몇 장을 품에서 꺼냈다. 주술사의 흔적이었다.
그걸 본 라이언의 머리에 그렌과 플로라가 고용한 주술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작자는 혐의가 불분명해 구금만 해 놓은 상태였다. 혀를 찬 라이언이 으르렁대며 몸을 돌렸다.
“당장 힐렌드 홀을 폐쇄하고 웨든 후작을 찾아라. 주요 순찰 구역을 중심으로 흩어져!”
다행히도 중요한 구역은 일찌감치 이중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림스가 혹시나 수작을 부릴까 봐 경계 태세를 강화한 덕이었다. 하지만 그게 실책이었다.
그 누구도 웨든 후작이 죽은 딸의 묘지를 파헤치려고 이 작당을 벌였으리라 생각지는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