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5)화(95/171)
저녁의 서프레디는 스산했다. 산맥 위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골목을 휩쓸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세벨리아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걸음을 바삐 했다.
역마차가 서는 남문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좀 더 일찍 연락을 보냈으면 미리 마중 나가 있었을 텐데.’
아마도 데니사는 자신이 보낸 답장을 받자마자 바로 얼시크를 떠난 것이리라.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속이 상했다.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벨리아는 거리를 지나다 상점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공관을 나서기 전에도 한차례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혈색도 괜찮고, 뺨도 어디 거칠게 일어난 곳이 없고… 응, 아파 보이지는 않는다. 다행이야.’
워츠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온 치료제는 그만큼의 효과를 발휘했다. 아직 완치 판정만 받지 않았을 뿐, 세벨리아는 제 몸을 갉아 먹던 병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데니사는 아마 그 소식을 들으면 자신보다 더 기뻐하리라. 세벨리아는 어느새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역마차들이 정차하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잠시 뒤, 검문을 통과한 마차 한 대가 느리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벨리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데니사가 타고 있는 마차일 것이다.
“……!”
곧 기대는 환희로 바뀌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창문 안쪽으로 데니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손에 움켜쥔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거센 바람이 모자를 벗겨 냈지만 느끼지조차 못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고막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세벨리아는 어느새 데니사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가씨, 아가씨. 우리 아가씨……!”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파도처럼 덮쳐 온 감정은 온몸을 적시는 거로도 모자라 그녀의 심장을 애틋함으로 물들였다. 세벨리아는 데니사를 껴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너무 보고 싶었어.”
세벨리아의 속삭임에 데니사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반가움이 앞서 일을 그르칠 뻔했다. 데니사는 이를 악물었다. 사일러스 웨든, 그 작자가 저지른 미친 짓이 이곳까지 알려지기 전에 세벨리아를 어서 데려가야 했다.
“아가씨, 일단 자리를 피하고…….”
데니사가 세벨리아를 그림자 쪽으로 이끌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심장이 뚝 떨어져 내리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얼굴의 반을 가리던 세벨리아의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 데니사가 주위를 바삐 훑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데니사는 서프레디가 시골 촌구석이라는 데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지. 데니사는 바삐 제가 매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냈다.
“데, 데니사?”
“고개 숙이세요. 아가씨, 얼른!”
세벨리아는 영문도 모른 채 머플러를 코 밑까지 칭칭 둘러야 했다. 그걸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녀는 품에서 도수 없는 안경까지 꺼내 들었다. 한숨 돌린 데니사가 그녀를 그림자 진 골목으로 이끌며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끔찍하도록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이군.”
데니사는 맹수 앞의 초식동물처럼 바짝 얼어붙었고, 세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디하트였다.
“그동안 잘 지낸 것 같아서 참 다행이야.”
급히 뛰쳐나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먹잇감을 노리듯 데니사에게 고정된 시선이 몹시 살벌했다. 제 죄를 아는 데니사는 침묵으로 대응하며 세벨리아를 제 뒤로 숨겼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대로 도망치세요.”
낮은 목소리로 데니사가 속삭였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데니사에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와닿을지 깨달았다.
데니사에게 이 상황은 위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겨우 빌어먹을 공작 놈의 손에서 도망친 제 아가씨가 다시 그 끔찍한 놈팡이에게 붙잡힐 위기.
“괜찮아.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데니사.”
“네?”
세벨리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데니사가 인상을 썼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주머니 속의 호신용 펜을 움켜쥐고 있었다. 디하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내뱉듯 말했다.
“용기가 가상하다 못해 정신머리가 나갔군. 주인을 지키기 위한 행동도 선을 넘으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파직, 작고 하얀 불꽃들이 그림자 진 골목을 밝혔다. 데니사가 예의 그 펜을 꺼내면 그녀에게 벼락을 떨어트릴 기세였다.
“…….”
“…….”
대놓고 서로를 적대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세벨리아가 미간을 짚었다.
“둘 다 일단 진정해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세벨리아가 난감해하는 사이, 데니사는 드디어 이상함을 눈치챘다. 디하트가 세벨리아를 보고도 달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설마, 지금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닌 건가?’
보아하니 세벨리아도 디하트의 등장에 크게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데니사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그녀를 위협하듯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불꽃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협소한 골목에는 다시 어둠과 함께 적막이 드리워졌다.
얼어붙은 공기를 깨트린 건 디하트였다. 그가 세벨리아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밤공기가 차가워요. 일단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그대가 원한다면 저 여인도 함께 공관에 머물게 하죠. 물론 방은 따로 써야겠지만.”
데니사를 지칭하며 디하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데니사는 해괴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세벨리아를 돌아보았다.
디하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제가 모시는 아가씨는 지금까지 디하트와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아가씨, 아니죠?”
“…….”
“세상에!”
데니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했다. 세벨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억지로 잡혀 있었다든가, 협박을 당한 건 아니니 정말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이게…….”
데니사가 말을 잇지 못하며 시간을 끌자 안달이 난 건 디하트였다. 사일러스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데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벨라, 당신은 먼저 공관으로 돌아가 있어요.”
“아니, 아니요. 아가씨는 이대로 저와 함께 떠나실 겁니다.”
정신을 차린 데니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공작님과 함께라면 더욱 위험해요.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저와 둘이 지내셔야 해요. 그게 최선이에요.”
그 말에 디하트가 순식간에 낯을 뒤바꿨다. 몸을 숙이고 수풀 속에 숨은 맹수처럼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디하트가 데니사를 몰아붙였다.
“나와 함께라면 위험하다고. 도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어와서 늘어놓는 건지 궁금하군. 당신이 자리를 비운 지금까지 벨라를 지킨 건 나인데 말이야.”
사실 데니사가 세벨리아의 곁을 지키지 못한 이유가 디하트 그 자신 때문이었지만 그는 몰랐으므로 매우 떳떳하게 데니사를 추궁했다.
“어디 한번 들어 보지. 참, 저번과 달리 내 옆구리를 내어줄 생각은 없으니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데없이 튀어나온 옆구리라는 말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세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데니사는 앓는 신음을 내뱉더니 한숨을 탁하고 내뱉었다.
그래, 디하트를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가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세벨리아 또한 도망칠 생각이 없는 지금 억지를 부려 봤자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생각 정리를 끝낸 데니사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고 이 추운 골목에 아가씨를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대와 말이 통하는 날이 오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로군. 이리도 쓸모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느라 벌써 밤이 다 되었지만 뭐, 결과가 좋으니 좋은 일이라고 쳐야겠지. 앞장설 테니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잘 따라오기나 해.”
데니사는 백기를 들기가 무섭게 쏘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언사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뱉는 말마다 잔뜩 비틀려 있는 게… 아무래도 제게 한 번 당했던 게 꽤 큰 앙금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벨라, 당신은 걷다가 힘들거나 뭔가 몸에 이상이 느껴지는 것 같으면 지체하지 말고 내게 말해요. 저 하녀를 공관으로 먼저 보내서 마차를 불러오게 할 테니까.”
제게는 한없이 비꼬는 말만 툭툭 던지다 세벨리아에게는 세상 다시 없을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디하트의 모습에 데니사의 얼굴이 해괴해졌다.
“…아가씨 말씀대로 협박당한 건 아니신 것 같네요.”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
디하트의 뒤를 따라가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 *
차가운 바람이 골목을 휩쓰는 밖과 달리 집무실에는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데니사는 긴장한 얼굴로 맞은편의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가씨에게 사과를 했다고?’
데니사는 공관에 짐을 풀고 식사를 하며 세벨리아로부터 그간의 일을 모두 전해 들었다.
‘낯짝도 두껍지.’
솔직히 말해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제게 그럴 권리는 없었다. 그건 세벨리아의 것이니까. 그래서 데니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참으며 곁에 앉은 세벨리아의 손을 꽉 붙잡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세벨리아가 그 걱정 어린 온기를 느끼며 디하트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았던 이유가 뭐죠?”
디하트는 입술을 달싹이다 데니사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해도 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걸 보고는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웨든 후작이…….”
그 순간, 데니사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녀는 숨도 못 쉬고 다급히 디하트의 말을 가로챘다.
“설마 그게 벌써 이곳까지 퍼졌나요?”
“뭐?”
“그 광고요, 후작이 낸 광고! 아가씨를 찾는다면서 온 신문에다 아가씨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걸어 낸 그 미친 짓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