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8)화(98/171)
고요한 신의 도시에 아침이 밝았다. 세 번째 언덕 안쪽 깊은 산맥에는 벌써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흙을 파헤치는 동안 리시아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후.”
또 그날의 꿈이다. 리시아는 이를 악물고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훔쳤다.
‘미친 공작 때문에 내가 이런 수모를.’
디하트에 의해 공관에서 쫓겨난 뒤로 리시아는 그날의 일을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겪었다. 의원의 말로는 공포가 몸에 새겨져 무의식중에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라 했던가.
참으로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시아가 분을 삭이는 사이 하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일렀다.
“아가씨, 세숫물을 준비했습니다.”
이를 꽉 깨문 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씻기고 침의를 갈아입혔다. 그사이 리시아는 두려운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아…….”
진정하자, 리시아 서프레디. 너는 이 서프레디에 영광을 되찾아 올 몸이야.
‘공작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는 차차 갚아 주도록 해야겠어.’
복수를 다짐하자 쿵쾅거리던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하녀 두 명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윤기 나게 틀어 올렸다. 슬슬 오찬실로 내려가 집사가 다려 놓은 신문을 보며 아침을 시작할 때였다.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리시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하녀가 정색하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침부터 이 무슨 무례입니까. 아가씨께서 오찬을 드신 뒤 다시 오도록 하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아셔야 할 소식입니다.”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리시아가 하녀에게 무슨 일인지 들어 보고 오라 시켰다. 이윽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녀가 돌아왔다.
그 모습에 리시아는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오만한 태도로 일갈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 호들갑이야.”
하녀는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당장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리시아가 재차 질책하자 결국 입을 열고 말았지만.
“인버네스 공작님께서 사흘 전 새벽을 틈타 서프레디를 떠났다고 합니다.”
“……뭐라?”
리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하녀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무례하게 대접한 그 날 이후로 공관의 하인들이 모두 교체된지라 저희도 소식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게다가 기사들 몇 명을 일부러 공관에 남겨 두고 마치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행세했다는군요.”
“변명은 됐어. 그래서 어디로 간 건지 추적은 했나?”
“남문으로 빠져나간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 이후의 행방은…….”
하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을 흐렸다. 리시아가 노기 띤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분을 숨기지 못하고 직접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아가씨.”
문 앞에는 하인이 아닌 집사가 서 있었다. 공관에서 관리를 맡고 있던 자였다. 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리시아에게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심각한 그의 얼굴에 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신문을 받아 펼쳐 들었다.
신문 일 면의 사분지 일을 차지하는 건 바로 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익숙한 얼굴에 리시아의 녹색 눈이 곧 부릅떠졌다. 초상화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
[작고한 세벨리아 인버네스의 일란성 쌍둥이의 행방을 찾습니다.]아름다운 금발을 곱게 늘어트린 우아한 여인의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갈색으로 물들이면… 공작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 여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
신문을 구긴 리시아가 짧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속을 불태우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이리 쉽게 복수의 기회가 올 줄이야.’
그녀가 진짜 죽은 공작 부인의 쌍둥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아니, 실은 진짜 쌍둥이라면 더욱더 좋았다. 사나운 미소와 함께 리시아가 집사에게 말했다.
“웨든 후작에게 편지 한 통을 써야겠다.”
“예? 그 말씀은.”
“미친 공작이 죽은 아내의 쌍둥이를 탐하고 있다는 걸 아버지 된 자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붉은 입술 끝이 오만하게 치켜 올라갔다.
“덤으로 두둑한 보상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로군.”
* * *
벨크람의 수도 랑그 엘리사는 황실의 통치가 아직도 건재한 유일한 지역으로, 흔히 중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여기서 유일하다는 말은 중앙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황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중앙에서 거주하지 않는 귀족들의 수행원이 항상 조촐한 거였군요. 처음 알았어요.”
세벨리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녀는 결혼 전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중앙으로 온 디하트가 데려온 수행원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합 스무 명밖에 되지 않던 디하트의 일행은 북부를 이끄는 자라는 명성답지 않게 조촐한 감이 있었다.
“수도에 입성한 뒤에는 하인을 더 고용해도 되지만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기사의 수에는 제약이 있죠.”
클로드가 덧붙여 설명했다.
“황실 기사단의 수를 넘으면 안 돼요. 황제가 무서워하거든.”
수도에 둥지를 튼 귀족들에게는 이렇다 할 사병이라는 게 없었으나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나 황실은 북부의 기사들을 두려워했다.
명분이 없어 기사 임명권을 빼앗지 못했을 뿐, 황실은 호시탐탐 북부의 병력을 축소하고자 기회를 엿보아 왔다. 물론 그건 다른 지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디하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괜히 그들을 겁쟁이들이라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는 창밖을 흘끗 훑더니 세벨리아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피곤하면 자도록 해요.”
그사이 마차 밖에서는 일레이가 수도 검문관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실랑이라기에는 심문관의 억지스러운 트집을 상대로 일레이가 일일이 맞받아치는 혈투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수행원이 뭐 이리 많습니까. 공작님께서 최근 들어 심적으로 힘들어지셨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혹시 식사 수발을 드는 하인이 늘어난 겁니까?”
“수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 본 적 없는 고귀한 분들에게 디저트를 먹여 주는 수행원이 필요하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요. 미안하지만 우리 공작님의 수행원은 검을 들면 들었지 포크 따위는 들지 않아서.”
빠직 힘줄이 솟은 검문관의 이마를 보며 일레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도 적잖이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러 수행원의 수를 맞추려고 공관에 기사 몇 명을 두고 왔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꼬투리라니.
“흠…….”
검문관이 마뜩잖은 얼굴로 디하트가 탄 마차와 일레이를 번갈아 보았다. 공작을 상대로 거진 한 시간을 허비하게 했으니 이쯤이면 중앙의 체면을 살렸다고 보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랑그 엘리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른 곳과는 비할 수 없는 수도만의 정취를 힘껏 느끼다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자긍심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검문관의 손짓에 길이 열렸다. 일레이는 웃는 낯으로 이를 박박 갈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 마차의 선두에 섰다.
다각다각. 하얀 포석 위로 말발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네 마리 말이 이끄는 검은 마차가 소리 없이 수도로 입성했다.
그 소식은 곧 저녁이 되기 전에 수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
인버네스 공작이 랑그 엘리사에 발을 들인 건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비공식적으로는 세 번째였다. 데니사를 붙잡기 위해 검문관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온 전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귀족, 사일러스는 하인이 들고 온 소식에 즐거움을 표했다.
“집안 정리보다 더 화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느리게 턱을 쓸어내린 그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책상 위에 쌓인 수십 부의 신문에는 하나같이 동일한 광고가 실려 있었다.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며 그가 직접 낸 광고였다.
“세벨리아를 잃고 미쳤다더니. 설마 이걸 보고 희망이라도 찾은 건가?”
세벨리아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추호도 모르는 그는 제멋대로 상황을 추측했다. 만약 디하트가 세벨리아의 쌍둥이 동생이라도 좋다며 매달린다면 꼴이 아주 재밌게 돌아갈 것 같다며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네이튼이 가져온 편지를 받아 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각한 일입니까?”
네이튼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일러스는 답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간에 깊게 파인 골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
“한마디라도 해 주십시오. 가문과 관계된 일이라면 후계자인 저도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네이튼이 항변했다. 그의 눈이 사일러스가 내던진 편지 봉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프레디라는 별 볼 일 없는 도시에서 온 편지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길래 아버지는 제게 눈짓 한 번 주지 않으시는가.
성질 급한 네이튼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를 때가 되어서야 사일러스는 편지를 접어 내려놓았다. 창백한 그의 푸른 눈에 일순간 격한 감정이 들끓었다 사라졌다.
“네이튼.”
“예.”
“넬리아를 불러오거라.”
“넬리아요? 그 애가 살롱에 놀러 다니는 것 말고 뭘 할 줄 안다고 부르십니까. 그냥 제게 맡기시면……!”
싸늘하게 꽂히는 시선에 네이튼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 숙인 그가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데려올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외출해 일황자 전하를 뵈러 간다며 소식을 남겼습니다.”
“귀찮게 되었군.”
사일러스가 혀를 찼다. 일황자와의 약혼을 공표하기 전까지 친분을 쌓으라며 종용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눈을 찌푸린 그가 곧 손을 까딱였다.
“세벨리아의 새 이름이나 생각해 놓고 있어라. 그 애가 내가 모르는 사이 수도로 들어온 것 같으니 하루빨리 움직여야겠어.”
“예?”
어리둥절한 네이튼을 바라보며 사일러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인버네스 공작께서 어릴 적 실종된 내 딸을 데리고 돌아오셨단다.”
아득, 이를 사리무는 사일러스를 보며 네이튼이 입을 떡 벌렸다.